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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 12. 총평 본문

책/한문(漢文)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 12. 총평

건방진방랑자 2020. 4. 15.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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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총평

 

 

1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학자漢學者 김택영은 이 글에 대해 솜씨가 걸출하며” “호방하며 깨끗함이 마치 태사공(사마천)의 글 같다고 평한바 있다.

 

 

2.

이 글은 문예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사적 견지에서도 중요한 글이다. 북학이 고고지성呱呱之聲을 지르며 탄생하는 역사적 현장을 보여주고 있음으로써다.

 

 

3

17세기 이래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른바 단안單眼으로 청나라를 봤다면, 이 글에서 확인되는 홍대용의(그리고 박지원의) 청을 보는 눈은 이른바 복안複眼이라 할 만하다. 놀랍게도 만주족 지배층과 한족 인민, 외관상의 변화와 본질적 연속성, 명분과 현실 등을 구분해 파악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

중국인 벗들과의 친분을 무조건 동아시아적(혹은 국제적) 연대라고만 말할 것은 아니다. 공허한 수사修辭에 앞서 그러한 친분의 내적 구조와 현실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특히 조선적 주체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5

연암은 이 글에서 조선 사대부들이 당파와 신분에 구애되어 진정한 우도友道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암 자신은 어땠는가? 연암의 절친한 벗 가운데에는 노론이 아닌 사람이 꽤 있다. 정철조는 소북小北이었으며, 서얼인 박제가ㆍ유금ㆍ유득공도 소북이었다. 또 소론인 서유린ㆍ서유방 형제와도 가깝게 지냈다. 이 집안의 서유구는 어린 시절 연암의 지도를 받았다. 한편, 연암은 서얼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었고 이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연암은 비교적 지체와 당색을 가리지 않고 취향과 뜻이 맞으면 벗으로 사귄 듯하다.

그렇기는 하나 연암이 당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남인과의 교류는 보이지 않는다. 연암은 이익李瀷, 이용휴李用休, 이가환李家煥(1742~1801), 정약용과 같은 빼어난 남인 계열 문인ㆍ학자들의 소식을 당연히 듣고 있었을 터이다. 이들은 모두 연암과 동시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연암의 글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일체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 시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일이니만큼 연암이 보여주는 이런 한계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연암은 자기 시대 사대부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히 지적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문제점을 넘어서려고 노력했긴 하나, 시대의 제약 때문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3. 연암이 홍군이라 호칭하는 이유

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6. 중국인과의 교류로 우리 홍대용이 달라졌어요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10.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으로 비난받다

11. 홍대용의 필담으로 벗 사귀는 도를 깨닫다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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