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의 한글사용과 그 의미
김인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국문학 전공
kkimins@hanmail.net
1. 머리말
한글은 모든 사람을 위해 창제되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사람들이 쉽게 익히고, 나날이 편하게 쓰도록 하기 위함”【나랏말ᄊᆞ미 中듀ᇰ國귁에 달아 文문字ᄍᆞᆼ와로 서르 ᄉᆞ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ᆡ 이런 젼ᄎᆞ로 어린 百ᄇᆡᆨ姓셔ᇰ이 니르고져 호 ᇙ배 이셔도 ᄆᆞᄎᆞᆷ내 제 ᄠᅳ들 시러 펴디 몯ᄒᆞᇙ 노미 하니라 내 이ᄅᆞᆯ 爲윙ᄒᆞ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ᄍᆞᆼᄅᆞᆯ ᄆᆡᇰᄀᆞ노니 사ᄅᆞᆷ마다 ᄒᆡᅇᅧ 수ᄫᅵ 니겨 날로 ᄡᅮ메 便뼌安ᅙᅡᆫ킈 ᄒᆞ고져 ᄒᆞᇙᄯᆞᄅᆞ미니라】이라고 밝혀 한글이 모든 사람을 위한 문자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한글의 실제 쓰임새도 서문에서 밝힌 의도와 부합했다. 한글은 세종대왕의 자손인 왕족은 물론이거니와 사족, 평민,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급과 계층이 사용하는 문자였다. 이러한 광범위한 사용은 한글이 한자에 비해 익히기 쉬운 편이성을 갖춘 문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한글 사용에 관한 기존 연구는 한글 사용의 주체로 중인과 아녀자를 상정하고 특히 여성의 한글 사용 실태를 밝히는 것에 관심을 두어왔다【강윤호, 「이조 여성과 한글 보존」, 『김활란박사 교직근속 사십주년 기념논문집』(이화여자대학교, 1958); 백두현, 「조선시대 여성의 문자생활 연구 조선왕조실록 및 한글필사본을 중심으로」, 『진단학보』 97(2004); 백두현, 「조선시대 여성의 문자생활 연구 한글 편지와 한글 고문서를 중심으로」, 『어문논총』 42(2005); 백두현, 「조선시대 여성의 문자생활 연구 한글 음식조리서와 여성 교육서를 중심으로」, 『어문논총』45(2006); 이종묵, 「조선시대 여성과 아동의 한시 향유와 이중언어체계」, 『진단학보』104(2007); 황문환, 「조선시대 언간 자료의 현황과 특성」, 『국어사연구』 제10호(2010).】. 이러한 연구사의 맥락은 일견 타당한 점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한글 자료의 상당수가 여성이 창작했거나 여성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지향이 아닌 한글 자료들은 상층계급의 필요에 의해 번역한 것(윤음, 포고문)【류승록, 「윤음언해의 연구」, 인천대학교 석사학위논문(1984); 윤혜영, 「조선시대 윤음언해본에 나타난 인용구조 연구」, 『한말연구』 29(2011); 김봉좌, 「조선시대 관청문서의 대민 유포와 한글 사용」, 『조선 후기 사회의 소통과 한글』(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사업단 제17회 HK워크숍, 2012. 11. 14).)】이나 상층계급이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특별히 번역한 것(교화서·농서·의서)【(유명우, 「한국 번역사에서 본 조선조 언해 번역」, 『번역학연구』 제5권 제2호(2004); 이강옥, 「이중언어 현상과 고전문학의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에 대한 연구」, 『어문학』106(2009); 김풍기, 「조선 전기 언해 사업의 문화적 의미」, 『한국어문학연구』 제58집(2012).】, 역시 한문을 모르는 하층계급과의 계약을 위해 사용한 것(한글 고문서)【(윤음, 포고문, 한글고문서 등의 자료와 연구사는 이상규, 『한글고문서연구』(경진,2011)에 제시·요약되어 있다.】 등이 지적되고 연구되어왔다.
소수의 연구를 제외하고는【김슬옹,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사를 통해 본 문자생활 연구」, 상명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05) 정도가 있다. 김슬옹은 한글을 제도적으로 보급된 공식문자로 보고 그 사용 양상을 분석했다.】 사대부는 여성이나 하층민 등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수동적이고도 임시적으로 한글을 사용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시각이 쌓여 현재는 ‘한글은 여성, 아동, 한문을 모르는 남성 등의 성인 사대부에 비해 지위가 낮은 이들을 위한 문자였다’는 인식이 연구사 전반을 관통하는 일종의 전제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사대부들의 한글 사용이 여성지향적·하층지향적이라는 전제는 실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우선 매우 잘 알려진 바대로 조선의 사대부는 한글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문학작품을 창작했다. 시조와 가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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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년 가을에 따로 성대한 잔치를 배설하여 마을의 어른들과 이웃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였다. 잔치를 크게 베풀고 차례로 일어나 술을 권하여 마침내 취해서 춤을 추기에 이르렀다. 각자 노래를 불렀고 옹(이현보)도 또한 화답하였으니 이것은 그때 지은 것이다.
辛亥之秋, 別設盛筵. 鄕中父老, 四隣邑宰俱會. 大張供具, 秩起酬酢, 終至醉舞. 各自唱歌, 翁亦和答. 此其所作也. 李賢輔, 聾巖集, 雜著 卷3, 「生日歌幷序」.
퇴계가 존경하던 고향의 노선배인 농암 이현보(14671555)의 생일잔치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마을의 어른들과 고을의 수령들이 취흥에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는 내용이다. 이 생일잔치에서 농암이 지은 「생일가」가 위 서문과 함께 그의 문집에 실려 전한다. 우리말 노래인 시조는 고려말 이래로 사대부들의 생활 속에서 가창적이고 즉흥적이며 오락적인 성격으로 자연스레 창작되고 있었다【임형택, 「국문학의 전통과 도산십이곡」, 한국문학사의 시각(창작과비평사, 1984)참조.】.
문학작품의 창작 외에도 상당수의 번역서가 사대부를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대명률직해』 등 법률집 번역서, 사서삼경 등 경서 번역서, 『두시언해』 등 시문집 번역서 등은 국가적 차원에서 당대의 학술역량을 결집하여 이루어낸 것들이다. 이러한 번역서들은 한문을 모르는 평민이나 배움을 시작하는 아이들을 위해 번역한 것이 아니라 사대부 자신이 독서하기 위한 번역한 것들이었다.
또 한자의 정확한 음가를 표기하기 위해 한글이 쓰였다. 한자의 올바른 발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문제시되어왔다. 한글의 창제 이유 중 하나도 한자의 올바른 음을 표기하기 위해서였다. 한자의 음에 대한 관심은 우리 한자음을 단독으로 표기한 『동국정운』, 중국 한자음을 표기한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등 초기 운서부터 중국 한자음과 우리 한자음을 아울러 표기한 『규장전운』 등 후기 운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한자의 음과 성조를 아는 것은 한문으로 시를 짓는 기본으로, 이들 운서에 표시된 한자음은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정보였을 것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예시한 번역서나 운서 등의 서적이 모두 어린아이나 한문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사대부들에게 한글은 생활 속에서 풍류를 즐기거나 공부를 하고 사전을 읽는 데 긴요한 것이었다. 사대부를 위한 쓰임새를 갖춘 한글 문헌들이 존재했고 사대부들 역시 적극적으로 이들을 독서하고 활용했다.
그렇다면 기존의 한글 사용에 관한 연구가 보여주고 있는 여성지향성과 하층지향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는 연구 자료를 한글고문서 위주로 편향되게 사용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간 한글의 사용에 관한 연구, 곧 한글생활 연구는 주로 한글로 된 공·사 문서와 언간 등을 주된 자료로 사용하여 연구되어왔다. 따라서 사대부들이 생산하고 이용한 한글문헌을 미처 다루지 못했고, 그 결과 한글 사용을 여성지향 혹은 하층지향적으로 파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 하층민 외에 사대부도 적극적인 한글 사용자층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그를 위해 사대부의 구체적인 한글 사용 양태를 알아 볼 것이다. 2장에서는 사대부를 위한 번역서를 살피고 3장에서는 사대부들의 우리말 표기에 대한 관심을 살필 것이다.
이 작업이 조선시대 한글 사용의 전체적인 모습을 재구성하는 밑작업이 되길 기대한다.
II. 사대부를 위한 번역
1. 번역의 전통과 사대부
한글 창제 이전에도 번역은 있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설총(655?~?)이 “방언으로 구경을 읽고 후생을 훈도했다[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라고 했고 『삼국유사』에는 “(설총이) 우리말로 화이(華夷)의 풍속과 물명을 이해하고 육경과 문학을 훈해(訓解)하니, 지금도 우리나라의 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以方音通會華夷方俗物名, 訓解六經文學, 至今海東業明經者, 傳受不絶]”라고 했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설총이 유가 경전을 구결이나 이두·향찰 등을 이용하여 우리말로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 구결을 붙여 경전을 해석하고 언해하는 전통은 설총이 창안한 구결을 이용한 번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결이란 용어는 『세조실록』에 처음 보이지만 『세종실록』 1428년 윤4월 18일의 기사 “임금이 변계량에게 말하기를, ‘옛날 태종께서 권근에게 명하여 오경에 토(吐)를 달라고 하니……’”의 주석에 “무릇 독서할 때에 우리말의 절구로써 읽는 것을 시속에서 토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중국의 구두(句讀)가 문장의 휴지점(休止點)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의 구결은 문장을 끊어줄 뿐만 아니라 문장성분까지도 밝혀줄 수 있다. 따라서 구결만으로도 충분히 번역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설총의 번역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식자층을 위한 풀이 및 해설의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번역은 주어와 술어를 채워 단순히 문장을 구성하는 문법적용의 수준이 아니라 경전의 참뜻을 해석하게 도와주어 유학이라는 철학사조에 다가가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번역이란 초기부터 한문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문 문장을 해독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 문장의 참뜻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기 위한 것이었다.
번역은 유가의 경전뿐만 아니라 법률서적이나 농서 등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에서도 이루어졌다. 『대명률』과 같은 책은 고려 말에 전법사(典法司)의 상소에 의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글과 말에 정통한 사람에게 명하여 참작하여 새로 정해야 한다【『고려사』 志 권38 刑法1 職制】.”라고 번역이 건의되었다. 『대명률』은 원나라의 『지정조격』을 대신한 법률서로 『경국대전』에 “用大明律”이라 하여 의용(依用)을 규정한 이래로 대한제국 말기까지 우리의 형법으로 통용된 법전이다. 조선 초 『대명률』을 우리나라에 적용하고자 했을 때 가장 큰 문제는 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문의 원문이 난해하여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명률』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395년(태조 4)에 『대명률』을 우리 이두로 풀어 번역한 『대명률직해』를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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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명률』은 법조문의 경중이 타당하므로 진실로 법을 집행하는 자들의 준칙이다. 성상께서 이를 중외에 널리 반포하여 관리들로 하여금 서로 전하여 외고 익혀 모두 법으로 취하게 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 문장의 용법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마다 쉽게 깨우치기 어려웠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는 삼한 때의 설총이 만든 우리 문자가 있어 이두라고 하는데, 민간에서는 나면서부터 이를 알고 능숙하게 익히고 있어 갑자기 고치기 어려우니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대명률』을) 깨우쳐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이 책을 이두로 읽도록 하여 타고난 능력으로 이끌어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
此大明律書科條, 輕重各有攸當, 誠執法者之準繩. 聖上思欲頒布中外, 使仕進輩傳相誦習, 皆得以取法. 然其使字不常, 人人未易曉. 况我本朝三韓時嶭聦所製方言文字, 謂之吏道, 土俗生知習熟, 未能遽革, 焉得家到戶諭, 每人而敎之哉. 宜將是書, 讀之以吏道, 導之以良能. -金祗, 「[跋文]」, 『大明律直解』(서울대학교규장각, 2001), 634쪽.
이 『대명률직해』의 간행 이후에도 1404년(태종 8), 1441년(태종 11),
1431년(세종 13), 1432년(세종 14) 네 차례에 걸쳐 『대명률직해』의 번역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발견된다. 이는 중국의 상황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조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정확한 번역을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안병희, 「대명률직해 이두의 연구」, 『규장각』 9(1985) 참조.】. 『대명률직해』 역시 그 독자는 일반 백성이 아닌 관료층이었다. 이렇듯 한글 창제 이전의 번역은 대개 식자층을 위한 것이었다. 식자층을 위한 번역은 한글이 창제되고 이두 대신 한글을 이용해 번역하는 언해(諺解)가 출현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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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원이 아뢰기를, “세자께서 『상서』를 진강하는데 언해가 없습니다. 지금 『상서』와 『예기』를 현토(懸吐)하고 해석하여 『시전언해』를 개간하듯이 하면 경연에만 도움이 있을 뿐 아니라 여염의 훈몽에도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38년(1605) 11월 3일.
예문 22에서 거론되는 세자는 광해군으로 당시 31세였다. 우리가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바와 같이 31세의 세자는 이미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진원은 세자를 위해 언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언해사업을 벌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예문을 통해보면 여러 번역서에 관용어처럼 등장하는 ‘여염(閭閻)’이란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문에 능숙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시 번역의 이유로 자주 거론되는 ‘훈몽(訓蒙)’ 역시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자학적 논리에 투철하지 않은 사람을 깨우치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경전의 언해는) 대중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사서삼경의 독자는 성리학을 탐색하는 사대부 계층이 절대적이므로 사서삼경언해 또한 기본적으로 사족 내에서의 대중화를 의미하지 일반 평민에게로의 확산을 지향하지는 않는다.”【유영옥, 「교정청본 사서언해의 경학적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0), 30쪽.】 조선시대 경서의 번역은 사족 내부에 성리학을 확산시키는 가운데 그들에게 표준해석을 제공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사서언해』 등 경서의 번역서들은 해석의 기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점은 아래 예문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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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이르기를, “관유강의(寬裕剛毅) 등의 넷을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으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첫 단락의 총명예지(聰明睿智) 네 글자는 사덕의 조목에 끼이지 않았다. 언해(諺解)를 가지고 관찰하면 그것을 사덕 밖에다 별도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총명예지는 어느 지위에 소속되어야 하는가?” -『정조실록』 21년(1797) 4월 20일.
예문 23은 정조가 경연에서 『중용』의 해석을 토론하는 내용의 실록 기사이다. 정조는 관유강의(寬裕剛毅)는 『중용』 31장의 첫 구절【『中庸』 31章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強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능히 총명하고 슬기롭고 지혜로워서 충분히 아랫사람에게 임할 수 있으니,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은 충분히 용납할 수 있으며, 굳셈을 발하고 강하고 강직함은 충분히 굳게 잡을 수 있으며, 재계하고 장엄하고 중도로 하고 바름은 충분히 경건할 수 있으며, 문장과 조리를 세밀하게 살핌은 충분히 사리를 변별할 수 있느니라.】을 해설한 주자의 주【『中庸』 31章 “聰明睿知, 生知之質. 臨, 謂居上而臨下也. 其下四者, 乃仁義禮智之德.”(‘총명예지’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질이고 ‘임한다’는 것은 윗 자리에 있으면서 아랫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니, 아래에 있는 네 가지는 바로 ‘인의예지’의 덕을 말한 것이다.)】를 토론의 주제로 묻고 있다. 『중용』의 구절을 요약하자면 “성인은 ‘총명예지’하여 아랫사람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성인이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① 너그럽고 넉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움……, ② 굳셈을 발하고 강하고 강직함……, ③ 재계하고 장엄하고 중도로 하고 바름……, ④ 문장과 조리를 세밀하게 살핌…… 등이 있다”는 주장이다. 주자는 이 ① ② ③ ④를 각각 ‘인의예지’로 치환하여 설명하고 있다. 정조는 더 나아가 ① ② ③ ④를 실행하기 위한 전제로 거론되고 있는 ‘총명예지(聰明睿智)’의 존재조건을 묻고 있다. 그것은 성인이 타고난 것인 동시에 군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경전의 원문과 함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이 『중용언해』이다. 『중용언해』의 번역에 의거하여 자신의 번역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경전 해석의 정당성이 특정 번역서에 의해 확보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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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별일 없었다.【『논어』에 의문 나는 대목을 어제 접대 때문에 미처 다 베껴 쓰지 못했는데 오늘 아침에서야 다 쓸 수 있었다. 또 맹자를 읽고자 했으나 『사서대전』과 『맹자언해』를 구할 수 없어서 민자필의 집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한가했다.】
是日無所事【論語質疑處, 昨以接人未盡寫, 至今朝乃始畢書. 且欲讀孟子而未得大全及諺解, 故自子必家返, 則有等閑事.】 -趙克善, 『忍齋日錄』 1620년 3월 9일.
예문 24는 조극선(15951658)이 26세 되던 해 쓴 일기의 일부이다. 예문 22, 23을 참고하면 왜 조극선이 경전공부의 학습서로 『사서대전』과 『맹자언해』를 함께 거론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사서언해』는 한문이 서툰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사서대전』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공부의 표준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서언해』의 그 쓰임새가 꼭 성리학 이해의 심화에만 있지 않았다. 사대부 또한 한문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번역서를 손쉬운 한문학습의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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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전경문시강(專經文臣講)을 직접 시험하였다. 예전의 제도는 오경 가운데에서 돌아가며 뒤돌아 앉아서 암송하게 되어 있었으나, 명관들은 걸핏하면 스스로 ‘불통’이라 쓰고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임금이 그 폐단을 알고는 이에 자원하는 대로 임강(臨講)하라고 명하고, 또 언해가 없는 『예기』·『춘추』로 강에 응하였으므로 드디어 『주역』·『서전』·『시전』으로 차례차례 강을 시험함으로써 차례에 해당하는 글을 알아 미리 더 강습하도록 하고, 또 임강하여 불통한 자로 하여금 수치를 알게 하였는데, 이날은 바로 정식한 뒤 첫 번째 날이었다. 강원 중에 한 사람도 통(通)한 자가 없었으니 규례로 보아 파직시켜야 마땅했지만, 임금이 적중(適中)을 원하여 단지 금추만을 명하였다. -『영조실록』 18년(1742) 9월 27일.
위 예문은 영조대 젊은 문신을 대상으로 경전 시험하는 전경문신강에 관한 실록의 기사이다. 시험은 임강(臨講)이란 방식으로, 책을 앞에 펼쳐 놓고 읽은 후 구절의 뜻을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번역이 없는 『예기』·『춘추』 등으로 시험에 응하여 떨어지는 핑계로 삼지 못하도록 아예 번역이 있는 『주역』·『서전』·『시전』 등으로 시험을 보게 했다. 아울러 시험 볼 곳을 알려주어 미리 공부하도록 했는데 시험에 통과한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내용이다. 문신들이 경전의 학습을 등한히 한 사실도 재미있지만 그들에게 번역서로 공부하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 예문에서 번역서는 경전의 표준번역이라기보다 공부하기 편리하도록 된 참고서로 해석된다. 어려운 원전을 가지고 씨름하지 말고 쉽게 번역된 책을 보라는 의도가 보인다.
삼국시대 설총의 구결부터 조선시대 언해에 이르기까지 번역은 식자를 위한 것이었다. 번역서는 때로는 뜻을 명확히 하는 표준서였고, 때로는 손쉬운 참고서였다. 한글의 창제는 조선의 식자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이전보다 편리한 표준서와 참고서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고 사대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했다.
2. 표준 번역으로서의 언해
경서 외에도 사대부들을 위한 번역은 다양하게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두시언해』이다. 이 책이 간행된 이유에 대해서는 장유(1587~1638)가 쓴 서문에 자세하다.
[2-6]
시는 마음속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니 주해 따위를 낼 필요가 있겠는가. 주해도 낼 일이 없는데, 더구나 우리말로 번역할 필요가 있겠는가. 견식이 뛰어난 자의 입장에서 논한다면야 물론 이 말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마음속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을 경우 어찌 주해를 보지 않을 수 있겠으며, 또 주해를 보아도 시원하게 풀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번역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점이 바로 『두시언해』가 시인들에게 공이 있게 된 이유라고 하겠다. 시는 두보에 이르러 고금을 모두 통틀어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할 것이다. 소재 선택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수가 없고, 내포된 의미도 심오하기 그지없으며, 어휘의 구사도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만 하다. 그러니 ‘가슴에 국자감(國子監)이 들어 있지 않으면 두보의 시를 볼 수가 없다’는 옛사람의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주해를 낸 사람들이 천가(千家)로 일컬어질 만큼 많다고는 하지만 정작 비밀스러운 뜻과 오묘한 말에 대해서는 드러내 밝혀놓은 것이 적기 때문에 읽는 이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겨온 지가 오래되었다.
詩須心會, 何事箋解, 解猶無所事, 況譯之以方言乎. 自達識論之, 是固然矣. 爲學者謀之, 心有所未會, 烏可無解, 解有所未暢, 譯亦何可已也. 此杜詩諺解之所以有功於詩家也. 詩至杜少陵, 古今之能事畢矣. 庀材也極其博, 用意也極其深, 造語也極其變, 古人謂胸中無國子監, 不可看杜詩, 詎不信歟. 註解者稱千家, 謂其多也. 至其密義粤語, 鮮有發明, 讀者病之久矣. -張維, 『谿谷集』 卷6 「重刻杜詩諺解序」.
장유는 위 서문에서 언해가 필요 없는 경우와 언해가 필요한 경우를 구분하여 『두시언해』를 다시 펴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장유는 원래 한문에 능통하여 시를 잘 아는 사람에게는 주석이나 번역이 필요없다고 했다. 그런데 두보의 시는 소재를 취하는 범위도 넓고, 내포한 뜻도 깊으며, 시를 짓는 솜씨도 다양했다. 두보의 시는 “가슴에 국자감이 들어 있지 않으면 두보의 시를 볼 수 없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던 것이다. 때문에 시를 배우려는 사람은 시를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주석이 필요했으며, 주석이 선명치 않았기 때문에 언해가 필요했다는 것이 장유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 『두시언해』는 반드시 초학자만이 보는 책은 아니었다.
[2-7]
중외(中外)에 두보 시에 대한 제가의 주해를 구입하도록 명하였다. 이때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두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주석을 참고 교정하여 하나로 만들도록 하였으므로 구입하도록 한 것이었다. -『세종실록』 25년(1443) 4월 21일.
[2-8]
성화 신축년(1481)에 상이 홍문관전한 신 유윤겸 등에게 명하시기를 대략 이와 같이 하셨다. “두보 시에 대한 여러 주석가의 주석은 […] 뭇 설이 분분하여 서로 모순되므로 실상을 조사하여 통일하지 않을 수 없다. 너는 부디 편찬하도록 하라” 이에 여러 주를 널리 모아 번다한 것을 제거하고 잘못된 것을 정리하였으며, 지리(地理)·인물(人物)·자의(字意) 가운데 난해한 것은 절을 나누고 간략하게 의미를 소통시켜(逐節略疏) 독서에 편하게 하였다. 또한 우리말로 그 뜻을 번역하였다.
成化辛丑秋, 上命弘文館典翰臣柳允謙等, 若曰, “杜詩諸家之注詳矣. 然會箋(草堂詩史)繁而失之謬, 須溪(高崇蘭編次本 集千家註批點分類杜工部詩集) 簡而失之略. 衆說紛紜, 互相牴牾, 不可不硏覈而一. 爾其纂之.” 於是廣摭諸註, 芟繁釐枉, 地理人物字義之難解者, 逐節略疏, 以便考閱, 又以諺語, 譯其意旨. 向之所謂難澁者, 一覽瞭然. 書成, 繕 寫以進, 命臣序. […] 成化十七年二月上澣 […] 臣曺偉謹序. -曺偉, 『重刻杜詩諺解』 「[初刊本 序]」.
두시 주석서의 여러 판본을 모아 『찬주분류두시』의 간행을 명령한 세종이나 『분류두공부시언해』의 언해를 명령했던 성종은 모두 방대한 주석의 번다함과 주석이 상호 모순되는 오류를 지적하며 이들 주석을 하나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는 분분한 제가의 설을 정리하여 통일된 정론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두시언해』는 경서의 번역과 동일한 방식으로 두보의 시에 대한 주석과 풀이를 표준화하고 있는 것이다.
『두시언해』는 표준화된 번역과 간결하고 분명한 자의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이 번역서가 두보의 시에 대한 이해와 번역에 표준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의도로 기획되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유가적 문학관 속에서 두시를 문학의 전범으로 세우는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본화된 『두시언해』는 시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름난 시인 학자 또한 보게 되었다. 장유도 예문 2-6의 다른 곳에서 어렸을 때 『두시언해』를 빌려 보았지만 다시 보려고 했을 때는 끝내 얻지 못해 한스럽게 여겼다고 했고 정철은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골집에 있는 『두시언해』 전질을 가려오라고 하고 있다【行間, 切勿入州府紛華處, 以虧繩檢, 把表策兩冊, 溫理爲可. 鄕家所藏諺解杜詩全帙, 持來爲可. -鄭澈, 『松江集』 別集 卷1 家間書 「寄子」.】.
한글은 당대의 학문적 역량을 결집하여 표준 제시를 하는 데 대단히 큰 공헌을 했다. 당대 학문의 조류를 따라가기 위해서도 사대부들의 한글 학습은 필요한 것이었다.
Ⅲ. 사대부들의 우리말 음가의 표현
1. 한자음의 혼란과 운서의 편찬
한자의 정확한 음이 무엇인가는 사대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한자의 정확한 음가 표기는 한글 창제의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될 만큼 중요한 문제였으며 학술의 중요 토론거리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헌 도처에서 한자의 정확한 음이 논란이 되거나 정확한 음을 표시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3-1]
① 주강할 적에 상께서 ‘觔’자의 음과 뜻을 물으셨는데 승지 유전이 “음이 ‘근(斤)’입니다” 하였고 나는 “모르겠으니 물러가 자서를 상고해보고 알외겠습니다” 하였다.
① “晝講. 上問觔字音義如何. 承旨柳㙉對以音斤. 希春對以未詳, 請退考字書, 然後乃啓.”(1568년 7월 15일);
② 15일 주강 때 신이 시강관으로 입시했는데 상께서 ‘觔’자를 하문하시기에 신이 “모르겠으니 물러가 자서를 참고해보고 알외겠습니다” 했는데 물러와 상고해보니 바로 ‘筋’자의 별자(別字)일 뿐 다른 자가 아니었습니다. 승문원에서 쓴 사대문서에서 ‘觔’자를 쓴 이유는 ‘筋자가 획이 적어 고치기 쉽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 음이 같고 통용되는 자를 쓴 것입니다.
② “十五日晝講, 臣以侍講官入侍, 自上下問觔字, 臣對以未詳, 當退考字書以啓, 退而考之, 則卽筋字之別作, 非他字也. 承文院事大文書所寫觔字, 蓋因筋字畫少易改之, 避而書音同通用之字耳.”(1568년 7월 17일);
③ 사역관이 경서 『맹자』를 강하는 데 채택할 점이 많았다. 그중 글의 뜻을 모르거나 오착이 이어진 곳은 내가 모두 가르쳐주었다. ‘挫’자의 음을 ‘찰(札)’로 하지 말고 ‘坐’와 같이 음을 내야 한다든가 구법(九法)은 구주(洪範九疇)의 뜻이라는 등의 유가 그것이다.
③ “司譯之官, 講經書. 孟子多有可採, 其不曉文義, 誤錯相承處. 余皆敎之, 於終如挫字, 不當音札, 而當音坐, 九法乃是九疇之類.”(1573년 4월 8일);
④ 조계옥이 『훈몽자회』를 가지고 왔다. ‘歪’자의 음은 ‘왜’이고 경사(傾斜)의 뜻이다.
④ “趙啓沃持訓蒙字會來, 歪字音왜傾斜也.”(1574년 4월 26일);
⑤ 이웃에 사는 병조참판 박계현이 편지로 『통감』 「한기」에 ‘趙過代田’과 조광한의 ‘構會吏民’의 뜻과 ‘祋’자의 음을 물어왔기에 자세히 답해주었다.
⑤ “鄰居朴兵叅啓賢 以書問通鑑漢紀趙過代田, 趙廣漢構會吏民之義, 及祋字音. 余皆卽詳答.”(1574년 6월 29일);
⑥ 시강관이 『서경』 「목서편」 ‘今商王受惟婦言是用’ 대목을 강했는데 주석에 ‘背’자의 음을 ‘패[佩]’로 읽어야 한다는 대목에서 상이 말씀하시기를 “이 자를 어찌 이렇게 읽어야 하는가” 하자 노수신이 강력히 고집을 하므로 상께서 억지로 따랐다.
⑥ “侍講官, 講牧誓今商王受惟婦言是用, 傳背字以音佩讀. 上曰, 此字豈可如此讀. 盧守愼力執, 上姑勉從.”(1574년 7월 20일);
⑦ 꿈에 큰 파리를 보았다. ‘蠅’의 음은 ‘승(升)’이다.
⑦ “夢見大蠅, 蠅音升.”(1576년 5월 19일). -柳希春, 『眉巖日記』.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에서 한자의 음과 관련된 기록을 뽑은 것이다. 당대의 대학자였던 유희춘이 지금 우리가 매우 손쉽게 읽고 있는 한자의 음을 특별히 적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인 일기에서 한자의 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이 글자들의 음이 박식한 유희춘의 수준에서도 그날 처음 알았거나,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할 정도로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③에서는 『맹자』를 읽으며 글자의 음을 엉뚱하게 읽은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논어』나 『맹자』 등에 나오는 글자조차도 그 음이 혼동되거나 잘못 알려진 경우가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⑥에서는 한자의 정확한 음가가 밝혀지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서경』의 특정 구절에서 ‘背’자의 음을 ‘패’로 읽는 것에 대한 논란을 적으며 유희춘이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은 자신도 그 이유를 몰라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④의 기록은 흥미롭다. ‘歪’자의 음을 ‘왜’라고 한글로 밝혀놓은 것이다. 이는 유희춘이 한글을 알고 있었으며 한자음 표기에서 한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자음의 혼란은 학술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운서의 편찬이다.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운서는 고려 말 『삼운통고』가 있어 독서되고 있었지만 성조만 표시되어 있을 뿐 글자의 음이 적혀 있지 않아 불편했다. 『삼운통고』가 글자의 음을 표시하지 않은 이유는 물론 표기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자의 음을 표시한 최초의 운서는 한글 창제 후 편찬한 『동국정운』이다. 이후 중국 한자음을 표기한 『홍무정운』 등의 운서나 중국 한자음과 우리 한자음을 아울러 표기한 『규장전운』 등 여러 종의 운서가 한자음을 한글로 표기하게 되었다【여러 운서의 성과와 관계에 대해서는 정경일, 『한국 운서의 이해』(아카넷, 2002) 참조.】. 정확한 한자의 음을 알기 위해 운서를 읽기 위해서도 사대부들에게 한글 학습은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초로 한자의 음을 한글로 표기한 운서인 『동국정운』은 이런 혼란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 한자음과 우리 한자음을 절충하여 통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한자음의 음가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려는 시도는 물론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우리 한자음을 중국의 음에 가깝게 변화시키려고 한 초기 운서편찬자들의 의도는 선명히 읽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서 한자의 음이 어긋나는 것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가진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초기 사전 편찬자들은 중국의 음이 원본이기 때문에 중국의 한자음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중국 중심적인 세계관이 당연하던 시대에 오히려 우리나라의 독자성을 인식하는 경향이 생겨나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3-2]
(박상순 문:) 태자선마(太子洗馬)에서 洗자는 ‘앞서다’라는 말로 마땅히 ‘선’으로 읽어야 하지만 시속에서는 ‘세’로 읽으니 당연히 ‘세’로 읽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대전과 언해에서 글자의 음이 같지 않은 것이 많은데 모두 세속의 음을 따라야 하지 않습니까?.
(박세채 답:) 마땅히 ‘선’자로 읽어야 하고, 그 나머지는 마땅히 『사서대전』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한자음이 중국과는 크게 다르므로 진실로 명백한 것이 아니라면 우선 언해에 의하여도 무방하다.
太子洗馬, 洗之言先也. 當以先讀, 而諺音作世, 當以世讀否. 凡大全與諺解字音多有不同者, 率皆從諺否,
當以先字讀, 其餘當從大全. 然我國聲音與中國大異, 苟非十分明白, 則姑依諺解無妨. -朴世采, 『南溪集』 卷46 「答朴一和問 小學」.
한자음의 변화와 혼란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박세채(1631~1695)는 중국 한자음에 대한 우리 한자음의 독자성을 인정하려는 인식을 보여주어 주목된다. 예문 3-2에서 ‘太子洗馬’의 자음 가운데 ‘洗’의 음이 『사서대전』과 언해에서 ‘선’과 ‘세’로 차이나는 현상을 말하며 기본적으로는 『사서대전』을 따라야 하지만 부분적으로는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했다. 이것은 조선 한자음에 대한 긍정의 인식을 보인 것이다.
박세채의 이러한 태도는 세종대왕이 한자음을 사대교린과 관계되는 것으로 파악하여 의주와 요동 등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실제의 중국한자음을 배우게 하고자 하고【『세종실록』 25년(1443) 12월 13일.】, 『동국정운』을 통해 한자의 중국음과 한국음을 통합하려고 한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사고하던 조선시대 17세기 사대부에게서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지적될 수 있겠지만 한글 학습을 통한 우리음의 자각과 더불어 사대부들이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창작하던 국문시가를 중요한 이유로 제시하고자 한다.
2. 시가의 가창(歌唱)과 한글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기의 생각과 정서를 드러낼 때 기존의 여러 관습과 장르를 두루 실험하고 상황에 알맞은 형식을 찾아내고자 고민했다. 이때 한문과 한시는 사대부들의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도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한글을 이용한 시조와 가사 또한 그만의 정서와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었다. 한문을 사용한 문학과 한글(혹은 우리말)을 사용한 문학의 차이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혹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3-3]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 달라서 읊을 수는 있어도 노래할 수는 없다. 만약 노래를 부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한글로 엮어 지을 수밖에 없다. […]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 부르게 하고 나는 궤에 기대어 듣기도 한다.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춤추게 한다면 거의 세속의 더러움을 털어버리고, 감동하여 마음이 트일 것이니, 노래하는 자와 노래 듣는 자가 서로 유익함이 없지 않을 것이다.
然今之詩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 使兒輩朝夕習而歌之, 憑几而聽之. 亦令兒輩自歌而自舞蹈之, 庶幾可以蕩滌鄙吝, 感發融通, 而歌者與聽者, 不能無交有益焉. -李滉, 『退溪集』, 卷43 「陶山十二曲跋」.
이황(1501-1570)은 「도산십이곡발」을 통해 우리 말 노래의 가치를 뚜렷하게 피력했다. 한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대부라 하더라도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사용해 시를 창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말로 된 시가는 노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시가 하지 못하는 울림을 담을 수 있고, 또 그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한시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가치에 대한 인식은 정철의 「사미인곡」·「속미인곡」과 「관동별곡」을 「이소」에 비견한 김만중(1637-1692)의 평가를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松江關東別曲, 前後思美人歌, 乃我東之離騷, 而以其不可以文字寫之, 故惟樂人輩, 口相授受, 或傳以國書而已. 人有以七言詩翻關東曲而不能佳, 或謂澤堂少時作非也. 鳩摩羅什有言曰, 天竺俗最尙文, 其讚佛之詞, 極其華美. 今以譯泰語, 只得其意, 不得其辭. 理固然矣. 人心之發於口者, 爲言. 言之有節奏者, 爲歌詩文賦. 四方之言雖不同, 苟有能言者, 各因其言而節奏之, 則皆足以動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設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 而閭巷間樵童汲婦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 同日而論. 況此三別曲者, 有天機之自發, 而無夷俗之鄙俚, 自古左海眞文章, 只此三篇. 然又就三篇而論之, 則後美人尤 高. 關東前美人, 猶借文字語, 以節其色耳. -金萬重, 『西浦漫筆』 下 159.】.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말로 된 시가가 주는 가치가 단순히 감정을 실어 노래 부르는데서 오는 쾌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황은 한시와 시조의 차이를 ‘영(詠)’과 ‘가(歌)’로 파악하고 가창(歌唱)이 낳은 흥(興)에다가 시조의 존재이유를 설정하였다. 이것은 문학으로서의 하나의 자각이다. 한시에서는 충족할 수 없는 흥을 시조에서 찾고, 그 흥을 매개하여 자기를 창조하는 그런 자각이다. 시조에 대한 이황의 흥취는 조선조 사대부의 그것이기도 하다. -최진원, 『한국고전시가의 형상성』(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6), 53쪽.
최진원은 예문 3-3 「도산십이곡발」을 분석하여 우리 시가의 가치를 흥(興)에서 찾았다. 이때 흥은 하나의 심미체험으로 ‘더러운 것을 털어버리고[蕩滌鄙吝], 감동하여 마음이 트이는[感發融通]’ 것을 말한다. 조선 시가의 특질은 이 심미체험을 자연을 통해서 이룩하는 데 있었고 또 시가의 가창 자체가 학문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김태환, 「율곡 「고산구곡가」의 자연과 풍류」, 『율곡시대의 미학』(신아출판사, 2003), 152-155쪽.】. 이러한 문학사의 현상이 주지하는 것은 강호가도(江湖歌道)다. 사대부들에게 우리말을 이용한 가창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말로 된 노래의 가창이 단순히 오락거리이기도 했지만 이황의 경우처럼 인격함양의 교육적인 것이기도 했고 그 자체가 학문을 이루는 요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말과 그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한글은 사대부들에게 학문을 하는 중요한 매체이기도 했다.
전통 시기 우리나라는 문·사·철의 제 영역에서 중국에 영향 받은 바가 컸다. 강호가도의 형성 역시 주자학에 영향 받은 바가 컸다. 그러나 조선의 사대부는 중국의 문화에 매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과 우리의 차이를 발견했고 나아가 우리 것을 발전시키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발전의 수단이 되고 촉진시킨 것은 바로 한글이었다. 조선의 사대부는 한글의 중요한 사용자였다.
IV. 맺음말
한글 사용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여성과 아동 그리고 하층민을 한글의 주요 사용자로 보고 있다. 이는 현재 남겨진 자료의 대부분이 아녀자와 하층민을 위해, 혹은 그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에서 타당하다. 이 글에서는 기존 연구에서 소략하게 다루었던 한글 사용 계층인 사대부를 한글의 중요 사용자로 지적하고 그들의 한글 사용 양상을 분석해보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우선 사대부는 번역서를 읽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사대부들이 주로 독서한 번역서는 『사서언해』와 『두시언해』이다. 이 둘은 표준해석을 확정하고 이 표준해석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당대의 학술역량을 결집하여 만든 책이다. 따라서 한문의 학습이 번역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한자의 음가를 표기하고 학습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한자의 음이 명확하게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한자의 음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글로 한자의 음을 표기한 운서가 개발되었고, 운서에 표기된 한자의 음가를 알기 위해서 사대부는 한글을 습득해야 했다. 또 국문시가를 창작하고 기록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우리말로 된 시가의 가창은 오락을 넘어서는 학문과 인격 수련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수양으로서의 시가 창작과 가창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한글 학습은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사대부들이 한글을 이용하여 그들의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아울러 그들의 세계관을 전파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여성, 아동, 하층민과 함께 한글의 주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사용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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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문 요 약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우선 사대부는 번역서를 읽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사대부들이 주로 독서한 번역서는 『사서언해』와 『두시언해』이다. 이 둘은 당대의 학술역량을 결집하여 해석 표준안을 마련하고자 번역된 것이다. 따라서 한문의 학습이 번역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한자의 음가를 표기하고 학습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조선시대에는 모든 한자의 음이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한자의 음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한글로 한자의 음을 표기한 운서가 개발되었다.
또 국문시가를 창작하고 기록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했다. 우리말로 된 시가의 가창은 오락을 넘어서는 학문과 인격 수련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졌다. 시가의 창작과 가창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한글 학습은 필요한 것이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사대부들이 한글을 이용해 그들의 세계를 구축해나 가고 아울러 그들의 세계관을 전파하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한글의 주체적이고도 적극적인 사용자였다.
투고일 2012. 11. 5. 수정일 2012. 11. 15. 게재 확정일 2012. 11. 20. 주제어(keyword) 한글 사용(Literal Life of using Hangeul), 언해(Eonhae: Old Korean-Translation), 시가 가창(Recitation of Korean Poetry)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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