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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왕망)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동양사, 자람 - 4장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국, 중화의 축: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왕망)

건방진방랑자 2021. 6. 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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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이렇듯 강력하고 대내외적으로 안정된 기틀을 갖추었다면 한 제국은 오랫동안 존속하고 발전해야 마땅할 것이다. 실상 한은 중국의 역대 통일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한 나라다. 그러나 한은 무제의 지배 시절이 전성기인 동시에 퇴조의 시작이었다. 막강한 제국이 왜 일찌감치 퇴조기에 접어들었을까?

 

초기의 권력기관은 앞에서 말한 3공 가운데 우두머리인 승상이 관할하는 승상부(丞相府)였다. 그러나 무제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인데다 대외 정복 사업이라는 국가의 생존이 달린 명제가 시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승상부는 위축되었고 모든 것이 황제의 전권에 맡겨졌다. 하지만 거대한 통일 제국을 황제 혼자서 일일이 관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제는 실무를 담당할 행정 기구를 측근에 두었는데, 이것이 내조(內朝)였다. 원래 내조는 한 초기에 어린 황제들이 연속 등장할 무렵에 중앙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만, 당시에는 실권이 별로 없었다가 무제 시절부터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조를 담당하는 인물들이 황제를 어떻게 내조(內助)’하는가에 있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나라가 커지고 할 일이 많아졌으므로 실무자급의 관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그래서 일찍이 무제는 인재가 부족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신하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이것이 훗날 과거제도로 발달한다). 아직 실무를 담당할 만한 직업 관료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니 내조가 그 일을 맡을 수밖에 없다. 내조는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고 시행하는 중요한 역할이므로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인물들로 채워야 한다. 황제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들이라면 가족이다. 그렇다면 황족일까? 아니다. 바로 외척이다. 천자는 세상에 단 한 명이기 때문에 직계가족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 소수의 황족을 제외하면 황제와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처가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내조는 주로 외척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무제처럼 명철한 판단력과 강력한 권위를 가진 군주라면 그것도 괜찮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우월한 유전자를 가졌다 해도 후대에도 걸출한 황제들이 계속 배출될 수 있을까? 이 우려는 금세 사실로 드러나고 만다. 무제 이후 권한이 커진 내조는 승상부를 누르고 최고의 권력기관이 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황제의 외척이라고 해서 꼭 현명하고 유능하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더구나 무제의 사후 한의 황제들은 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외척들의 입김이 더욱 거세다. 이리하여 내조 정치는 곧바로 외척 정치가 된다.

 

이러한 외척 정치는 마침내 제국의 숨통마저 끊어버린다. 우선 원제(元帝, 재위 기원전 48기원전 33) 이후부터는 왕씨 가문이 누대에 걸쳐 외척으로 실권을 잡는다. 급기야 그 집안의 왕망(王莽, 기원전 45~기원후 23)이라는 자는 어린 황제를 제멋대로 옹립하고 시스로 가황제(假皇帝)라고 자칭하기에 이른다. 8년에 가황제는 마침내 진황제가 된다. 왕망은 교활하게도 요순시대 선양의 형식을 빌려 어린 황제에게서 황위를 빼앗고, 국호마저 신()으로 바꾼다. 명칭 그대로 새 나라를 건국한 셈이다.

 

유씨 황실을 왕씨 황실로 바꾸자 이제 전국이 다시 빈 도화지가 된다. 여기에 왕망은 마음껏 그림을 그린다. ‘새 나라답게 신나게과감한 개혁 조치를 연달아 시행한 것이다. 화폐제도를 개선하는가 하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 그간 농민들을 괴롭혀온 대토지 독점을 막는다. 빈민 구제에 힘쓰고, 균수법과 평균법을 본받아 상공업 개혁도 실시한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에 치우친 것이었다. 더구나 그가 얼치기로 만든 새 왕조는 그의 부실한 개혁조차 지탱해줄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

 

외척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심지어 나라까지 빼앗는 것을 본 유씨 황실은 각지에서 반란이 속출한 데 힘입어 23년에 나라를 되찾았다. 다시 유씨가 황족이 되었고 왕망(王莽)이 통치한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지만,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한 제국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앞의 것을 전한, 뒤의 것을 후한이라 부른다(전한의 수도는 장안, 후한의 수도는 그 동쪽인 뤄양이었기 때문에 각각 서한과 동한이라고도 한다).

 

 

역사적인 역사서 사마천(왼쪽)은 한 무제의 미움을 사 거세의 형벌인 궁형을 당하는 치욕을 겪으면서도 20년에 걸쳐 고대 중국 최고의 역사서인 사기(史記)(오른쪽)를 완성했다. 사기는 본기(本紀), 세가(世家), 열전(列傳), (), ()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이후 기전체(紀傳體)라는 형식으로 정립되어 중국 공식 역사서의 편찬 방식이 된다(12세기에 간행된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기전체로 되어 있다). 삼황오제의 전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역사 등은 대부분 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인용

목차

한국사 / 서양사

죽 쒸서 개 준 통일

촌놈이 세운 대제국

한 무제의 두 번째 건국

흉노 정벌의 도미노

화려한 겉과 곪아가는 속

외척과 환괸의 악순환

또 다시 분열의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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