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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 - 형재선생시집서(亨齋先生詩集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김종직 - 형재선생시집서(亨齋先生詩集序)

건방진방랑자 2019. 10. 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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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신 지 30년 만에 아버지의 시문집을 간행한 사연

형재선생시집서(亨齋先生詩集序)

 

김종직(金宗直)

 

 

世謂: ‘文章之與命, 不相爲謀, 要妙之作, 多發於山林覉旅之中, 達者則氣滿志得, 雖欲工, 不暇爲也.’ 余則以爲不然.

窮者而後加工, 雖信有之 然公侯貴人之能者, 亦豈少哉? 其器宇之宏, 而天分之高, 金章赤紱, 若固有之者, 出言而金石自諧, 觸思而風雲自隨, 其仁義之弸鬯于中者, 自然泄之於詩而不容掩也. 又焉有氣滿志得, 若細人處富貴者之爲也哉? 是故, 穆如之頌, 非關於覉旅; 紅藥之詠, 不在於山林, 燕許擅聲華之宗, 韓范富風雅之製, 如是者, 代不乏人焉.

雖吾東方之作者, 亦然. 高麗之盛, 表表名于世, 金文烈公李文順公李大諫金員外益齋稼亭牧隱諸先生, 非宰樞, 則給舍也, 其未達者, 吳世才林耆之數人而已. 以是言之, 益見達者之未嘗不工於詩也.

亨齋李先生, 生于麗季, 長于名胄, 而能踔厲不群, 無書不讀, 閎乎中, 而肆乎外. 其爲詩文, 優游渾厚, 法律森嚴. 少處濁世, 自鳴其胷中之蘊, 我聖神興運, 攀鱗附翼, 歷相四朝, 得施其經濟, 以紹祖烈, 而能以詩, 笙鏞一代. 嘗再奉使于皇朝, 燕薊, 涉江淮, 與聞人陸顒章謹輩唱和. 其都邑河山之巨麗, 禮樂文物之融侈, 收拾涵蓄, 以盡天下之大觀. 達者而工於詩, 先生亦其人也, 然而先生, 務自韜晦, 平生所作, 人罕得見之.

先生歿後三十餘年, 余與先生之孫監察永蓁同官, 賃屋又比隣, 相得甚驩. 成化乙酉春, 監察出守靈川, 將行也, 示余先生亂藁曰: “吾祖之功名事業, 銘之鐵卷, 紀之靑史者, 炳炳也, 而獨此文章, 無傳焉, 吾以是懼, 將欲縮節官廩, 以圖繡板, 子爲吾編之.”

余辭不獲, 則遂分古律詩二百九十六篇, 彙爲四卷, 雜著三篇, 附錄于左, 又竄定先生手草年譜, 而弁其卷首. 因喟而言曰: “家有弊箒, 爲孝子慈孫者, 尙不忍棄之, 况此言語菁華之不朽者乎? 况功名事業, 因是可以求其髣髴者乎? 君之子孫, 競欲克肖, 以不墜箕裘之業者, 將不在玆歟? 宜亟梓行, 以博於四方也.” 佔畢齋文集卷之一

 

 

 

 

해석

世謂: ‘文章之與命, 不相爲謀, 要妙之作, 多發於山林覉旅之中, 達者則氣滿志得, 雖欲工, 不暇爲也.’ 余則以爲不然.

세상에선 문장은 운명과 서로 도모하질 않기 때문에 솜씨가 있는[要妙] 작품이 대체로 산림이나 떠돌이 나그네 속에서 나오고 현달한 사람은 기가 가득 차고 뜻이 얻어져 비록 기교롭고자 해도 할 겨를이 없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窮者而後加工, 雖信有之 然公侯貴人之能者, 亦豈少哉?

곤궁해진 이후에 기교로움을 더한다는 게 비록 참으로 있지만 공인귀인(公侯貴人)으로 잘 하는 이가 또한 어찌 적겠는가?

 

其器宇之宏, 而天分之高, 金章赤紱, 若固有之者, 出言而金石自諧, 觸思而風雲自隨, 其仁義之弸鬯于中者, 自然泄之於詩而不容掩也.

재능[器宇]이 크고 선천적인 분수가 높아 금장적불(金章赤紱)금장적불(金章赤紱): 금으로 된 인장과 붉은 인끈인데, 진한(秦漢) 시대에 승상(丞相)이 이것을 찼으므로, 즉 재상의 지위를 뜻한다.을 진실로 소유한 이라면 말을 내면 훌륭한 시문금석성(金石聲): 쇠나 돌로 만든 악기인 종경(鍾磬)에서 나는 음악 소리. 훌륭한 시문(詩文)에 비유하기도 한다.이 스스로 조화롭고 생각에 닿으면 바람과 구름이 스스로 따라서 인의(仁義)가 내면에서 가득 차서 자연스레 시로 발설됨에 가리길 용납지 않는다.

 

又焉有氣滿志得, 若細人處富貴者之爲也哉?

또한 기가 가득 차고 뜻이 얻어진 경우 보잘 것 없는 데도 부귀를 누리는 이들이 하는 것과 같겠는가?

 

是故, 穆如之頌, 非關於覉旅; 紅藥之詠, 不在於山林, 燕許擅聲華之宗, 韓范富風雅之製, 如是者, 代不乏人焉.

이런 까닭에 목여(穆如)의 송()【『시경(詩經)대아(大雅) 증민(烝民)길보가 송을 지어 부르니, 심장하기가 맑은 바람 같도다.[吉甫作誦 穆如淸風]” 한 데서 온 말이다. 주 선왕(周宣王)이 번후(樊侯) 중산보(仲山甫)를 명하여 제()에 성()을 쌓게 하자, 당시의 현상(賢相)인 윤길보(尹吉甫)가 이 시를 지어서 중산보를 전송했던 것이다.은 떠돌이에게만 관여된 게 아니고 홍약(紅藥)홍약은 작약(芍藥)의 별칭임. 남제(南齊) 때의 시인으로 벼슬이 선성 태수(宣城太守)에 이르렀던 사조(謝脁)의 직중서성시(直中書省詩)홍약은 층계에서 팔랑거리고, 푸른 이끼는 섬돌을 의지해 올라가네.[紅藥當階翻 蒼苔依砌上]”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가 명작(名作)으로 일컬어졌다.의 읊조림은 산림에만 있지 않으며 연허(燕許)연허(燕許): () 나라 때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과 허국공(許國公)에 봉해진 소정(蘇頲)을 합칭한 말인데, 이들은 모두 당대에 대문장(大文章)으로 일컬어졌었다.는 훌륭한 명성[聲華]의 으뜸을 멋대로 했고 송나라의 재상인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풍아의 지음을 풍부히 했으니 이와 같은 이들이 시대에 모자라지 않았다.

 

雖吾東方之作者, 亦然. 高麗之盛, 表表名于世, 金文烈公李文順公李大諫金員外益齋稼亭牧隱諸先生, 非宰樞, 則給舍也, 其未達者, 吳世才林耆之數人而已.

우리나라의 작가들 또한 그러하다. 고려의 전성기에 두드러지게 세상에 이름 난 김문열공(金文烈公)과 이문순공(李文順公)과 이대간(李大諫)ㆍ김원외(金員外)와 익재(益齋)와 가정(稼亭)과 목은(牧隱)의 여러 선생이 재추(宰樞)문무(文武)의 고관(高官) 대작(大爵)의 통틀어 일컬음.가 아니면 급사(給舍)급사(給舍): 고려 시대 급사중(給事中)과 사인(舍人)을 아울러 이르는 말. 급사중과 사인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4품 벼슬로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의 임무를 맡았음.였고 현달하지 못한 이론 오세재(吳世才)와 임기지(林耆之) 몇 사람뿐이다.

 

以是言之, 益見達者之未嘗不工於詩也.

이것으로 말하자면 더욱 현달한 사람이 일찍이 시에 기교롭지 않음이 없음을 볼 수 있다.

 

亨齋李先生, 生于麗季, 長于名胄, 而能踔厲不群, 無書不讀, 閎乎中, 而肆乎外.

형재(亨齋) 이직(李稷) 선생은 고려 말에 태어나 명문가 자손[名胄]으로 장성하여 무리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 책을 읽지 않음이 없어서 내면을 넓히고 외면에 늘어놓았다.

 

其爲詩文, 優游渾厚, 法律森嚴.

지은 시와 문장은 넉넉하고 자유로우며 어우러지고 두터워 법칙이 빼곡했다.

 

少處濁世, 自鳴其胷中之蘊, 我聖神興運, 攀鱗附翼, 歷相四朝, 得施其經濟, 以紹祖烈, 而能以詩, 笙鏞一代.

젊어 흐린 세상에 살았지만 스스로 가슴 속 온축된 것을 울렸고 우리의 성스러운 신이 운을 일으킴에 이르러 기린을 부여잡고 봉황의 날개에 붙어 4개의 조정에서 재상을 거쳤으며 나라를 다스릴 계책을 베풀며 조상의 공적을 이었으며 시에 잘함으로 한 시대를 감동케했다.

 

嘗再奉使于皇朝, 燕薊, 涉江淮, 與聞人陸顒章謹輩唱和.

일찍이 두 번 명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북경에 다다라 양자강과 회수를 건너 소문 난 육옹(陸顒)과 장근(章謹)의 무리와 시를 주고 받았다.

 

其都邑河山之巨麗, 禮樂文物之融侈, 收拾涵蓄, 以盡天下之大觀.

도읍과 강과 산의 크고도 고움과 예악과 문물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을 수습하고 담아내 천하의 큰 구경거리를 다했다.

 

達者而工於詩, 先生亦其人也, 然而先生, 務自韜晦, 平生所作, 人罕得見之.

현달하고도 시에 재능 있다고 하는데 선생 또한 그런 사람이었지만 선생은 스스로 감춰둠에 힘써 평생의 지은 것은 사람이 얻어 그걸 보기 드물다.

 

先生歿後三十餘年, 余與先生之孫監察永蓁同官, 賃屋又比隣, 相得甚驩.

선생이 돌아가신 30여년으로 나는 선생의 손자인 감찰(監察) 이영진(李永蓁)과 같은 관직으로 근방에 집을 빌려 서로 매우 친해졌다.

 

成化乙酉春, 監察出守靈川, 將行也, 示余先生亂藁曰:

성화(成化)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을유(1465)년 봄에 감찰이 영천(靈川)의 수령으로 체직되어 떠나려 할 때 나에게 선생의 흩어진 원고를 보여주며 말했다.

 

吾祖之功名事業, 銘之鐵卷, 紀之靑史者, 炳炳也, 而獨此文章, 無傳焉, 吾以是懼, 將欲縮節官廩, 以圖繡板, 子爲吾編之.”

우리 아버지의 공명과 사업이 철권(鐵卷)철권(鐵卷): 옛날 제왕(帝王)이 공신(功臣)들에게 나누어 주던 철제(鐵制)의 계권(契券)인데, 맨 위에 단사(丹砂)로 서사(誓詞)를 썼던바,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 공신들을 봉작(封爵)했는데 그 서사(誓詞)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는다 하더라도, 나라는 영원히 보존되어, 후손에게 대대로 영화가 미치게 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存 爰及苗裔].”고 한 데서 온 말로, 공신에 책록(策錄)된 것을 의미한다. 史記18 高祖功臣侯者年表에 새겨졌고 역사[靑史]에 기록되어 분명하고도 분명하지만 유독 이 문장은 전해지지 않아 나는 이 때문에 두려우니 장차 녹봉[官廩]을 긴축하고 절약하여 판에 수놓기를 도모하려 하니 그대가 나를 위해 그걸 편집해주게.”

 

余辭不獲, 則遂分古律詩二百九十六篇, 彙爲四卷, 雜著三篇, 附錄于左, 又竄定先生手草年譜, 而弁其卷首.

나는 사양했지만 받아지지 않아 마침내 고율시(古律詩) 296편을 나눠 4권으로 모았고 잡저(雜著) 3편은 왼쪽에 덧붙였으며 또한 선생께서 손수 초고한 연보(年譜)를 고쳐서[竄定] 책 머리에 갖추었다.

 

因喟而言曰: “家有弊箒, 爲孝子慈孫者, 尙不忍棄之, 况此言語菁華之不朽者乎? 况功名事業, 因是可以求其髣髴者乎?

탄식하며 말했다. “집에 망가진 빗자루가 있어도 효자인 자손은 오히려 차마 버리질 못하는데 하물며 이 언어가 밝게 빛나 썩지 않는 것은 오죽할까? 더군다나 공명과 사업이 이 때문에 비숫함을 구할 수 있음엔 오죽할까?

 

君之子孫, 競欲克肖, 以不墜箕裘之業者, 將不在玆歟? 宜亟梓行, 以博於四方也.” 佔畢齋文集卷之一

그대의 자손이 닮을 수 있길 다투어 가업[箕裘]의 사업을 실추시키지 않으려 하는 것이 장차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마땅히 빨리 간행하여 사방에 널리 알리라.”

 

 

인용

작가 / 지도

앞 글(詩史序) / 뒷 글(㵢溪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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