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녹
녹(綠)
풀 이름이다. 일명 왕추(王芻)라고도 한다.
녹거(鹿車)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실을 만한 작은 수레. 전하여 소박한 생활을 의미한다.
녹거귀(鹿車歸)
부부가 노력하며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포선(鮑宣)이 청빈(淸貧)을 숭상하자, 갓 결혼한 그의 처가 화려한 혼수품(婚需品)을 모두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남편과 함께 녹거(鹿車)를 끌며 향리로 돌아간 고사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열녀전(列女傳)」 포선처(鮑宣妻)
녹괴(綠槐)
‘푸른 홰나무’란 세 그루의 홰나무[三槐]로서, 재상[三公]의 지위를 말한다. 송(宋) 나라 병부시랑(兵部侍郞) 진국공(晉國公) 왕호(王祜)가 재상의 덕망이 있었으나 직언(直言)했던 까닭에 끝내 재상이 되지 못하자, 뜰에 세 그루의 홰나무를 심고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이 되는 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윽고 아들인 위국(魏國) 문정공(文正公) 왕단(王旦)이 재상이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고문진보(古文眞寶)』 후집(後集) 「삼괴당명(三槐堂銘)」
녹기(綠綺)
녹기금(綠綺琴)의 준말로, 한(漢) 나라 사마 상여(司馬相如)가 가지고 있었다는 거문고 이름이다. 『古琴疏』
녹기금(綠綺琴)
거문고 이름이다. 고금소(古琴疏)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옥여의부(玉如意賦)를 지으니, 양왕(梁王)이 기뻐하여 녹기금(綠綺琴)을 하사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재(張載)의 시에 “故人遺我綠綺琴”이라 하였다.
녹노(轆轤)
도공이 도자기의 둥근 모양을 낼 때 사용하는 회전판을 말한다.
녹녹(碌碌)
한(漢) 나라 소망지(蕭望之)가 왕중옹(王仲翁)과 함께 병길(丙吉)의 추천을 받고 당대의 실력자 곽광(霍光)을 만나러 갈 때, 곽광의 경비가 삼엄하여 면회인의 몸을 수색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는 홀로 돌아왔는데, 뒤에 고관이 된 왕중옹이 소망지를 보고서 “어찌 녹록하게 굴려고 하지 않고서 거꾸로 문지기 따위가 되었단 말인가[不肯碌碌 反抱關爲]”라고 하자, 소망지가 “각자 자기 신념대로 살 뿐이다[各從其志]”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소망지전(蕭望之傳)」
녹대(鹿臺)
①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축조한 대(臺)의 이름으로 전설에 의하면 폭이 사방 3리(里) 높이가 1000자(尺)에 달했다고 했다.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경내에 있었으며 주왕이 백성들에게 부세를 높여 징수하여 폭정을 행하여 이 녹대를 지어 놓고 상나라의 모든 재화들을 이곳에 보관하려고 하였다. 주 무왕(周武王)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녹대에 올라가 불길에 뛰어 들어 죽었다.
② 은(殷)의 주왕(紂王)이 재물과 보화를 쌓아놓았던 창고 이름이다. 『서경(書經)』 「무성(武成)」
녹도(籙圖)
미래(未來)의 일을 기록한 책인데, 진시황(秦始皇) 때의 방사인 노생(盧生)이 해중에 들어갔다 오면서 가지고 온 것인데, 그 내용은 바로 “진 나라를 망칠 자는 호이다[亡秦者胡也]”라는 것이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녹독장(碌碡場)
녹독(碌碡)은 밭을 평평하게 고를 때 사용하는 농기구로서 녹독장은 지평을 잡아놓은 마당을 말한다.
녹라월(綠蘿月)
푸른 등라(藤蘿) 사이로 비추는 달빛을 이른다.
녹로(鹿盧)
우물 정자(井字) 형태의 문 고리 모양을 말한다.
녹록(漉漉)
땀 따위가 줄줄 흐르는 모양을 이른다.
녹료(綠醪)
푸른빛이 감도는 명주(名酒)를 가리킨다.
녹린(綠鱗)고기 비늘처럼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을 형용하는 시어(詩語)이다.
녹림(綠林)
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의 고사성어다. 전한(前漢) 말기에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하여 천자(天子)가 되고, 국호를 신(新)이라 고친 다음 모든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정책이 너무 급격하여 혼란만 빚었고, 백성은 극도의 생활고에 빠져 새 왕조를 원망하게 되었다. 왕광(王匡)·왕봉(王鳳) 일당이 이들 난민을 모아 녹림산(綠林山)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그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러자 관군에 쫓긴 마무(馬武)·왕상(王常)·성단(成丹) 등이 몰려와 함께 녹림산에 근거지를 차리고 마을을 공략하였는데, 이들의 세력이 몇 달 사이에 8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 후 이들은 형주자사(荊州刺使)가 이끈 관군 2만명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세력이 커져 5만명이 되었을 때 유수(劉秀:光武帝)와 유현(劉玄)이 군사를 일으키자 이들과 합류하여 왕망을 위협하는 큰 세력을 이루었다. 녹림은 원래 산 이름이지만, 왕광의 무리가 굶주린 백성을 모아 이곳을 근거지로 도둑질을 하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도둑의 소굴을 녹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녹림호객(綠林豪客)
도둑의 별명이다. 왕망(王莽) 때 신시(新市) 사람 왕광(王匡)·왕봉(王鳳) 등 무뢰배 수백 명이 산에 숨어 강도를 일삼기로 그들의 별명을 녹림(綠林)이라 붙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 「관내정사(關內程史)」 「호질(虎叱)」의 총평에서 “반란자들은 신시와 녹림의 사이일 뿐만 아니라 눈썹을 붉게 하거나 두건을 노랗게 한다거나 하는 것으로 다르게 했다[未必新市綠林之間, 赤其眉黃其巾以自異也].”라고 했다.
녹마불변(鹿馬不辨)
진(秦) 나라 승상(丞相) 조고(趙高)가 위세(威勢)를 제멋대로 부리기 위해, 짐짓 이세황제(二世皇帝)에게 말을 바치면서 사슴이라 일컫고, 여러 신하 중에서 사슴이 아니고 말이라고 말한 자는 모두 법으로 얽어 처벌하였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녹마전대(鹿馬專對)
사신으로 외국에 가서 무함당한 진상을 밝혀 흑백을 가려내는 출중한 능력을 말한다. 녹마(鹿馬)는 진(秦) 나라 2세 황제 호해(胡亥)에게 조고(趙高)가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했던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를 가리킨다. 전대(專對)는 사신이 능수능란하게 응대하며 왕명(王命)을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녹명(鹿鳴)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천자가 군신과 빈객(賓客)을 접대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이는 선왕(先王)이 예의로 신하를 부린 것을 찬미한 것이다.
녹명시(鹿鳴詩)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임금이 군신(群臣)과 가빈(嘉賓)을 연향(燕饗)할 때 부르던 시이다.
녹명연(鹿鳴筵)
신하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라는 뜻이다. 「녹명(鹿鳴)」은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신하나 빈객을 접대할 때 부르는 노래이다. 이는 선왕(先王)이 예의로 신하를 부린 것을 찬미한 것이다.
녹명연(鹿鳴宴)
① 향시(鄕試) 창방(唱榜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 뒤에 지방관이 시관(試官)과 급제자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녹명(鹿鳴)의 시를 노래 부르게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녹명연(鹿鳴宴)이라 하였다 한다.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이다. 『당서(唐書)』 選擧志上·『수원수필(隨園隨筆)』 科第類 鹿鳴宴
② 당대(唐代)에 주현(州縣)에서 천거되어 경사(京師)에 모인 선비들을 위로하던 연회. 『시경(詩經)』의 녹명편(鹿鳴篇)을 부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녹명편은, 사슴이 울면서 먹이를 함께 먹는 것을 군신간(君臣間)의 정리에 비겨 노래한 것이다.
녹명편(鹿鳴篇)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이다. 훌륭한 손님을 맞아 흥겨운 잔치를 벌인 자리에서 부르는 노래로, 도를 강론하고 덕을 닦는 취지라고 한다.
녹문(鹿門)
①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식을 데리고 녹문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후대에는 이로 인해서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하게 되었다.
② 후한(後漢)의 은자(隱者)로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던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그는 한 번도 도회지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채,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다 생을 마쳤다. 『상우록(尙友錄)』 1
녹문경(鹿門耕)
한(漢)나라 말기의 방덕공(龐德公)과 당(唐)의 맹호연(孟浩然)을 이른다. 녹문산(鹿門山)은 중국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인데, 한의 방덕공이 그 산에 들어가 약을 캐면서 돌아오지 않았고, 당의 맹호연도 그 산에 가서 숨어 살았다.
녹문계(鹿門計)
세파(世波)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온전한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방덕공(龐德公)이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의 간곡한 요청도 뿌리치고서, 처자를 데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卷83 「은일열전(逸民列傳)」 방공전(龐公傳)
녹문기(鹿門期)
은거한다는 뜻이다. 녹문은 호북성(湖北省)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식을 데리고 녹문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후대에는 이를 인해서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하게 되었다.
녹문방(鹿門龐)
방공(龐公)은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로 현산(峴山)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일찍이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그를 찾아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듣지 않았고, 뒤에는 마침내 처자(妻子)를 다 거느리고 녹문산으로 들어가 약(藥)을 캐면서 끝내 나오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三
녹문산(鹿門山)
중국 호북(湖北) 양양현(襄陽縣)에 있는 산인데, 한말(漢末)에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에 올라가 약을 캐며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상우록(尙友錄)』 卷一 당 나라 맹호연(孟浩然)이 또 그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은거지의 대명사로 쓰인다.
녹문옹(鹿門翁)
후한(後漢) 때의 은사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킨다. 그는 도량이 넓고 물욕이 없어, 당초부터 처자와 함께 농사를 짓고 살다가, 뒤에는 유표(劉表)의 간절한 요청에도 끝내 응하지 않고서 끝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을 캐며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三
녹문은(鹿門隱)
후한(後漢)의 방덕공(龐德公)이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처자식과 함께 녹문산(鹿門山)으로 들어가 약초나 캐면서 영원히 세속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상우록(尙友錄)』『상우록(尙友錄)』 卷一
녹미(鹿尾)
불자(佛子)라고도 하고 총채라고도 하는데, 사슴의 꼬리로 묶어서 만든 것을 말한다. 불도(佛道)를 뜻하기도 한다.
녹보(祿父)
상(商) 나라 무경(武庚)의 이름이다. 『회남자(淮南子)』 「요략(要略)」에 “輔公子祿父”라 하였는데, 그 주에, ‘祿父 紂之兄子 周封之以爲殷後 使管蔡監之’라고 하였다.
녹사(錄事)
술을 권하는 일을 맡은 기녀(妓女)를 가리킨다.
녹사불택음(鹿死不擇音)
사슴은 소리를 아름답게 내지만, 죽을 때를 당하면 아름다운 소리를 가려서 낼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위급한 지경을 당했을 때는 나쁜 소리 즉, 좋지 않은 말이 나오게 마련이란 의미이다.
녹석(綠石)
벼루 이름인데, 이 벼루에는 바람 물결 모양의 결이 있다고 한다.
녹수(淥水)
악부(樂府) 금곡(琴曲)의 가사 이름이다.
녹수(淥水)
압록강(鴨綠江)의 다른 이름이다.
녹수홍련(綠水紅蓮)
남조(南朝) 제(齊) 고제(高帝) 때에 위장군(衛將軍) 왕검(王儉)의 막하(幕下)에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사람들이 연화지(蓮花池)라고 불렀는데, 당시 문명(文名)을 떨치던 유고지(庾杲之)가 다시 막료로 들어가자 소면(蕭緬)이 “녹수에 떠다니며 홍련에 기대었구나[泛綠水 依芙蓉]”라고 찬미했던 고사가 전한다. 『남제서(南齊書)』 「유고지전(庾杲之傳)」
녹시(綠葹)
도꼬마리로 창이자(蒼耳子)ㆍ권이(卷耳)ㆍ시이(葈耳)ㆍ양부래(羊負來)라고도 쓰인다. 엉거시과에 속하는 일년초로 들이나 길가에서 자생한다. 가을에 조그만 열매를 맺히는데 가시가 돋쳐 사람의 옷에 잘 붙는다. 봄에 연한 싹은 캐먹으며, 열매는 약재로 쓰여 주로 순환계·신경계·이비인후과 질환을 다스리며, 특히 통증과 옴에 효험이 있다. / 인용: 道康瞽家婦詞(정약용)
녹시(鹿豕)
사슴과 멧돼지. 곧 산속의 짐승을 말한다.
녹시공시형(鹿豕共柴荊)
깊은 산골의 생활을 표현한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上에 “순(舜) 임금이 깊은 산골에 살 때에는 나무나 돌과 함께 살고 사슴이며 멧돼지와 노닐었나니, 그때에는 산골의 야인(野人)과 다른 점을 찾기가 힘들었다[舜之居深山之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라는 말이 나온다.
녹야(綠野)
① 당(唐) 나라 때 배도(裵度)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별장 녹야당(綠野堂)의 준말로, 곧 은거를 지칭하는 말이다. 『구당서(舊唐書)』 卷一百七十 「배도전(裵度傳)」
②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裵度)의 당호(堂號)이다. 배도는 오교(午橋)에 다가 별장을 지었는데, 수목(樹木)이 우거지고 온갖 화초(花草)가 심어져 있었다. 『구당서(舊唐書)』 「배도전(裵度傳)」
③ 은퇴한 재상의 별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가 만년에 환관이 발호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 은퇴한 뒤 녹야당(綠野堂)이라는 별장을 짓고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과 풍류를 즐겼던 고사가 전한다. 『신당서(新唐書)』 「배도전(裵度傳)」
녹야당(綠野堂)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裵度)가 오교(午橋)에 건축한 별장 이름이다. 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 등과 시주(詩酒)를 즐겼던 고사가 있다. 『신당서(新唐書)』 「배도전(裵度傳)」
녹야별업(綠野別業)
만년에 은퇴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생활을 즐긴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재상 배도(裵度)가 환관이 득세하는 조정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벼슬을 그만두고 나서 녹야당(綠野堂)이라는 별장을 지어 놓고는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시주(詩酒)를 나누며 노닐었던 고사가 있다. 『신당서(新唐書)』 「배도전(裵度傳)」
녹야원(鹿野苑)
불가의 말로 석가세존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곳이라고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二十三
녹야장(綠野庄)
당 나라 배도(裴度)가 재상을 그만두고 유우석(劉禹錫)·백거이(白居易) 등 문인들과 시주(詩酒)의 모임을 즐겼던 별장 이름으로, 하남(河南)의 낙양에 옛터가 있다 한다.
녹양방초(綠楊芳草)
푸른 버들과 아름다운 풀을 이르는 말이다.
녹엽성음(綠葉成陰)
초록빛 잎이 그늘을 만든다는 말로, 여자가 결혼하여 자녀가 많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당나라 때 시인 두목(杜牧)이 호주(湖州)를 유람하다가 어떤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당시 열 살 남짓한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가고 있었다. 그 딸은 두목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얼굴이었다. 호탕한 성격의 두목은 자신도 모르게 그 딸에게 마음이 끌려 여인에게 말했다. “십 년 뒤 이 아이를 제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만일 십 년이 지나도 제가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십시오.” 그 여인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두목이 호주를 다시 찾은 것은 약속한 십 년보다 4년이나 지난 뒤였다.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해 보니 이미 3년 전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 자식들을 두고 있었다. 두목은 실망했고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로부터 봄을 찾았으나 좀 늦게 갔기에, 꽃다운 날 원망하여 슬퍼할 수도 없구나. 거센 바람이 진홍색 꽃을 다 떨어뜨리고, 푸른 잎이 그늘을 만들어 열매만 가득하네[自是尋春去較遲, 不須惆愴怨芳時, 狂風落盡深紅色, 綠葉成陰子滿枝]” 『당시기사(唐詩紀事)』 두목(杜牧)
녹옥수(綠玉樹)
천제(天帝)가 사는 곳에 생장한다는 나무의 이름이다.
녹옥장(綠玉杖)
녹옥지(綠玉枝)를 가리킨 것으로 지팡이를 말한다.
녹요(綠腰)
당(唐) 나라 곡조 이름이다.
녹운의(綠雲衣)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입는 녹포(綠袍)를 이르는데, 「비파기(琵琶記)」에 “상아가 녹운의를 만들어 놓으니, 달 속의 계수나무 첫째 가지를 꺾었네[嫦娥剪就綠雲衣 折得蟾宮第一枝]”라 하였다.
녹원(鹿園)
녹야원(鹿野苑). 불가의 말로 석가세존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곳이라고 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二十三
녹위이추(鹿危而趨)
사슴이 위급하면 험한 데를 가리지 않고 달린다는 말이 춘추 『좌전(左傳)』에 있는데, 여기에서 진(秦) 나라의 사슴이란 고사(故事)까지를 겸하여 쓴 것이다. 그것은 진 나라 정승 조고(趙高)가 황제를 농락하기 위하여 사슴을 몰고 앞에 가서 말이라 하니, 다른 신하들이 조고를 겁내어 감히 사슴이란 말을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사슴을 놓쳤으매 영웅들이 다투어 쫓아서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는다고 말한 이가 있었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녹음방초 승화시(綠陰芳草 勝花時)
신록이 우거진 초여름. 녹음이 봄의 꽃보다 좋은 시절을 이른다.
녹음방초(綠陰芳草)푸른 나무 그늘과 향기로운 풀. 우거진 나무 그늘과 싱그러운 풀. 곧, 여름의 자연 경치. 여름철의 정경을 이른다.
녹의(綠蟻)
술을 말한다.
녹의(綠衣)
하인들이 입는 옷으로, 전하여 하인을 가리킨다.
녹의사자(綠衣使者)
푸른 옷을 입은 사자라는 말로, 앵무새의 다른 명칭을 일컫는 고사성어다. 유사(遺事)에 “장안(長安)의 부민(富民) 양숭의(楊崇義)의 아내 유씨(劉氏)가 이웃 사람 이감(李弇)과 간통하면서 함께 숭의를 살해했다. 그 집에 있는 앵무새가 ‘범인은 이감이다.’라 하여 모든 사실이 드러나게 되자 명황이 듣고 그 앵무새를 녹의사자로 봉(封)했다.”라고 하였다.
녹의홍상(綠衣紅裳)
연두 저고리에 다홍 치마. 곧, 젊은 여자의 곱게 치장(治粧)한 복색(服色)을 이른다.
녹이(騄駬)
녹이(綠耳)와 같은 말로, 귀가 푸른 천리마를 말한다. 주목왕(周穆王)의 팔준마(八駿馬)의 하나이다. 뛰어난 인재를 비유한 것이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
녹이상제(綠駬霜蹄)
중국 주나라 목왕이 천하를 주유할 때 탔던 준마(綠駬)와 굽에 흰 털이 난 좋은 말[霜蹄]을 말한다. 훌륭한 말의 비유이다.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
녹장(綠章)
녹색의 종이에 글을 써서 아뢰는 것으로 도사(道士)가 천신(天神)에게 표(表)를 올릴 때 쓰는 것이다. 육유의 「화시편유제가원(花時遍遊諸家園)」에 “綠章夜奏通明殿 允借春陰護海棠”의 글귀가 있다.
녹주(綠珠)
진(晉) 나라 석숭(石崇)의 애첩(愛妾) 이름이다. 그녀는 무척 아름답고 고운데다 피리를 잘 불었는데, 그를 탐내 손수(孫秀)가 석숭에게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석숭이 들어주지 않으므로, 손수가 거짓으로 조서(詔書)를 꾸며 석숭을 수감하려 하자, 녹주가 금곡원(金谷園) 별관(別館)에 있다가 슬피 울며 누(樓) 아래로 떨어져 자살하였다. 『진서(晉書)』 「석숭전(石崇傳)」
녹주건(漉酒巾)
두건(頭巾)으로 술을 거른다는 뜻으로, 도잠(陶潛)이 술을 무척 좋아하여 매양 술이 익으면 머리에 쓴 갈건(葛巾)을 벗어서 술을 걸러 마시고 다시 쓰곤 했다는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도잠전(陶潛傳)」
녹주옹(漉酒翁)
술 거르는 늙은이라는 뜻으로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도연명이 술이 익으면 갈건(葛巾)으로 술을 걸러낸 다음 다시 머리에 썼다고 한다. 『남사(南史)』 「은일전(隱逸傳)」 上 도잠(陶潛)
녹주원(綠珠冤)
석숭(石崇)에게 녹주(綠珠)라는 예쁜 첩이 있었는데, 손수(孫琇)가 그녀를 달라고 하였으나 주지 않았다. 석숭이 그 때문에 죄를 얻어 잡히자 녹주는 누(樓)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진서(晉書)』 卷三十三 「석숭전(石崇傳)」
녹준경북해(綠樽傾北海)
주인이 손님을 좋아하여 잘 대접한다는 비유이다. 『후한서(後漢書)』 「공융전(孔融傳)」에 “그가 북해상(北海相)에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되었을 적에 선비를 좋아하여 손님들이 날마다 집 안에 가득하였다. 그는 언제나 한탄하기를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동이에는 술이 떨어지지 않으니 아무 걱정이 없다.’라 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녹창(綠槍)
푸른창은 푸른 물감을 바른 창으로 무기를 말한다.
녹천서(綠天書)
녹천(綠天)은 파초잎을 이른다. 청이록(淸異錄)에 “당승(唐僧) 회소(懷素)가 영릉(零陵) 동교(東郊)에 살면서 파초를 심어 수만 본이 어우러졌는데 그 잎을 따서 종이 대신 글씨를 쓰며 소거(所居)를 이름하여 녹천암(綠天庵)이라 했다.”라 하였다.
녹태책(鹿貽幘)
은자(隱者)가 쓰는 녹비(鹿皮)로 만든 건(巾)이다.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하여 옛 친구인 하점(何點)에게 녹비건을 하사하며 불렀다 한다. 『양서(梁書)』 「하점전(何點傳)」
녹평(鹿苹)
『시경(詩經)』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평화롭게 우는 저 사슴 들판에서 쑥을 뜯누나. 우리 집에 반가운 손들이 모여 비파 타고 피리도 부노라[呦呦鹿鳴 食野之苹 我有嘉賓 鼓瑟吹笙]”라고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임금이 어진 신하들을 불러 잔치하면서 군신간의 정을 두터이 함을 노래한 것이다.
녹포(綠蒲)
단오절(端午節)을 말한다. 이날 창포(菖蒲)를 문에 꽂아 재액(災厄)을 방지하는 풍습이 있던 데에서 나온 말이다.
녹피관(鹿皮冠)
은사(隱士)의 관이다. 하상지(何尙之)가 집에 있을 적에는 늘 이 관만을 썼는데 벼슬길에 나아간 뒤 어느 날 천자가 거둥하고 백관이 시위한 자리에서 심경지(沈慶之)가 “오늘은 왜 녹피관을 쓰지 않았는가.”라고 농하였다. 『남사(南史)』 「하상지전(何尙之傳)」
녹피옹(鹿皮翁)
한(漢) 나라 때 치천(淄川) 사람으로 녹피공(鹿皮公)이라고도 하는데 기계를 잘 만들었다 한다. 젊었을 때 지방 관청의 말단 관리로 있다가 잠산(岑山) 위에 있는 신천(神泉)에 수레와 잔도(棧道)를 만들어 올라가서 샘 곁에다 집을 짓고 사슴갖옷을 입고서 지초(芝楚)를 캐먹고 신천을 마시며 70여 년을 살았다 한다. 『열선전(列仙傳)』 「녹피공(鹿皮公)」
녹학(祿鶴)
학(鶴)에게 녹위(祿位)를 준다는 뜻이다. 춘추시대 위 의공(衛懿公)이 학을 매우 좋아하여 대부(大夫)가 타는 수레에 태우기까지 하였는데, 그가 전쟁을 하려 할 적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학을 시켜 전쟁하게 하라. 학은 실지로 녹위(祿位)가 있지만 내야 어떻게 싸우겠는가.” 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 閔公2年
녹황(鹿隍)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에 “정(鄭) 나라 사람이 땔나무를 하다가, 갑자기 쫓겨오는 사슴을 때려잡아 섶나무로 덮어놓고는 이내 그곳을 잊어버렸다. 혹시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 일을 혼자 중얼거렸는데 옆에서 한 사람이 듣고는 몰래 그 사슴을 찾아가 버렸다고 하였다.
녹효(綠驍)
강원도(江原道) 홍천(洪川)의 고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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