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홍대용과 연암이 북학(=중국 배우기)을 제창했다고는 하나 이런 현상(慕華思想)을 희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청나라에 대한 경계심은 경계심대로 지닌 채, 헛된 명분론을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배움으로써 조선인민의 생활을 향상시키고 조선의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들의 청나라에 대한 태도는 ‘양가적兩價的’이다. 한편으로는 청나라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청나라를 학습하자는 것, 이것이 그들의 기본 구상이었다.
이 구상은 어찌 보면 모순 같기도 하나, 바로 이 모순에서 조선적 주체성이 발아發芽할 ‘틈’이 생겨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본다면 홍대용과 연암의 입점立點은 아주 묘하고 아슬아슬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전의(그리고 동시대의) 경직된 의리론과 대립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곧 도래할 청 추수주의追隨主義와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홍대용과 연암의 사유에서는 팽팽한 지적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 지적 긴장감은 조선적 주체성에 대한 암중모색과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홍대용과 연암의 경우 북학의 제창이 곧 청에의 귀복歸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학파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북학파 내부에도 차이가 있다. 가령 박제가의 경우 청에 대한 학습만 있지 청에 대한 경계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그의 『북학의』는, 비록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 조선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는 높이 살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북학론’을 단순화한 혐의가 없지 않다. 이처럼 박제가-추사-이상적으로 넘어가면서 학청學淸만 남고, 청에 대한 대타의식對他意識은 슬그머니 소멸되어 버린다.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다. 하지만, 홍대용이 열어 놓은 중국인과의 교유가 갖는 의미를 논하면서 그 후대적 변전變轉 양상에 대하여도 조금 언급해두는 것이 독자들이 이 시기의 상황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연암의 글을 읽자는 것이 연암의 글만 읽자는 것이 아니요, 연암 당대의 이런저런 문제, 그리고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까지도 더러 읽으면서, 곁들여 드문드문 나의 소회所懷까지 말하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 나의 글쓰기 책략이요 목적이니, 어쩌겠는가.
▲ 전문
인용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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