6부 표류하는 고려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대내적 문제와 시대착오적인 중화세계의 일원으로 남으려 한 대외적 문제는 결국 고려 사회의 붕괴를 앞당긴다.
내부 문제는 무신정변을 불러 때이른 ‘군사독재’를 성립시켰고, 외부 문제는 몽골의 침략을 불러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식민지 시대를 열었다.
몽골이 물러가자 고려는 부활의 기회를 잡았으나, 신진사대부들은 다시금 중화세계의 낡은 우산 밑으로 기어든다.
1장 왕이 다스리지 않는 왕국
쿠데타의 조건
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 윤관(尹瓘), 김부식(金富軾) -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쉽다. 모두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한 명장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답이다. 위기의 국가를 구한 건 사실이나 ‘명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므로 명장이든 졸장이든 장수는 아니다. 이렇듯 문관이 안팎에서 벌어진 전란의 해결사로 역사에 이름이 남았다면 뭔가 사연이 있을 터이다.
960년에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은 자신이 후주의 절도사라는 신분으로 새 왕조를 건국했기에 처음부터 문치주의를 앞세웠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5ㆍ16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박정희는 대통령 출마를 위해 군에서 전역하면서 “두 번 다시는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는데, 1천 년 전 중국의 조광윤도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행여 다른 절도사가 자신의 흉내를 내면 안 될 테니까. 이런 중국의 분위기는 그대로 고려에 전해진다. 광종(光宗)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해 호족의 군대 조직을 약화시키고 과거제(科擧制)를 도입해 관료 사회를 앞당기려 한 게 바로 문치주의의 일환이다.
문제는 그 의도가 지나쳐 과거 과목에 무과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이 과거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은 이른바 양대업(兩大業)이라 불렸던 명경(明經)과 제술(製述)이니, 오로지 글을 읽고 쓰는 것만 중시했던 셈이다. 사실 호족 세력이 강력하게 남아있었던 초기 고려의 상황에서는 과거에 굳이 무과를 포함시킬 필요가 없었다. 모든 무장들은 지역의 지배자인 호족 휘하에 있으면서 그 호족을 왕처럼 받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정부에서 필요한 군사력 외에 특별히 무관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호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다시 말해 고려가 중앙집권적 왕국의 모습을 취하기 시작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현실은 변하는데 제도는 변하지 않는다. 몸은 자라는데 옷은 바뀌지 않는다. 그 점을 감지한 예종이 1109년 과거에 무과를 포함시켜 새 옷을 맞춰 주었으나 얼마 못 가서 인종 때인 1133년에 다시 낡은 옷을 걸쳐 입는다(무과가 다시 부활하는 건 조선시대의 일이다)【아마 이렇게 수구적인 자세로 되돌아간 데는 이자겸(李資謙)과 척준경이 남긴 후유증이 단단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자겸의 난을 진압하고 척준경마저 제거하고 난 뒤 인종과 개경 귀족들은 역시 유교적 국가 체제만이 살 길이라고 믿고 소폭의 체제 개편을 실시했다. 각 지방의 주현에 향학(鄕學)이라는 유학 교육기관을 세우고 서적소를 설치해서 유학자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낼 루트를 설치한 게 그것이다. 그 마무리 작업이 바로 예종이 도입했던 무과의 과거, 즉 무학재(武學齋)를 폐지한 조치다】. 이런 제도에서 무관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관직은 상장군(上將軍)이었으나 이는 정3품의 벼슬일 뿐이니 2품 이상은 꿈도 꿀 수 없다. ‘무관’이 되지 못하는 무장은 좋게 말해 전투 기술자이고 나쁘게 말하면 싸움꾼일 따름이다.
▲ 공민왕릉(황해북도 개성) - 출처: 우리역사넷
그나마 생활의 안정이라도 보장된다면 승진의 꿈은 포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그것마저 불안하다. 무신의 봉급은 그들에게 주어진 영업전(永業田)이라는 토지다. 군인들은 현직에 있는 한 영업전의 수조권을 가지고 있었고, 죽은 뒤에도 식구 중에 군인직을 승계하는 자가 있으면 이 권리를 세습할 수 있었다(직업[業]을 계속하는 한 영구히[永] 소유할 수 있다는 뜻에서 이름이 영업전이다). 전란이 많았던 초기에 군인의 역할이 컸던 만큼 당연히 영업전의 수혜 폭은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로 굴러간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거란의 침략을 받은 현종 때 변방에서 공을 세운 상장군 김훈(金訓, ?~1015)과 최질(崔質, ?~1015)은 내심 문관 승진을 기대했다(무관은 정3품이 한계니까 그 이상을 원하면 문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득권층인 문관들은 전혀 그들을 승진시켜줄 마음이 없는 데다 현종은 나라를 지키는 데 유교와 불교의 힘(문묘종사와 대장경)이 군인의 힘보다 더 낫다고 믿는 군주다. 가뜩이나 불평과 불만이 팽배한 그들에게 좌절을 넘어 분노를 안겨준 사건은 1014년에 문관들이 경군(京軍, 수도 경비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부족한 문관들의 녹봉에 충당하기로 결정한 일이다. 오늘날로 치면 국방비를 빼다가 공무원 연금으로 전용한 격이다. 더 이상 잃을 것은 없다고 판단한 김훈과 최질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에 쳐들어가 그 정책을 지휘한 문관들을 잡아죽이고 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 최초의 군사쿠데타는 5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서경의 책임자인 왕가도(王可道, ?~1034)가 서경에서 파티를 열고 현종과 그들을 초대한 후 거기서 그들 일당을 도륙해 버린 것이다(이처럼 개경이 쿠데타 세력에 넘어가도 서경이 또 다른 수도로 기능할 수 있었기에 묘청妙淸의 난도 가능했던 거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듯 국가는 문무의 날개로 굴러간다. 이럭저럭 위기는 넘겼지만 근본적 문제가 해결되긴커녕 인식조차 제대로 안 되고 있으니 어차피 위기는 또 닥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이 끝나고 군인의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일단 그 모순은 유예된다. 윤관(尹瓘)이 9성을 쌓을 때 잠시 있었던 여진과의 다툼은 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았고, 금나라와 형제관계가 군신관계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다시 모순은 잠복한다. 대외적인 문제가 일단락된 후 이자겸(李資謙)과 묘청의 내전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 모순이 바로 발동했으리라. 군인들은 여전히 제 몸값을 못 받고 있고, 여러 차례의 전란을 통해 발언권은 점차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사태가 끝난 뒤 드디어 그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필연이다. ‘군사쿠데타’의 조건은 숙성되고 있다. 다만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외척을 제거하고 묘청의 난으로 서경 세력을 제거한 뒤 독주 태세를 갖춘 개경 귀족들만 그런 분위기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 무심한 청자 나라가 안팎의 위기를 맞았어도 문화의 발달은 무심하기만 하다. 위쪽은 11세기 초반에 등장한 비색청자이고 아래쪽은 그 직후에 제작되기 시작한 상감청자다.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청자가 탄생한 시기였지만 그 배경에는 흥청거리는 개경 귀족의 향락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도 귀족들의 재정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보면, 결국 예술은 모두 그런 배경을 가지는 걸까?
한 세기를 끈 쿠데타
역사적 대형 사건은 대개 사소한 계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사건을 촉발시킨 배경은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된 것이지만 실제로 일이 터져나오는 계기는 필연이라기보다는 우연이다. 기원 전 264년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 메시나가 시라쿠사와의 다툼으로 로마 원로원에 SOS를 치지 않았다면 포에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기원후 303년 서진의 사마영이 흉노 족장 유연을 팔왕의 난에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계기들이 없었다 해도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어차피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을 테고 기원후 4세기에 중국은 오랜 분열기로 접어 들었겠지만, 어쨌든 계기로만 보면 지극히 사소한 것일 뿐 아니라 당시 그 계기를 만든 자들은 그런 결과가 빚어질지 미처 몰랐으리라는 이야기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고려 후기의 역사를 장식한 무신정권도 극히 사소한 계기로 터져나왔다. 아버지 인종이 치세 내내 이리저리 치이며 고생한 걸 잘 아는 의종(毅宗, 재위 1146~70)은 개경 귀족들과 단단히 결탁하는 것만이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길이라 믿었다. 또 개경 귀족들 역시 막 손에 쥔 권력을 계속 독점하기 위해선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사대부 체제가 굳어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비록 의종은 팔관회를 장려하고 서경을 다독이는 등 전통적인 사회 요소들을 끌어안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나, 기본적으로는 완벽한 유교 국가 수립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건국 이후 200년간 끊이지 않던 내외의 전란과 혼란은 유교 국가를 낳기 위한 진통이리라. 모든 고통이 사라진 지금 의종과 개경 귀족은 국왕과 사대부라는 조화로운 유교적 지배계급으로 군림할 권리가 있다.
이런 공동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개인적으로도 학문을 사랑했던 의종은 여러 모로 개경의 문신 세력과 죽이 잘 맞는 군주였다. 그의 불행은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한 데서 비롯된다. 열아홉에 즉위해서 마흔셋이 될 때까지 24년간이나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지난 시대의 혼란은 아버지 대에서 모두 끝난 듯싶었다. 1170년 한여름에 즐겨 다니던 보현원이란 유원지에 문신들과 함께 놀러 간 것은 그런 여유로움이었을 것이다.
왕과 군신의 행차에 호위 병력이 없을 수 없다. 전쟁과 내전의 시대가 지나자 군대의 가장 주요한 임무가 그런 행사를 호위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 런데 일행이 나들이의 중간 휴식처인 흥왕사를 향할 즈음, 그렇잖아도 손대면 터질 것만 같은 군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터졌다. 의종의 명으로 호위병들은 수박(手搏, 태껸과 비슷한 전통 무예인데 태껸이 주로 발을 쓰는 데 비해 수박은 손을 쓴다) 시범을 보였는데, 여기서 그만 예순 살의 노장 이소응(李紹膺, 1111~80)이 젊은 병사와 겨루다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한뢰(韓賴)라는 젊은 문신이 그의 뺨을 치며 놀려댄 것이다. 일단 분을 참고 흥왕사에 도착한 호위대장 정중부(鄭仲夫, 1106~79)는 즉각 이의방(李義方, ?~1174), 이고(李高, ?~1171) 등의 부하들을 불러 거사를 지시했다【사실 정중부는 개인적으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문신들의 처사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었다. 천민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군직에서 성공한 그는 인종때 김돈중(金敦中)이라는 젊은 문신에게서 수염을 촛불에 그을리는 수모를 당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삼십대 후반이었던 정중부는 참지 못하고 김돈중을 기둥에 묶어놓고 겁을 주었는데, 오히려 그 사건으로 꾸지람만 듣는다. 그도 그럴 것이 김돈중은 인종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당대 최고 실력자인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인종의 중재로 벌은 간신히 면했으나 정중부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치욕이었다. 1167년에도 김돈중은 의종이 행차할 때 한 호위병의 화살이 잘못해서 왕이 탄 수레에 맞는 사건이 일어나자 길길이 날뛰어 많은 무신들을 귀양보낸 일이 있었다. 이래저래 무신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그는 결국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나자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는데,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화를 당했으니 나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말을 남겼다】.
보현원에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돌변했고, 놀이터는 도살장으로 바뀌었다. 정중부 일당은 문신과 환관 수십 명을 살해한 다음 놀이터 연못 속에 시신들을 던져 버렸다. 즐거운 놀이를 기대했던 문신들이 오히려 무신들의 놀잇감이 되어 버린 격이랄까? 우연하고도 사소한 계기였으나 일단 사건이 터지자 무신들은 군인 특유의 기동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즉각 개경으로 가서 나머지 문신들을 싹쓸이한 정중부 일당은 의종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멀리 유배를 보내 버린 다음 의종의 동생인 익양공(翼陽公)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그가 바로 무신들이 세운 최초의 허수아비 왕인 명종(明宗, 재위 1170~97)이다(명종은 형 의종에게 자기 궁을 빼앗긴 일이 있었으니 내심으로는 그 사태가 반가웠을 것이다).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 다음 반대파를 숙청하고 허수아비를 왕으로 세운다. 이건 우리 현대사에서도 익숙한 군사쿠데타의 전형적인 공식이다. 다만 ‘왕위’를 직접 노렸던 현대사의 쿠데타와는 달리 12세기 고려에서는 쿠데타 세력이 직접 왕위를 차지하지 않은 것을 보면 고려의 군부는 왕실의 상징적인 지위만큼은 무시하지 않았다고 할까【반란이 일어났어도 왕실 자체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만큼 고려가 유교 왕국화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권의 조선시대에서 자세히 보겠지만, 유교왕국에서는 그 생리상 실권자와 상징적 권력자(국왕)가 분리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없는 문신의 사소한 손찌검에서 시작된 무신정권 시대가 이후로 100년이나 지속될 줄은 당시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하극상의 시대: 윗물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 우리 현대사에서 군사쿠데타의 대명사인 박정희가 온몸으로 증명해준 격언이지만, 그의 까마득한 선배격인 정중부도 역시 그 철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단 출발은 좋았다. 1953년 장성이 되고 나서 8년 동안 겨우 별 하나 늘렸다가 쿠데타 이후 2년 만에 별 두 개를 제 손으로 갖다 붙인 게 박정희라면, 정중부 일당은 한 술 더 떠서 집단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정중부의 벼슬 자체는 종2품인 참지정사(參知政事)에 머물렀지만 드디어 그때까지 ‘신성불가침’이었던 2품의 관문을 뚫은 데다 문관직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제 무관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쿠데타 정권의 근본적인 문제는 정통성의 결여에 있다. 쉽게 말해 한 번 하극상이 용인되었으니 그 다음의 하극상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권위로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니까 모든 일에 힘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정중부는 젊은 시절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데다 나이도 있는 만큼 모든 일에 조심했다. 문관 최고직인 시중 자리까지 욕심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신중한 태도는 부하들에게까지 전달되지 못한다. 사실 쿠데타로 집권한 자가 비둘기처럼 군다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정중부는 점차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앉고 실권은 매파인 이의방과 이고가 장악하게 된다(사실 쿠데타를 모의하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의 입김이 강했다. 수박 놀이에서도 이고가 분을 참지 못하고 현장에서 칼을 빼들려는 것을 정중부가 만류한 바 있다).
성질 급한 두 이씨가 마냥 사이좋게 지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일단 갓 태어난 정권을 안정시킨다는 점에서는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므로 초기에 그들은 중방(重房)을 사랑방이자 오락실로 삼고 국정을 주무르며 별 마찰 없이 지냈다【중방은 원래 존재하던 군 지휘관들의 회의 기구였는데, 정중부의 난 이후 실질적인 최고 정치기구로 형질이 변경되었다. 중방 정치가 실시되면서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고 상장군이 실권을 장악하는 묘한 ‘이중권력’의 군사독재가 자리잡게 되는데, 이 점은 때마침 같은 시기 일본의 정정과도 비슷한 면이 있어 흥미롭다. 12세기 중반 일본에서는 천황의 권위가 무너지고 사무라이 가문들끼리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승리한 미나모토 가문의 요리토모가 1190년 가마쿠라(도쿄 인근)에 최초의 바쿠후를 설치하고 세이이다이쇼군(征大將軍), 즉 쇼군(將軍)이 되면서 바쿠후 정치라는 특유의 무신정권 시대를 여는 것이다. 이후 일본의 바쿠후는 고려의 중방처럼 장군이 지배하는 최고 정치기구가 된다. 또한 일본의 천황은 무신정권 시기 고려의 국왕처럼 명맥은 유지하면서도 무신들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웃이지만 서로 교류가 거의 없었던 두 나라의 묘한 일치다】. 1171년에 일부 문ㆍ무관들이 무신정권을 처음으로 비판했을 때는 그들을 모두 잡아죽여 ‘살벌한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문제는 한 둥지에 매 두 마리가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다고 여기는 데도 그들의 의견이 일치했다는 점이다. 식구를 줄이기로 먼저 결심한 것은 이고였고, 선수를 친 것은 이의방이었다. 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의방이 먼저 궁성 밖에서 기다렸다가 이고를 쇠망치로 때려죽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권력은 독점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중방을 룸살롱으로, 정치를 오락으로 이해하고 있는 이의방이 새삼 개과천선할 리는 만무하다. 더구나 정부 내에서 무신정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음에도 이의방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딸을 태자비로 집어넣는 고도의(?) 정치 행위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무신경 덕분이다. 정부 바깥에서 무신정권에 처음으로 도전한 인물은 김보당(金甫當, ?~1173)이었다. 문신으로서 동북병마사였던 그는 1173년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제도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을 받들고 거사했다. 전직 왕이자 현직 왕의 형이 현직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셈인데, 결과적으로 의종은 유배 생활을 계속하느니만 못했다. 진압군으로 내려온 이의민(李義旼, ?~1196)이라는 자에게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후유증으로 김보당은 물론이고 다시 수많은 문신들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떼죽음을 당했다.
반란은 그럭저럭 진압되었지만 이제 고려는 본격적인 하극상의 시대를 맞았다. 전통적인 서열은 이미 무너진 데다가 누구보다 서열을 특히 따지는 문신들도 거의 씨가 말랐을 정도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다. 이듬해인 1174년에는 서경유수인 조위총(趙位寵, ?~1176)이 들고 일어나 북부 40여 개의 성을 장악하고 개경까지 쳐들어 오는 기세를 떨친다. 비록 개경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금나라에까지 구원을 요청하며 서경에서 2년간이나 버텼다(당시 금나라는 40여 개 성을 바치겠다는 조위총의 요구를 거부하고 그가 보낸 사신을 고려 정부에 인계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국정의 총책임자도 룸살롱에만 틀어 박혀 있을 순 없게 되었다. 그러나 진압 사령관으로 서경에 간 이의방은 오히려 반군에게 패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 ?~1179)이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결국 조위총의 난은 윤인첨(尹鱗瞻)이 맡아서 진압했는데, 그는 바로 윤언이의 아들이었으니 대를 물려가며 서경 세력과 맞싸운 셈이다(문신으로서 어렵게 살아남은 그는 여러 차례 무신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는데, 이를 계기로 파평 윤씨 가문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정중부는 아들 덕분에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곧 그 아들 덕분에 안락한 노후를 맞지 못하게 된다. 그 자신은 칠십 줄에 들면서 권력 욕심을 버렸지만 아들 정균의 입장에서는 이제 막 권력의 단맛을 보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부족했을까? 정균은 자신이 죽인 이의방을 본받아 왕실과 혼맥을 맺으려 했다가(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 했다) 무신 세력 내부에서조차 거센 반발을 산다. 5년 동안 권력을 누리던 정중부 가문은 결국 1179년 스물네 살의 경대승(慶大升, 1154~83)이 일으킨 반란으로 일가가 모두 도륙당하면서 칼로 일어난 죄과를 호되게 받는다.
나이가 적은 것도 특이하지만 경대승은 여러모로 다른 무신들과는 다른 이색적인 인물이다. 그는 음서(蔭敍)를 통해 무관직에 오를 만큼 가문도 좋았고, 정중부의 난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게다가 문신을 적대시하기만 했던 이전의 단순무식한 무신들과 달리 문신들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런 탓에 대다수 무신들과 등을 돌리게 된 그는 집권한 직후 중방의 기능을 정지시키고 새로 도방(都房)을 설치했는데,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친위대 조직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것을 알 만큼 균형잡힌 사고를 했던 듯하다. 비록 중방 정치 대신 도방 정치를 열었지만 도방을 오락장으로 전락시키지는 않았고 문신들을 기용하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아버지가 빼앗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어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는 5년 동안 집권하다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마 무신정권은 단순한 쿠데타 권력에서 벗어나 그 시기 일본의 바쿠후처럼 집권 능력을 갖추게 됐을지도 모른다.
사실 고려 왕실에게 경대승의 죽음은 무신정권을 끝장낼 수도 있는 찬스였다. 그 찬스를 무산시켜 버린 것은 못난 왕 명종이다. 이름만 왕일 뿐 어느덧 꼭두각시로 지내는 데 익숙해진 그는 자신의 팔다리를 묶고 있던 끈이 끊어지자 자유를 누리는 대신 오히려 겁을 집어먹었다. 그래서 명종은 부랴부랴 새 주인을 찾는데, 하필이면 바로 김보당의 난에서 자신의 형 의종을 살해한 이의민이었으니 얄궂지 않을 수 없다(당시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경대승(慶大升)을 피해 고향인 경주로 달아나 있던 이의민은 이렇게 해서 화려하게 중앙 무대에 복귀했다. 명종은 과연 새 주인을 맞아 만족했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의민은 그의 주인 노릇을 끝까지 책임졌다. 자신의 아들들과 더불어 마음껏 권세를 휘둘렀을 뿐 아니라 1196년 그가 최충헌(崔忠獻, 1149~1219)에게 살해당하면서 이듬해 명종도 폐위되었기 때문이다.
하극상의 시대: 아랫물
정중부의 난으로 비롯된 하극상은 정치 무대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도 맑을 수 없는 건 당연할뿐더러, 원래부터 중앙집권력이 약했던 사회였으니 한복판이 혼탁해진 판에 변두리가 멀쩡할 리 없다. 정계에서 권력을 놓고 무신들이 푸닥거리 굿판을 벌이는 동안 그 혼란스런 분위기는 금세 사회 전반으로 전염되었다.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은 그나마 관료 집단이 이끈 반란이었고, 따라서 권력을 목표로 한 쿠데타라고도 할 수 있으나 그 다음부터는 일반 농민이나 천민이 들고 일어났으니 말 그대로 ‘민란(民亂)’, 즉 하극상의 극치다.
봉기의 신호탄이 터진 것은 조위총의 난이 미처 끝나기도 전인 1176년 1월이었다. 공주의 명학소에 살던 천민인 망이와 망소이는 동료 천민들을 이끌고 공주 관아를 습격해서 기세를 올렸다【명학소의 소(所)란 향(鄕), 부곡(部曲) 등과 함께 고려의 지방행정제도에서 최말단에 속하는 구역이다. 이들 지역에 사는 천민은 신분상으로 노비보다 약간 나았지만 실은 노비나 다를 바 없었다. 개인 노비가 아니라 국가에서 부리는 노비라고 보면 된다. 다만 소의 천민은 향민이나 부곡민과 달리 특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향과 부곡은 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제도로, 둔전이나 공해전(公廨田,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는 토지) 같은 국유지를 경작하고 토목공사에 동원되었으나 소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특수한 물건들을 생산했는데, 기능으로 보면 오늘날의 국영기업체에 해당한다. 금광을 채굴하면 금소(金所), 도자기를 만들면 자기소(瓷器所), 종이를 만들면 지소(紙所), 소금을 생산하면 염소(鹽所)라고 부르는 식이다】.
당시 집권자였던 정중부는 북쪽을 막는 데 정신이 없는 데다 왕실의 공주를 며느리로 맞으려는 판에 남쪽의 공주에서 난리가 일어났으니 제대로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정부는 반군 측에 황급히 사신을 보내 어떻게든 달래보려 한다. 그러나 이미 공주를 장악한 데다 병마사를 자칭할 만큼 세력이 커진 망이와 망소이는 아무 소득도 없이 깃발을 내릴 의사가 전혀 없다. 정부는 강경책으로 돌아서서 3천의 군대로 진압에 나섰지만, 오히려 천민 반란군에게 정부군을 물리쳤다는 자부심마저 안겨주는 결과를 낳고 만다. 결국 정부는 다시 유화책으로 나서서 명학소를 충순현이라는 정식 현으로 격상시켜주겠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오죽 다급한 심정이었으면 현 이름도 충성스럽게 순종하라는 충순忠順일까?).
그러나 한껏 끗발이 오른 반란군은 그 제안마저 거부하고 예산과 충주까지 점령하면서 전선을 확대한다. 자칫하다간 후삼국시대 이래 250년 만에 다시 분열기를 맞을 판이다. 다행히도 때마침 1176년 말에 조위총의 난이 진압되면서 여유를 찾게 된 정부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전환하여 반군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양측은 강화를 도모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반군의 입장에서 정부의 약속을 믿는 것은 바보짓이다. 정부는 약속대로 충순현을 설치했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책임자 처벌’을 건너뛸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집안 식구들이 체포되자 망이와 망소이는 다시 들고 일어나 이번에는 개경까지 함락시키겠다고 을러댔다. 비록 으름장이긴 하지만 아산까지 손에 넣고 충청도 일대를 거의 장악한 그들을 더 이상 내버려 두었다가는 아예 나라를 둘로 나누자고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정부는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함으로써 결전의 의지를 불태운다.
벌써 몇 차례나 오락가락과 갈팡질팡을 거듭하던 정부였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과연 반군의 상대는 아니다. 게다가 정부군은 프로 군인이지만 반군의 주축인 농민들은 군인으로서는 아마추어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식량과 무기가 제한되어 있어 장기전에는 승산이 없는 데다가 농번기에 들어 농민들이 대열에서 이탈하자 반군의 힘은 급격히 약화된다. 결국 1177년 여름에 망이와 망소이가 체포되면서 반군은 완전히 소탕되었다.
▲ 하극상의 시대 무신정권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국가의 질서 자체를 뒤흔들었다. “저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로 하급 관리, 양민, 천민까지 하극상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지도는 1170년 무신정권이 성립한 이후 수십 년 동안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란을 보여준다.
비록 반란으로 중앙정부가 무너지는 일까지는 당하지 않았으나 이미 고려 사회는 총체적인 하극상으로 온통 만신창이가 되었다. 백성들은 걸핏하면 관청을 불사르고 양곡을 탈취하는가 하면, 관청의 노비들마저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다. 경대승(慶大升)의 집권기에 중앙 권력이 안정되면서 잠시 주춤하던 민란은 이의민이 명종의 초대를 받아 권좌에 오른 것을 계기로 다시 터져나온다. 그 가운데 특히 1193년 김사미(金沙彌, ?~1194)와 효심(孝心, ?~1194)이 일으킨 반란은 신라 부흥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경상도 청도에서 봉기한 김사미와 멀지 않은 울산에서 일어난 효심은 자연스럽게 한 무리를 이루었고 신라를 부활시키겠다고 호기롭게 주장했다. 그들도 아마 동향의 집권자인 이의민과의 전략적 제휴를 염두에 두고 있었겠지만 어쨌든 이의민이 그들과 내통한 것은 분명하다. 그의 아들 이지순(李至純)이 정부 진압군에 관한 정보를 비밀리에 전달한 덕분에 반군은 여러 차례 관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그 해 말에 파견된 대규모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몇 년 뒤 이의민이 실각한 데는 이미 이 사건에서 헛다리 짚은 후유증이 컸을 것이다.
이제 집권자는 민란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버렸으니 이의민을 살해하고 집권한 최충헌도 예외가 아니다. 불행이라면 그에게 주어진 시험문제는 그 전까지의 어느 것보다도 충격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관리에서 농민으로, 농민에서 천민으로 반란 주동자의 신분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면, 그 저점은 바로 노비가 될 것이다. 과연 최충헌이 해결해야 할 민란은 바로 고려 사회의 최하층인 노비들이 일으키게 된다.
사실 최충헌은 처음부터 자기가 이전의 깡패 같은 무신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애썼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던 그는 자신이 지닌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나, 국가 운영을 위해서나 무엇보다 질서를 회복하는 게 가장 시급하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말하자면 권력을 누리는 데 급급했던 이의민보다는 권력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려 했던 경대승(慶大升)의 해법을 따른 것이다(실제로 최충헌은 경대승과 더불어 무신 집권자들 중에서는 가장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며, 처음에는 문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최충헌은 명종에게 봉사(封事) 10조라는 개혁안을 올렸는데, 아마도 그는 명종이 그것을 제대로 시행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듬해인 1197년에 그것을 빌미로 명종을 폐위하고 후임 허수아비로 명종의 아우인 신종(神宗, 재위 1197 ∼ 1204)을 옹립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신하가 국왕을 갈아치우는 하극상이 일어났으니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번질 것은 이미 각오한 일, 그러나 하필이면 수도 개경의 노비들이 봉기할 줄은 최충헌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 말하는 짐승 고려시대의 노비 상속문서다. 물론 노비에게 재산을 물려준다는 게 아니라 귀족 집안에서 부리는 노비를 자식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다.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는 중요한 재산이었으며, 그래서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를 말하는 ‘짐승’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신정권으로 윗물이 흐려지자 아랫물도 탁해져서 노비까지 들고 일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1198년 늦봄에 노비인 만적(萬積, ?~1198)은 동료 노비들과 함께 개경 뒷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장연설을 한다. “무신란 이후 천한 노비가 고관대작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장군과 재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무신으로서 집권한 자들은 경대승과 최충헌을 제외하면 모두 근본 없는 천민 출신이었으니, 대단히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얼핏 시대를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슬로건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당시 대부분의 민란을 신분해방운동의 일환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그런 관점에는 문제가 있다. 물론 천민들이 봉기한 데는 사회적 신분 차별에 대한 불만감이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당시의 정황에서 민란의 주동자들조차 실제로 자신의 슬로건을 액면 그대로 믿었을지는 극히 의심스럽다(김사미의 신라 부흥이나 만적의 연설을 과연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왜 하필 그때 그런 구호를 외쳤는가 하는 점이다. 정중부의 난으로 국가 질서 자체가 무너진 시기가 아니었다면 그게 가능했을까?? 동양보다 시민의 역사가 훨씬 앞서는 서구의 역사에서도 신분해방의 요구가 실제로 제기되는 시기는 16세기부터다. 따라서 민란의 주동자들은 그저 하극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이득을 취하려 했을 뿐이다】.
사회의 최하층 신분이 스스럼없이 최상층 신분을 넘볼 만큼 고려의 병은 깊다. 요즘 같으면 유동성이 흘러넘치는 바람직스런 사회라고 하겠지만, 자치와 자율의 역량을 갖춘 시민의 시대가 오기 훨씬 전이니 그건 명백한 사회 혼란이다. 만적의 생각은 쉽게 말해 남이 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는 것, 혼란을 틈타 신분 상승을 이뤄보자는 것뿐이다. 좋게 말해 몽상가,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을 만큼 배짱이 두둑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내친 김에 그는 노비들에게 자신의 엄청난 음모를 밝힌다. 거사 일자를 정하고 그 날짜에 모두 함께 궁성으로 쳐들어가 같은 신분인 궁노들을 규합하자. 그리고 집권자인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자 자기 주인집으로 가서 주인들을 죽이고 천적(賤籍, 노비문서)을 불사르자.
계획대로 되었다 해도 성공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겠지만 그 음모는 실행에 옮겨지지도 못했다. 사실 만적의 허망한 꿈을 믿은 노비는 그 자신을 비롯해서 얼마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분위기에 취했을 따름이다. 그 나머지 중 하나가 자기 주인에게 음모를 고발하자 그 엄청난 거사는 불발로 끝나고 만다. 결국 아무 것도 실행되지 못하고, 나무하러 갔다가 애꿎게 끼여든 100여 명의 노비들만 몰살당한 셈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반란이 역사상 유명한 사건으로 남게 된 건 순전히 후대의 역사가들이 신분해방이라는 후대의 이념으로 과대포장한 덕분이다.
틀을 갖춘 군사독재
1196년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죽이고 집권했을 때 아마 사람들의 관심은 과연 그가 얼마나 버틸까였을 것이다. 정중부 이래로 30년 남짓 지나는 동안 권좌의 임자는 벌써 다섯 차례나 바뀌었고, 경대승(慶大升)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후임자의 손에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비록 최충헌이 나름대로 소신있게 나오고 있지만 결국에는 본색이 드러날 테고 누군가에 의해 칼로 일어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러나 최충헌은 난세의 리더답게 잔머리와 냉혹성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봉사 10조를 이용해서 임금을 갈아치운 게 잔꾀라면, 동생인 최충수(崔忠粹, ?~1197)를 죽인 것은 그의 단호함을 보여준다. 자신이 집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동생(터무니없게도 그들 형제는 이의민의 아들이 최충수 집의 비둘기를 빼앗으려 한 사건을 계기로 거사
했다)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집어넣으려 하자 최충헌(崔忠獻)은 동생을 죽여 분쟁의 싹을 제거해 버렸다.
동생이자 동지마저 죽일 정도라면 그가 권력을 누구와도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 과연 그는 정적은 물론이고 정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 가차없이 숙청한다. 여기에는 국왕마저 열외가 아니다. 1204년 병에 걸린 신종의 뒤를 이은 희종(熙宗, 재위 1204~11)이 내시와 모사해서 최충헌을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자 최충헌은 주저없이 희종을 폐위하고 명종의 아들을 불러다가 강종(康宗, 재위 1212~13)으로 즉위시킨다. 덕분에 강종은 우리 역사상 가장 늙은 나이(예순)로 즉위한 임금이 되었는데(왕계가 불명확한 삼국시대 초기왕들은 제외다), 얼마 못 가서 죽고 아들 고종(高宗, 재위 1213~59)에게로 왕위가 계승된다. 최충헌은 자신의 집권 시기에 네 명이나 왕을 갈아치우고 왕계도 마음대로 바꾸면서 고려 왕실을 주물렀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충헌(崔忠獻)이 왕위계승보다 더 중시한 것은 실질적 집권자의 계승이다(당시 일본에서 천황의 계승보다 바쿠후 정권의 소유자인 쇼군의 계승이 더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왕이야 어차피 바지저고리니까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지만 애써 장악한 실권이 자기 가문에서 상속되지 못한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된다. 게다가 어차피 무신정권이 들어섰으니 나라를 위해서도 정권의 안정이 무엇보다 긴요할 터이다. 여기서 그는 자연스럽게 선배들의 집권 과정으로 눈을 돌린다. 이고, 이의방, 이의민은 함부로 권세를 휘두르다가 살해당했고, 정중부 일가는 권력의 세습까지는 성공했으나 권력을 유지하기보다 향유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앞의 세 이씨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본받을 선배는 경대승(慶大升)밖에 없다. 그래서 최충헌은 경대승이 설치한 도방을 부활하고 더욱 강화한다. 그러나 친위대는 단기적으로 권력을 보장해주지만 장기적으로 국정 운영의 기구는 되지 못한다. 아마 경대승도 더 오래 살았더라면 도방만으로 국정을 완전히 커버할 수는 없음을 깨달았으리라. 그럼 뭐가 또 필요할까?
고민하던 최충헌(崔忠獻)에게 해답을 준 것은 불교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계시라도 받았을까?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자극을 가한 것은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조직으로서의 불교였다. 당시
최충헌의 독재에 맞설 만한 유일한 세력은 사원이었다. 고려 초기부터 사원들은 면세의 특권을 누리면서 방대한 사원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왕실이나 귀족 세력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자체 무장 조직까지 갖추고 있었다(나중에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단단히 한몫을 하게 되는 승병의 기원이다). 1209년 최충헌에 반감을 품은 청교(靑郊, 지금의 개풍)의 관리들은 사원 세력을 규합해서 독재를 타도하고자 한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비밀 결의문이 사원들을 두루 거치며 전달되다가 귀법사에 이르렀을 때 결국 펑크가 나고 만다. 귀법사 승려의 전갈을 받은 최충헌(崔忠獻)은 즉각 진압에 나선다(희종이 폐위된 것은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무신정권이 성립하자 종교로서의 불교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불교는 의천의 영향 아래 발달한 교종 계통의 천태종이 지배했는데, 그에 맞서 이 시기에는 선종 계통의 조계종이 새로 발달하게 된다. 오늘날 불교계의 2대 종파가 이 무렵에 형성된 셈이다. 조계종의 스타는 보조국사로 알려진 지눌(知訥, 1158~1210)이다. 그는 왕실과 귀족들에게 성행하던 교종보다 선종을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주장했는데, 하극상의 시대적 분위기에 걸맞은 종교개혁이라 하겠다. 아마 최충헌에 대한 반란도 당시 지눌이 선도한 불교 대통합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의천과 지눌은 모두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외쳤지만, 그 생리상 완전 통합은 불가능했다 (쉽게 말해 교종은 교과서에 충실하자는 것이고 선종은 깨달음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어 오늘날 불교계에서도 공부와 깨달음의 우선순위를 놓고 자주 논쟁이 벌어지지만, 그건 사실 닭과 달걀의 논쟁과 다를 바 없고 불교만이 아니라 어느 종교나 학문에서도 흔한 쟁점일 뿐이다)】. 이것을 계기로 사원 세력은 일망타진되었고 최충헌(崔忠獻)은 덤으로 고민을 해결했다. 반란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아예 상설기구화한 것이다.
출발부터 그랬으니 교정도감의 첫째 기능은 당연히 정치인과 관리에 대한 사찰이다. 그러나 권력이 실린 기관은 기능도 확대되게 마련이다. 사찰기구로 출발했던 교정도감의 기능은 점차 넓어져 행정과 세무는 물론 전반적인 국정의 중대사까지 총괄하게 된다. 교정도감을 상설화하면서 최충헌(崔忠獻)은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자신의 적절한 직함도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정도감의 책임자, 곧 교정별감이다(1205년에 그는 꿈에도 그리던 문하시중이 되었으나 낡아빠진 문신의 최고위직이란 이미 그에게 어울리는 직함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을 계기로 교정도감은 무신정권기 내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하며, 무신 집권자는 자동으로 교정별감이 되는 전통이 생겼다. 당대 일본사에 비유하면 바쿠후의 쇼군에 해당하지만, 그보다 더 익숙한 우리 현대사에 비유하면 교정도감은 박정희 정권 때 설치된 중앙정보부, 교정별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장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무신정권은 시대를 초월한 독재권력의 전형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셈이다.
이렇게 권력이 안정되자 최충헌(崔忠獻)은 비로소 다른 분야에도 신경쓸 여유를 얻게 된다.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으나 중앙 권력이 확실한 만큼 버텨낼 수 있고 차차 질서를 잡아갈 수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의 과제는 권력의 태생적인 결함, 즉 물리력에만 기반을 두고 있다는 취약점을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하여 문신들을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런 여유에서 나온 노선 전환이다(그런 탓에 이규보는 권력에 아부한 지식인으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왕조 시대에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의미한 비난이다).
시대를 앞서 ‘군사파쇼’의 기틀을 마련했던 덕에 최충헌(崔忠獻)은 칼로 일어난 자 칼로 망한다는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비록 1217년에는 다시 들고 일어난 사원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으로 승려 800명을 집단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2년 뒤인 1219년에 그는 암살이나 살해가 아닌 정상적 죽음을 맞았고, 교정별감이자 고려판 중앙정보부장이자 한반도판 쇼군의 지위는 아들 최우(崔瑀, ?~1249)에게로 순조롭게 상속되었다.
사실 말이 좋아 무신정권이지 이제 고려는 왕국이 아니라 깡패 집단이 지배하는 나라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그 보스는 대물림이 가능하니까 단순한 ‘조폭’ 정도가 아니라 마피아 수준이다. 무신 집권자로서는 처음으로 권력을 무난하게 상속받았다는 자신감 때문일까? 아버지 최충헌이 갓 잡은 권력을 안정시키는 데 급급했다면, 최우는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창조적인(?) 독재정권으로 발전시킨다.
그가 창조한 기구는 정방(政房)과 서방(書房)인데, 이름부터 ‘청(廳, 관청)’이 아닌 ‘방(房)’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둘 다 최우의 집안에 설치된 지배기구다. 기능 면에서 정방은 쉽게 말해 집안에 있는 교정도감에 해당한다. 힘으로 정상에 오른 권력자가 흔히 걱정하는 것은 바로 잦은 바깥 출입에서 변을 당하는 일일 테니까 최우는 아예 집안에서 모든 국정을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정방은 무신들이 완전 독점한 교정도감과 달리 문신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지배기관이란 점에서 나름대로 정치기구로서의 면모는 더 분명하다고 하겠다(그 덕분에 훗날 무신정권이 끝났을 때 교정도감은 폐지됐으나 정방은 계속 남게 된다). 이제 최우(崔瑀)는 문무 양측을 다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권력자가 됐다. 정방보다 문신 참여율이 더 높은 서방까지 창설한 것은 그런 자부심의 발로다. 정방이 집행기관이라면 서방은 국정 자문기관이므로 문신과 유학자들을 대거 참여시킬 수 있는 데다 무신정권기에 소외됐던 문신 세력을 회유하는 부수적 효과도 거둘 수 있으니 최우의 입장에서는 일석이조다.
이렇게 해서 바깥에는 별채(교정도감), 집안에는 방 세 개(도방, 정방, 서방)를 갖추고 수많은 사랑방 손님과 식객들(문신, 유학자)까지 거느리는 것으로 ‘무신의 집’은 완공되었다. 이렇게 지배기구를 완비하고 나서 최우(崔瑀)는 미뤄두었던 군제 개편에 나선다. 장기집권은 물론 권력 세습까지 보장된 판에 사병 조직이란 어울리지 않을 터, 그래서 그는 새로 마별초(馬別抄)라는 군대를 창설한다【별초란 이름 그대로 ‘특별히[別] 뽑은[招]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고려 초기부터 있었는데(앞서 윤관이 편성한 별무반도 별초의 하나다), 마별초라면 말할 것도 없이 기병대를 가리킨다. 그 전까지 고려의 군대 조직은 궁성 경비대와 변방의 진지에 주둔한 군대 이외에 별도로 상비군이 없었고 그때그때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이를테면 반란이 일어난다든가) 모병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최우는 역사상 최초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편성한 셈이다(최초의 상비군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게 아니라 무신 권력을 수호하는 목적을 지녔다는 것은 보기에 영 좋지 않지만). 이는 잠시 뒤에 나오겠지만 몽골이 성장하고 있는 대륙의 정세 변화에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 역시 도방처럼 최우의 친위대였으므로 사병 조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으나 도방이 보병들로 이루어진 데 비해 마별초는 기병대였으므로 일종의 의장대와 같은 역할도 맡았다. 마별초에서 재미를 본 최우(崔瑀)는 이후 도성 내의 치안 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도 편성했는데, 나중에 인원이 많아지면서 야별초가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고 여기에 신의군(神義軍,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병사들로 만든 군대)이 더해지면서 후대에 삼별초(三別抄)라 알려진 군대를 이루게 된다.
최충헌(崔忠獻)과 최우 부자의 2대에 걸친 노력으로 그간 혼란스러웠던 중앙 권력은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정상적인’ 왕국이었던 그 전과는 너무도 다른 체제다. 나라의 대표자라는 상징적 존재로만 강등된 국왕, 그리고 실권을 지닌 최씨 무신정권, 왕위와 실권자가 모두 세습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기도 하다. 그만큼 무신정권기 고려 사회의 지배 체제는 그 전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측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고려는 나라의 이름만 변하지 않았을 뿐 이 무렵에 새로운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무신정권기부터 고려 사회는 지배권력의 성격만이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면에서도 전과는 다른 측면을 보이게 된다. 별일만 없었다면 아마 이후부터는 그런 변화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를 지연시킨 ‘별일’이 고려 바깥에서 터진다. 최씨 집권 이후에도 간간이 터져나오던 민란들마저 중단시키고 전국을 폭풍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그 사건은 바로 몽골의 침략이다.
▲ 군사파쇼의 시대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설 무렵 공교롭게도 일본에서도 무신정권의 일본 버전이라 할 바쿠후가 성립했다. 그림은 바쿠후 정권을 낳은 헤이지의 난이라는 내전의 장면인데, 국왕과 중신들만을 처단하고 손쉽고도 평화롭게(?) 집권한 고려의 무신들에 비해 일본의 무사들은 서로 간에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서 군사파쇼의 시대를 열었다.
격변의 동북아
최우(崔瑀)가 정작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자기 집 바깥이 아니라 나라 바깥이었다. 그에게 최소한의 역사적 안목만 있었더라도, 고려의 대내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반드시 대외적인 국제질서가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리라. 송과의 국교를 트면서 광종(光宗) 대에 왕권 강화의 기회가 주어졌고, 거란의 요나라에 복속되면서 현종 대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회를 맞을 수 있었던 고려가 아니었던가? 비록 여진의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은 이후에는 안정을 누리는 대신 내란을 겪어야 했지만, 그것은 고려의 권력 구조 내부에 누적되어 오던 외척 세력과 문치주의의 모순이 분출되고 해소되는 과정이었으니 나름대로 필요한 단계였고 긴요한 시기였다. 이렇게 고려 왕조가 틀을 갖추고 발전해 오는 과정에는 고비고비마다 대외 정세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런데 다시 그 바깥의 정세가 달라지고 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조위총이 원조를 요청했을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그의 사신을 고려 정부에 인계할 만큼 고려와의 군신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했던 금나라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한족 제국이든 이민족 제국이든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하는 왕조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근본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없다. 그렇다면 금나라는 북송을 멸망시킨 성과에 만족하지 말고 대륙 정복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요나라처럼 단명한 제국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란이 랴오둥에 안주한 탓에 크게 뻗지 못했다는 점을 처음부터 알고 출발했던 금나라였지만, 막상 북송을 정복하고 중원을 손에 넣는 순간 그 성공에 도취해 버렸다. 고려가 내란에 시달리던 시기에 금나라는 정복왕조의 껍데기를 벗고 중국식 제국 체제로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그 때문에 고려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북중국에 국한된 ‘반토막’ 제국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 오히려 그 과정에서 금나라는 정복왕조 특유의 활력마저 잃게 된다. 12세기 중반 한때 남송 정복에 나섰다가 내부 반란으로 실패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북방에는 다시 세대 교체의 분위기가 숙성되었다. 역사의 시간표에 따르면 다음의 임자는 누가 되든 요와 금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고 중국 대륙 전체를 정복할 웅지를 지닌 민족일 게 분명하다. 요는 송을 제압했고 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화북을 먹었으니 다음의 패자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게 뻔하다는 이야기다. 그 새 임자는 누굴까? 바로 몽골이다.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몽골 초원에서 12세기 말부터 통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몽골 한 부족의 족장이었던 테무진은 인근 부족들과 연대와 투쟁을 거듭하면서 드디어 1189년에 몽골 부족연합의 맹주로 추대되어 칭기즈 칸(1162~1227)【칭기즈 칸은 한자로는 成吉思汗이라고 쓰고 읽기는 Chingiz Khan이라고 읽는다(한자를 우리말로 읽으면 ‘성길사한’이 되겠지만 발음을 그렇게 표기한 것일 뿐 한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汗, Khan)이라는 글자다. 몽골만이 아니라 원래 중국 북방의 유목 민족들은 우두머리를 한, 간, 칸 등으로 불렀는데, 이 말의 한자어 표기가 바로 汗이다. ‘한’의 음은 ‘간’이나 ‘칸’과 통한다. 음운 구성상으로도 k음(ㄱ, ㅋ)과 h음(ㅎ)은 서로 통한다(예를 들면 Cossack를 ‘카자흐’로 읽는다든가 Khrushchev를 흐루쇼프 라고 읽는 경우다). 그렇다면 신라 초기의 왕명이었던 거서간이나 마립간의 간도 그런 경우로 볼 수 있다(이사금, 왕검, 임금 등의 금이나 ‘검’도 같은 기원일지 모른다). 앞서 신라는 외래 이주민들, 특히 북방 출신의 민족들이 유입되면서 형성된 나라라고 했는데,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될 것이다】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받게 된다. 1206년 그는 통일을 완료하고 몽골제국을 세웠으며, 9년 뒤에는 금나라의 수도이자 중원의 중심인 연경(燕京, 베이징)을 손에 넣어 북방의 패자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최충헌(崔忠獻)이 독재의 기반을 구축하고 이들 최우(崔瑀)에게까지 권력을 물려줄 수 있었던 데는 몽골이 한반도에까지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 크다. 칭기즈 칸은 사실 한반도는커녕 중국 대륙에도 관심이 없었다. 남송 시대부터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역(중앙아시아)과의 경제적 교류에 일찌감치 주목했던 그는 금나라를 제압해 놓는 선에서 동방 경략을 일단락짓고 서역 원정에 나섰다. 예부터 동서 무역의 중추였던 실크로드를 장악해서 경제 대국을 이룩하는 게 그의 목표였으니, 과연 이 민족 왕조의 리더답게 그는, 중화세계에 만족하는 한족의 천자였다면 품지도 못했고 품을 필요도 없었던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를 넘어 멀리 호라즘(지금의 이란)까지 정복해서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되자, 비로소 아버지 칭기즈 칸을 계승한 오고타이 칸(재위 1229~41)은 그때까지의 노선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그의 과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계승하는 것, 둘째는 신흥 몽골제국을 반석 위에 올리는 것. 카라코룸(Karakorum, 喀喇崑崙)에 궁성을 지어 수도를 옮기고 새로 얻은 정복지들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하기 시작하고, 예법과 의식, 화폐제도와 조세제도를 정비해서 정복왕조의 한계를 탈피하려 한 것은 둘째 과제에 속한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들은 첫째 과제를 실행하기 위한 예비절차에 불과하다. 궁극적 목표인 정복의 완성을 위해 그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동아시아 경략에 나서는데, 그 일환으로 1231년부터 시작된 게 바로 고려 정벌이다【몽골 제국 전체적 관점에서 볼 때 고려 정벌은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몽골은 1234년 금나라의 명맥을 끊었고, 그 이듬해에는 역사적인 유럽 정벌을 시작했다. 바투가 이끄는 20만의 유럽 원정군은 특유의 기동성으로 6년 만에 러시아와 동유럽 일대를 유린하고 서유럽의 관문인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접경지대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만 오고타이가 급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철군하게 된다. 당시 정복의 초점은 당연히 유럽 전선에 있었으므로 한반도의 고려는 정복이라기보다는 단지 후방 다지기의 대상에 불과했다. 실제로 고려 정벌도 몽골 주력군이 아니라 본국으로부터 이 지역을 할당받은 칭기즈 칸의 동생 오치긴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고려는 3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까 고려가 세계제국 몽골을 맞아 엄청난 항전을 벌인 것처럼 지나치게 과대포장하는 건 곤란하다】.
▲ 역전되는 문명 드디어 비중화세계의 뒤집기가 이루어졌다. 동아시아 문명의 발생 이래 내내 중화세계에 뒤져 있던 중국 북방의 유목문명은 중화 농경문명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동안 꾸준히 힘을 키워오다가 마침내 중화세계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림은 그 초석을 놓은 칭기즈 칸의 몽골병사들이다.
인용
'역사&절기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횡무진 한국사 - 6부 표류하는 고려, 3장 해방, 재건, 그리고 멸망 (0) | 2021.06.15 |
---|---|
종횡무진 한국사 - 6부 표류하는 고려, 2장 최초의 이민족 지배 (0) | 2021.06.15 |
종횡무진 한국사 -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3장 안정의 대가 (0) | 2021.06.14 |
종횡무진 한국사 -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0) | 2021.06.14 |
종횡무진 한국사 -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1장 모순된 출발 (0) | 2021.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