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진항
陳子禽謂子貢曰: “子爲恭也, 仲尼豈賢於子乎?”
爲恭, 謂爲恭敬推遜其師也.
子貢曰: “君子一言以爲知, 一言以爲不知, 言不可不愼也.
知, 去聲.
○ 責子禽不謹言.
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階, 梯也. 大可爲也, 化不可爲也, 故曰不可階而升.
夫子之得邦家者, 所謂立之斯立, 道之斯行, 綏之斯來, 動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
道, 去聲.
○ 立之, 謂植其生也. 道, 引也, 謂敎之也. 行, 從也. 綏, 安也. 來, 歸附也. 動, 謂鼓舞之也. 和, 所謂於變時雍. 言其感應之妙, 神速如此. 榮, 謂莫不尊親. 哀, 則如喪考妣.
程子曰: “此聖人之神化, 上下與天地同流者也.”
○ 謝氏曰: “觀子貢稱聖人語, 乃知晩年進德, 蓋極於高遠也. 夫子之得邦家者, 其鼓舞群動, 捷於桴鼓影響. 人雖見其變化, 而莫窺其所以變化也. 蓋不離於聖, 而有不可知者存焉, 聖而進於不可知之之神矣, 此殆難以思勉及也.”
해석
陳子禽謂子貢曰: “子爲恭也, 仲尼豈賢於子乎?”
진자금이 자공께 “선생님께서는 공경할지라도 중니께서 어찌 선생님보다 낫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爲恭, 謂爲恭敬推遜其師也.
위공(爲恭)은 공경하여 스승에게 겸손히 함을 말한다.
子貢曰: “君子一言以爲知, 一言以爲不知, 言不可不愼也.
자공이 말했다. “군자는 한 마디 말에 지혜롭다고도 하고 한 마디 말에 지혜롭지 못하다고도 하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知, 去聲.
○ 責子禽不謹言.
자금이 말을 삼가지 않은 것을 나무랐다.
○ 공자의 시대에는 공자가 많은 제자의 존경을 받는 데 대해 의문을 품거나 심지어 시기하는 인물이 꽤 많았던 듯하다. ‘논어’ ‘자장(子張)’의 제23장과 제24장에서는 노나라 대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험담했다. 오늘 나오는 제25장에서는 진자금(陳子禽)이 자공(子貢)의 공자 존숭 태도에 의문을 품었다. 진자금은 이름이 진항(陳亢)이되 공자의 제자라는 설과 자공의 제자라는 설이 있다.
이 장의 대화 내용으로 보면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듯하다. 진자금은 자공에게 “선생은 너무 겸손합니다. 중니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어찌 선생(자공)보다 뛰어나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자공은 군자란 존재는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고 타일러 위와 같이 말했다. 위지(爲知)와 위부지(爲不知)의 지(知)는 지(智)와 같아서, 지혜롭다는 뜻이다. 이위(以爲)는 ‘∼라 여긴다’는 뜻의 판단동사다.
퇴계 이황은 유희춘(柳希春)이 자신의 저술을 칭송하는 서찰을 보내오자 “보내주신 글월은 준엄하고 절실하게 제 미집(迷執)을 지적하는 뜻을 담은 말씀이 한마디도 없고 크게 칭찬하고 외람되게 존중하는 말씀을 하셨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붕우에게 충고(忠告)하고 책선(責善)하여 인(仁)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도리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어 “군자는 한 마디 말에 지혜롭다 하며 한 마디 말에 지혜롭지 않다 하는 것이거늘, 그대가 남을 허여함을 이렇게 신중하지 않게 하시니, 비단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저 남들이 그대를 비웃고 비난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다. ‘말을 신중히 하라’는 자공의 가르침을 남을 비판하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과도한 칭송을 경계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니, 그 마음가짐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
부자에 미칠 수 없음은 마치 하늘에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階, 梯也.
계(階)는 사다리다.
대인(大人)은 어느 정도 공자의 경지를 실천할 수는 있지만 화(化)는 할 수가 없다.
故曰不可階而升.
그러므로 사다리로 오를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 자공(子貢)의 공자 숭배는 점점 강도가 높아진다. ‘논어’ ‘자장(子張)’의 제23장에서는, 공자의 담장은 서너 길 높이라서 문을 통해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제24장에서는 사람이 해와 달과의 관계를 끊으려 한다고 해서 해와 달의 빛에 손상을 입힐 수는 없듯이 혹자가 공자를 비방하여 공자와의 관계를 끊는다고 해도 공자의 덕에는 손상을 입힐 수가 없다고 했다. 이 제25장에서는 공자에게 미칠 수 없음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계(階)는 ‘사다리 제(梯)’와 같은데, ‘사다리를 걸친다’는 뜻의 동사로 사용했다. ‘사다리로 오를 수 없다’는 말에 대해 주자는, 대인(大人)은 억지로 해서 될 수 있지만 성인의 경지로 화(化)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맹자’ ‘진심(盡心)’에서 ‘충실하면서 빛남이 있음을 일러 대인(大人)이라 하고, 대인(大人)이면서 저절로 화(化)하는 것을 성인(聖人)이라 한다’고 했고, 장재(張載)가 ‘대인(大人)은 힘써서 될 수 있으나 화(化)하는 것은 억지로 할 수 없으니 익숙히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고 풀이했던 것에 근거를 둔다.
연암 박지원은 1765년(영조 41년)에 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보고는 시를 지어 ‘만 길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나, 이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萬丈海深誰汲引, 始信天有階可陞]’이라 했다. 하늘과 바다의 절대 절연을 부정했다. 하지만 마지막에서는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나니,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놓았는가[萬物咸覩如昨日, 有誰雙擎一躍騰]’라 하여, 해가 하늘로 불쑥 솟아오르는 것은 돌연한 창조임을 말했다. 두 비유는 절대가치를 추구하는 인간 삶의 모습을 절묘하게 상징한 듯하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夫子之得邦家者, 所謂立之斯立, 道之斯行, 綏之斯來, 動之斯和. 其生也榮, 其死也哀, 如之何其可及也.”
부자께서 나라를 다스리면 말했던 대로 ‘세우면 이에 서고 인도하면 이에 행하며 편안히 하면 모여들고 고무시키면 이에 화목해지며 살아계시면 영화롭게 되고 돌아가시면 슬퍼한다.’는 것이니, 어찌 미칠 수가 있겠는가?”
道, 去聲.
○ 立之, 謂植其生也.
그것을 세워준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을 세워준다는 것이다.
道, 引也, 謂敎之也.
도(道)는 인도한다는 것이니 그들을 가르친다는 말이다.
行, 從也. 綏, 安也.
행(行)은 따른다는 것이다. 수(綏)는 편안하다는 것이다.
來, 歸附也.
래(來)는 귀순하여 더부살이 한다는 것이다.
動, 謂鼓舞之也.
동(動)은 그들을 고무시키는 것이다.
和, 所謂於變時雍.
화(和)는 ‘아 변하여 그때에 화목하다’는 말이니,
言其感應之妙, 神速如此.
감응함의 오묘함이 신속하기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榮, 謂莫不尊親.
영(榮)은 높이고 친하게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哀, 則如喪考妣.
애(哀)는 어버이를 초상 지내는 것과 같다.
程子曰: “此聖人之神化, 上下與天地同流者也.”
정자가 “이것은 성인의 신묘한 교화가 온 세상에 유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謝氏曰: “觀子貢稱聖人語, 乃知晩年進德,
사량좌(謝良佐)가 말했다. “자공이 성인을 칭송한 이 말을 보면 만년에 덕에 나감이
蓋極於高遠也.
대개 고원한 데에 지극하였음을 알 수 있다.
夫子之得邦家者,
부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무리들을 고무시킴이
其鼓舞群動, 捷於桴鼓影響.
북을 두드리는 것과 그림자가 지는 것, 메아리가 울리는 것보다 빠르다.
人雖見其變化, 而莫窺其所以變化也.
사람이 비록 변화를 본다해도 변화된 까닭은 엿보지 못한다.
蓋不離於聖, 而有不可知者存焉,
대저 성인의 경지를 떠나지 않고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聖而進於不可知之之神矣,
성인이면서 그것을 알 수 없는 신묘함에 이른 것으로
此殆難以思勉及也.”
이것은 매우 생각과 노력으론 이르기 어려운 것이다.”
○ ‘논어’ ‘자장(子張)’의 제25장에서 자공은 공자를 숭앙하여 스승에게 미칠 수 없음은 마치 하늘을 사다리로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위와 같이 부연했다.
부자지득방가자(夫子之得邦家者)는 ‘공자가 나라를 차지해 다스린다면’이라고 가설한 말이다. 소위(所謂)는 옛말의 인용 사실을 표시한 것인데 기사야애(其死也哀)까지 걸린다. 립(立)은 확립(確立)해 줌이다. 사(斯)는 ‘이에 곧’의 뜻을 나타낸다. 도(道)는 도(導)와 같아, 인도하고 가르침이다. 행(行)은 이끄는 대로 따라감이다. 수(綏)는 편안하게 해 줌, 래(來)는 먼 곳의 사람도 이쪽으로 옴이다. 동(動)은 고동(鼓動)시켜줌이니, 곧 고무(鼓舞)이다. 정약용에 의하면, 사립사행(斯立斯行)은 백성들이 명령(命令)을 추종함을 말하고 사래사화(斯來斯和)는 백성들이 교화(敎化)를 따름을 말한다.
기생야(其生也)는 ‘그분이 살아계시면’, 기사야(其死也)는 ‘그분이 돌아가시면’이다. 영(榮)은 누구나 존친(尊親)한다는 뜻으로 보기도 하고 그분이 번영(繁榮)한다는 뜻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전자를 따랐다. 애(哀)는 누구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애상(哀傷)한다는 말이다. 여지하(如之何)는 ‘어찌’이다. 기가급야(其可及也)는 ‘어찌 미칠 수 있으랴’이니, 반어이다.
‘기생야영 기사야애(其生也榮, 其死也哀)’는 망인(亡人)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선인은 남을 위한 묘비와 묘지에 이 말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러한 평가를 받기를 기대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고전 > 논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 요왈 - 1. 요임금으로부터 유유히 흘러온 유학의 흐름 (0) | 2021.10.14 |
---|---|
논어 - 19. 자장 전문 (0) | 2021.10.14 |
논어 자장 - 24. 공손무숙이 비난한 공자를 자공이 변호하다 (0) | 2021.10.14 |
논어 자장 - 23. 공자의 담장은 몇 인이나 된다 (0) | 2021.10.14 |
논어 자장 - 22. 공손조가 공자를 비난하자, 자공이 공자를 방어하다 (0) | 2021.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