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시가지를 배회하고 여항閭巷의 좁은 골목을 바장이다가 마침내 항주杭州 1에서 온 세 명의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
이 단락은 홍대용이 작은 아버지 홍억의 수행원으로 북경에 갔다가 그곳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세 선비를 만나 한 달 가까이 사귀며 학문적 토론과 인간적 친교를 나눈 일을 말하고 있다.
“시가지(街市)” 운운했는데, 바로 ‘유리창’을 가리킨다. 지금도 북경에는 유리창이 남아 있어 그곳에 쭉 들어서 있는 점포들이 미술품과 골동품, 서적 등을 판매하고 있지만, 당시의 유리창은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유리창은 자금성紫禁城 가까이에 있었고 게다가 그 인근에 조선 사신들이 묵던 조선관朝鮮館이 있었기에 당시 사행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간 문인들은 유리창을 찾아가 견문을 넓히거나 서적과 서화, 문방구 등을 구입해오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북경에 올라온 중국의 지방 유생들이 유리창에 있는 여관에 묵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혹 이들과 접촉해 학문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해서 유리창을 찾는 조선 지식인들도 없지 않았다. 홍대용 역시 그런 기대를 갖고 유리창을 찾았던 것이다.
“시가지를 배회하고 여항의 좁은 골목을 바장이다가 마침내 항주에서 온 세 명의 선비를 만나게 되었다(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라는 문장은 그 점을 말하고 있다. “항주에서 온 세 명의 선비”란 엄성ㆍ반정균ㆍ육비를 말한다. 당시 엄성은 35세, 반정균은 25세, 육비는 48세였다. 이 셋은 모두 과거를 보기 위해 항주에서 올라와 유리창 일대의 간정동乾淨衕이라는 곳에 있는 여관에 묵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항주’라는 곳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학술사 내지 예술사에서 항주는 독특한 지위를 점하는 곳이다. 그곳은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학문과 예술의 요람이었다. 항주는 그 인근의 소주蘇州와 함께 이른바 ‘강남江南’으로 일컬어지면서 중국 사대부 문화의 기지基地를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남송대南宋代 이래 강남은 중국 문화를 견인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문인화文人畵 양식이란 것도 명대明代에 바로 이 강남에서 개화한 것이며, 강남이 그 본거지였다. 더군다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만주족이 세운 나라라고 업신여겼기 때문에 한족漢族이 이룩한 중화 문명의 거점으로서 강남을 주목하거나 동경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에게 있어 강남은 지리적 공간을 넘어 가치문제가 개입된 하나의 이념적 공간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항주 선비를 만난 홍대용의 설렘과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터이다.
▲ 전문
인용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12. 총평
- 항주杭州: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지명으로, 송대宋代 이래 사대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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