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홍대용은 이들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가 학문, 사상, 역사, 문학, 예술 등의 온갖 주제를 대상으로 진지하고 열띤 토론을 했으며, 찾아가지 아니한 날은 편지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들은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공동 문자라 할 한문에 의한 필담筆談을 통해 깊은 속내까지 서로 주고받을 수 있었다. 당시 홍대용은 필담이 적힌 종이들의 일부를 둘둘 말아 가지고 숙소로 돌아왔으며, 귀국한 후 이를 바탕으로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원래 제목이 『간정동 회우록』이며, 일명 ‘간정동 필담’이라고도 했다.
담헌 홍대용의 글들은 일제 강점기에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에 의해 수습되어 『담헌서湛軒書』라는 제목의 책으로 간행되기에 이른다. 이 『담헌서湛軒書』 속에 『간정동 필담』이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중국의 세 선비는 양명학과 불교를 넘나들면서 비교적 활달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유학을 논하고 있는 데 반해, 홍대용은 엄정한 자세로 양명학을 비판하고 주자학을 옹호하고 있다. 특히 첫날의 만남에서 홍대용과 중국 선비들은 그 사상적 풍모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조선의 어떤 개인과 중국의 어떤 개인의 차이라기보다 이념적이고 교조적이며 편협한 면모가 강했던 조선 사대부의 성격적 특질과 비교적 유연하고 회통적會通的이며 실제적인 면모가 강했던 중국 사대부의 성격적 특질의 맞부딪침으로 이해되어야 옳다. 항주의 세 선비에게 주자朱子는 일개 사상가에 불과했으며, 조선 사대부들이 우러러 떠받드는 것과 같은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아마 홍대용은 이들의 이런 태도와 말투를 처음 대했을 때 내심 몹시 당혹스러워하며 충격에 휩싸였을 터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홍대용의 태도는 달라져 간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홍대용은 자신이 견지했던 사상과 이념적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 것 같으며, 항주 선비들의 사상적 활달함에 호감을 갖게 되면서 양명학은 물론이려니와 불교 등 다른 이단 사상에 대하여 이전에 비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런 미묘한 변화가 『간정동 필담』을 읽어보면 감지된다.
홍대용은 귀국 후 십 수 년에 걸쳐 이들 중국인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속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인격적 교유를 나눈다. 그들은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학문과 인격을 닦아 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격의 없으면서도 절절한 어조로 서신을 통해 의견을 나누며, 격려와 충고를 했다. 그것은 명예와 이해관계와 국경을 초월한, 그리고 상호이해와 겸손함 위에 펼쳐진,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달리 유례를 찾기 어려운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엄성은 훗날 병으로 위독할 때 홍대용이 선물로 보내 준 조선산 먹을 꺼내어 그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 먹을 관에다 넣어주었다고 한다. 이 일은 연암이 쓴 「홍덕보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다.
▲ 전문
인용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12. 총평
- 육왕학陸王學: 송나라 육구연陸九淵(1139~1192)과 명나라 왕수인王守仁(1472~1528)의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홍대용과 항주 선비들이 북경에서 주고받은 필담 및 서신에는 이 두 인물의 사상에 대한 토론이 자주 보인다. 주자와 육구연은 송대 유학의 중요한 두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주자학자들은 육구연이 학문 연구를 경시하고 마음의 수양만 중시한 점을 들어 그를 이단시하면서 공격하였다. 왕양명은 처음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그것이 공소空疏하고 지나치게 번쇄하다는 점을 깨닫고는 마음공부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곧 양명학陽明學이다. 주자학에서는 ‘물物’을 객관적 실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이理’를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한편 ‘심心’에는 하늘의 ‘이’가 품부되어 있는바 이것이 곧 ‘성性’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물物’이란 ‘심’의 자기 확대에 불과하며, ‘심’ 자체가 곧 ‘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마음과 사물에서 부단히 ‘이’를 궁구해가는 일이 요구되는 반면, 양명학에서는 간단히 ‘심’만 닦으면 된다. 전자가 객관유심론이라면, 후자는 주관유심론이다. 이 점에서 양명학은 선학禪學과 친연성이 있다. 조선과 달리 명나라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성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청초淸初까지 이어졌다. 더군다나 항주는 왕수인의 고향인 여요餘姚 인근으로 특히나 양명학이 강세를 보이던 곳이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다. 일찍이 퇴계가 양명학을 이단이라 비판한 이래 조선에서 양명학은 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는 하나 17세기 이후 소론少論 가문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그 학맥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조선의 학문 풍토에서는 설사 자신이 양명학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대놓고 표방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주자학의 외피外皮로 자신의 사상을 은폐하였다. 그만큼 조선은 주자학의 자장磁場이 강했으며, 주자학 일변도였다.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과는 달리 조선은 사상적 융통성을 갖지 못했으며, 아주 경직되고 편협하며 대단히 배타적인 방향으로 하나의 사상을 절대화해갔다. 이는 조선 사대부의 고루함 내지는 이념적 편협성과 관련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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