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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본문

책/한문(漢文)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에 써 준 서문 -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건방진방랑자 2020. 4. 1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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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도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홍대용의 경우 중국인들과의 교유는 명예나 이익 따위를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그것은 인격을 담보한 퍽 순수한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박제가 등에 이르면 사정이 좀 달라지는 듯하다. 즉 박제가의 경우 중국인과의 교유는 단지 순수한 동기에서만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중국인과의 교유를 통해서 얻게 되는 명예나 이익에 대한 고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없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박제가는 이른바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아주 강했던 인물이었던 만큼 중국 문인이나 지식인과의 친교는 그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었으리라 짐작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의 친교는 박제가의 국내에서의 문화적 위상을 높여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가령 그가 양주 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으로서 당대 중국의 저명한 화가였던 나빙羅聘과 접촉한 사실이나 그의 그림을 소장한 사실은 국내 문사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족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박제가로 하여금 묘한 자의식을 갖게 만들고, 우월감이랄까 으스대는 마음이랄까 이런 기분을 다소간 갖게 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이처럼 박제가에게서 중국인과의 교류(편지를 주고받는 일까지 포함해)는 그 자체가 바로 명예였으며, 현실에 작동하는 하나의 문화적 힘이 되고 있었다. 요컨대 저명한 중국인을 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는 크든 작든 하나의 문화 권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한국도 당시와 뭐 그리 크게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을까? 가령 내가 미국이나 유럽의 저명한 인물 누구와 안다거나 누구와 개인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다시 보지 않을까?

그런데 홍대용이나 연암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박제가에게서 이런 미묘한 변화가 야기되었을까? 이는 신분 문제와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조선은 서얼을 반쪽 양반으로 취급하면서 사회적ㆍ정치적 자기실현의 길을 막아놓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적 모순 때문에 조선 사회 내에서 서얼들은 자기 비하와 콤플렉스와 불만을 안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공간에선 서얼이나 중인에 대한 차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인과의 교유(그리고 중국인들로부터의 높은 평가)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콤플렉스를 보상하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 있었다.

박제가와 마찬가지로 이상적의 경우도 역관이라는 그 신분과 관련해 중국에의 경도傾倒가 설명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추사의 경우는 이렇게 설명될 수 없다. 추사는 명문가 출신이니 신분적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추사의 경우, 조선의 지적ㆍ사상적 현실의 변화와 관련해 설명되어야 할 터이다. 즉 추사의 시대에 오면 이제 청나라는 더 이상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전의 선배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나로 치부하는 관념은 아주 희박해졌거나 소거消去되어 있었다. 청나라를 오랑캐의 나라라고 시비 거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청나라는 금석학과 고증학과 문학과 예술의 선진국으로서 조선 사대부들이 배우고 따라야 할 전범典範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존명배청尊明排淸이라는 헛된 명분론으로부터는 벗어났다고 할지 모르나, 조선적 주체성은 그만큼 휘발되거나 약화되어 버렸다는 점,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긴장된 인식이 소거되어 버렸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3. 연암이 홍군이라 호칭하는 이유

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6. 중국인과의 교류로 우리 홍대용이 달라졌어요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10.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으로 비난받다

11. 홍대용의 필담으로 벗 사귀는 도를 깨닫다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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