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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 회우록서(會友錄序) 본문

산문놀이터/조선

박지원 - 회우록서(會友錄序)

건방진방랑자 2021. 11. 14. 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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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벗을 사귀었던 세 친구의 이야기

회우록서(會友錄序)

 

박지원(朴趾源)

 

 

조선의 지형과 학문적 풍토의 편협함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與天無極, 而名山巨嶽, 根盤其中,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其爲地也亦已狹矣.

非古之所謂而議論之家四焉, 非古之所謂士農工商而名分之家四焉. 是惟所賢者不同耳, 議論之互激而異於秦越; 是惟所處者有差耳, 名分之較畫而嚴於華夷, 嫌於形跡 則相聞而不相知, 拘於等威, 則相交而不敢友.

其里閈同也, 族類同也, 言語衣冠其與我異者幾希矣, 旣不相知, 相與爲婚姻乎? 不敢友焉, 相與爲謀道乎?

是數家者, 漠然數百年之間秦越華夷焉, 比屋連墻而居矣, 其俗又何其隘也.

 

연행길에서 만난 3명의 중국 친구들

洪君德保, 嘗一朝踔一騎, 從使者而至中國,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於是間步旅邸, 歡然如舊.

極論天人性命之源, 朱陸道術之辨, 進退消長之機, 出處榮辱之分, 攷據證定, 靡不契合. 而其相與規告箴導之言, 皆出於至誠惻怛, 始許以知己, 終結爲兄弟. 其相慕悅也如嗜欲, 其相無負也若詛盟, 其義有足以感泣人者

 

청나라라는 인식, 오랑캐라는 인식을 버렸기에 만날 수 있었다

嗟呼吾東之去幾萬里矣, 君之於三士也, 不可以復見矣.

然而向也居其國, 則同其里閈而不相知, 今也交之於萬里之遠; 向也居其國, 則同其族類而不相交, 今也友之於不可復見之人; 向也居其國, 則言語衣冠之與同而不相友也, 迺今猝然相許於殊音異服之俗者, 何也?

君愀然爲間曰: “吾非敢謂域中之無其人而不可與相友也, 誠局於地而拘於俗, 不能無鬱然於心矣. 吾豈不知中國之非古之諸夏, 其人之非先王之法服也. 雖然, 其人所處之地, 豈非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所履之土乎; 其人所交之士, 豈非齊蜀博見遠遊之士乎; 其人所讀之書, 豈非三代以來, 四海萬國極博之載籍. 制度雖變, 而道義不殊, 則所謂非古之諸夏者, 亦豈無爲之民而不爲之臣者乎? 然則彼三人者之視吾, 亦豈無華夷之別而形跡等威之嫌乎?

然而破去繁文, 滌除苛節, 披情露眞, 吐瀝肝膽, 其規模之廣大, 夫豈規規齷齪於聲名勢利之道者乎?”

 

관습,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벗을 사귄 홍대용

迺出其所與三士譚者, 彙爲三卷以示余曰: “子其序之.”

余旣讀畢, 而歎曰: “達矣哉, 君之爲友也! 吾乃今得友之道矣. 觀其所友, 觀其所爲友, 亦觀其所不友, 吾之所以友也.” 燕巖集卷之一

 

 

 

 

 

 

해석

 

조선의 지형과 학문적 풍토의 편협함

 

遊乎三韓三十六都之地, 東臨滄海,

삼한 36유득공(柳得恭)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동국지지(東國地誌)에 의거하여 단군조선의 왕검성부터 고려의 개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21개의 왕도(王都)를 노래한 시이다. 이로 미루어 36() 역시 36개의 왕도(王都)를 뜻하는 듯하나, 어떤 근거에서 우리나라에 상고 이후 모두 36개 왕국의 도읍지가 있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의 땅에서 노닐며 동쪽으로 푸른 바다 임하면

 

與天無極, 而名山巨嶽, 根盤其中,

바닷물은 하늘과 함께 끝이 없고 명산과 큰 산악이 그 가운데에 근본하고 있어

 

野鮮百里之闢, 邑無千室之聚,

들판이 100리로 트인 곳이 드물고 고을이 1000집이 모인 곳이 없으니

 

其爲地也亦已狹矣.

그 땅은 또한 이미 협소하기만 하다.

 

非古之所謂而議論之家四焉,

옛날에 말했던 양주와 묵적과 노자와 불교는 아니지만 의론하는 부류가 넷이고당시 조선에 노론(老論)ㆍ소론(少論)ㆍ남인(南人)ㆍ소북(小北)의 네 당파가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자는 양주라고도 하는데, 전국시대 사상가로 극단적인 이기주의(利己主義)를 표방했으며, 묵자는 양자와는 달리 반대로 이타주의에 해당하는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고,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였다. 연암은 당시 조선의 사색당파가 이런 사상적 대립도 못 되는 주제에 서로 자기주장을 내세워 상대방을 헐뜯고 공격하고 배척하는 것을 비꼬기 위해 이런 말을 햇다. 이 비꼬는 어투에서 서른 살 연암의 패기가 느껴진다

 

非古之所謂士農工商而名分之家四焉.

옛날에 말했던 사농공상은 아니지만 명분의 부류가 넷문반ㆍ무반ㆍ서족(庶族, 서얼)ㆍ중인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한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저명한 한학자 창강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이를 사당인(四黨人), 비 사당인(非 四黨人), 중인, 서족이라고 보았으나 수긍하기 어렵다이다.

 

是惟所賢者不同耳,

이것은 오직 낫다고 여기는 것이 같이 않을 뿐이지만

 

議論之互激而異於秦越;

의론이 서로 격렬해져 진나라와 월나라두 나라는 춘추시대의 나라로, 진나라는 중국 서북부에, 월나라는 중국 동남부에 있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소원한 관계, 피차 상관없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진나라와 월나라의 사이라고 한다의 차이보다도 더 차이가 나고

 

是惟所處者有差耳,

이것은 오직 처한 상황이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名分之較畫而嚴於華夷.

명분을 비교하며 구획함이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보다도 엄격하기만 하다.

 

嫌於形跡 則相聞而不相知,

드러난 자취를 싫어해서 서로 소문 들으면서도 서로 알진 않고

 

拘於等威, 則相交而不敢友.

계급의 위엄에 구속되어 서로 사귀면서도 감히 친구가 되진 않는다.

 

其里閈同也, 族類同也,

그 마을이 같고 종족이 같으며족류동야(族類同也): 곧 민족이 같다는 말이다. ‘종족이라는 말의 원류는 족류(族類)’이다. ‘민족이라는 말은 서양어 ‘nation’의 번역어로 근대 일본이 처음 만들어 쓴 용어인데 이후 동아시아에 두루 통용되었다. 전근대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말보다는 종족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言語衣冠其與我異者幾希矣,

언어와 의관이 나와 다른 것이 거의 드문데도

 

旣不相知, 相與爲婚姻乎?

이미 서로 알지를 못하니 서로 혼인하겠는가?

 

不敢友焉, 相與爲謀道乎?

감히 친구가 되지 않는데 서로 도를 도모하겠는가?

 

是數家者, 漠然數百年之間秦越華夷焉,

이 몇몇의 부류는 막연히 수백 년 동안 진나라와 월나라나 중화와 오랑캐처럼 차이가 나듯 했지만

 

比屋連墻而居矣, 其俗又何其隘也.

집이 나란하고 담장이 이어져 살고 있으니, 풍속이 또한 어째서 편협한 것인가?

 

 

 

연행길에서 만난 3명의 중국 친구들

 

洪君德保, 嘗一朝踔一騎, 從使者而至中國,

홍덕보덕보(德保): 홍대용의 자(). 호는 담헌(湛軒)이다가 일찍이 하루 아침에 한 말을 타고 사신을 따라 중국에 이르러

 

彷徨乎街市之間, 屛營於側陋之中,

길거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누추한 곁길 가운데서 왔다 갔다하다가

 

乃得杭州之遊士三人焉.

곧 항주(杭州)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지명으로, 송대(宋代) 이래 사대부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다의 유학하는 선비 세 사람을 만나게 됐다.

 

於是間步旅邸, 歡然如舊.

이에 간간히 여관으로 걸어가니 서로 기뻐하기가 옛 친구 같았다.

 

極論天人性命之源, 朱陸道術之辨,

하늘과 사람, 성명의 근원, 그리고 주자학과 양명학육왕학(陸王學): 송나라 육구연(陸九淵, 1139~1192)과 명나라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학문을 일컫는 말이다. 홍대용과 항주 선비들이 북경에서 주고받은 필담 및 서신에는 이 두 인물의 사상에 대한 토론이 자주 보인다. 주자와 육구연은 송대 유학의 중요한 두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주자학자들은 육구연이 학문 연구를 경시하고 마음의 수양만 중시한 점을 들어 그를 이단시하면서 공격하였다. 왕양명은 처음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그것이 공소(空疏)하고 지나치게 번쇄하다는 점을 깨닫고는 마음공부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상 체계를 창시하였다. 이것이 곧 양명학(陽明學)이다. 주자학에서는 ()’을 객관적 실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를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실체로 간주한다. 한편 ()’에는 하늘의 가 품부되어 있는바 이것이 곧 ()’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이란 의 자기 확대에 불과하며, ‘자체가 곧 라는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주자학에서는 마음과 사물에서 부단히 를 궁구해가는 일이 요구되는 반면, 양명학에서는 간단히 만 닦으면 된다. 전자가 객관유심론이라면, 후자는 주관유심론이다. 이 점에서 양명학은 선학(禪學)과 친연성이 있다. 조선과 달리 명나라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성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청초(淸初)까지 이어졌다. 더군다나 항주는 왕수인의 고향인 여요(餘姚) 인근으로 특히나 양명학이 강세를 보이던 곳이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다. 일찍이 퇴계가 양명학을 이단이라 비판한 이래 조선에서 양명학은 늘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그렇기는 하나 17세기 이후 소론(少論) 가문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그 학맥이 이어져 왔다. 하지만 조선의 학문 풍토에서는 설사 자신이 양명학자라 할지라도 그것을 대놓고 표방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조선의 양명학자들은 주자학의 외피(外皮)로 자신의 사상을 은폐하였다. 그만큼 조선은 주자학의 자장(磁場)이 강했으며, 주자학 일변도였다.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사상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과는 달리 조선은 사상적 융통성을 갖지 못했으며, 아주 경직되고 편협하며 대단히 배타적인 방향으로 하나의 사상을 절대화해갔다. 이는 조선 사대부의 고루함 내지는 이념적 편협성과 관련된다도술의 변론,

 

進退消長之機, 出處榮辱之分,

나아가거나 물러남, 사라지거나 자라남진퇴소장(進退消長): 진퇴는 군자와 소인의 교체, 소장은 음양(陰陽)의 변화를 가리킨다. 군자가 물러나고 소인이 진출하는 것은 음이 성하고 양이 쇠하는 시기이며, 군자가 진출하고 소인이 물러나는 것은 음이 쇠하고 양이 성하는 시기이다의 기미, 그리고 출처와 영욕의 나누어짐에 대해 극렬히 토론하며

 

攷據證定, 靡不契合.

근거를 들고 논증하니 딱 맞지 않은 적이 없었다.

 

而其相與規告箴導之言, 皆出於至誠惻怛,

서로 간에 충고해주고 경계하며 이끌어준 말들이 모두 지극히 진실하며 측은한 마음에서 나왔으니,

 

始許以知己, 終結爲兄弟.

처음엔 허여하여 지기가 되었고 마침내는 결의하여 형제가 되었다.

 

其相慕悅也如嗜欲,

서로 사모하고 좋아하길 향락을 즐기기욕(嗜欲): 향락을 탐내는 것 (음식이나 남녀 관계 등의) 정도를 넘어선 욕망듯 했고

 

其相無負也若詛盟,

서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음을 맹세하듯 했으니

 

其義有足以感泣人者.

그 의로움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울릴 만했다.

 

 

 

청나라라는 인식, 오랑캐라는 인식을 버렸기에 만날 수 있었다

 

嗟呼吾東之去幾萬里矣, 君之於三士也,

! 우리나라와 오나라와의 거리는 거의 만 리나 되니 홍군은 세 선비에 대해

 

不可以復見矣.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然而向也居其國, 則同其里閈而不相知,

그러나 접때 그 나라에 살 때는 같은 마을임에도 서로 알지 못하다가

 

今也交之於萬里之遠;

지금은 만 리나 먼 데도 사귀고,

 

向也居其國, 則同其族類而不相交,

접때 그 나라에 살 때는 같은 종족인데도 서로 사귀지 않다가

 

今也友之於不可復見之人;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며,

 

向也居其國, 則言語衣冠之與同而不相友也,

접때 그 나라에 살 때는 언어와 의관이 같음에도 서로 사귀지 않다가

 

迺今猝然相許於殊音異服之俗者, 何也?

이제 갑작스레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복색인 풍속을 지닌 사람을 허여한 것은 왜인가?

 

君愀然爲間曰:

홍군이 서글프게 뜸들이다가 말했다.

 

吾非敢謂域中之無其人而不可與相友也,

내가 감히 우리나라에 괜찮은 사람이 없어 서로 사귀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誠局於地而拘於俗, 不能無鬱然於心矣.

진실로 땅덩어리에 국한되고 풍속에 구애받아 마음에 답답한 게 없지 않았네.

 

吾豈不知中國之非古之諸夏,

내가 어찌 중국이 옛날의 중화가 아니고

 

其人之非先王之法服也.

그곳에 사는 사람이 선왕이 만든 복식을 따르지 않는 걸 모르겠는가고대의 성왕(聖王)이 예법에 맞게 차등을 두어 제정했다는 옷을 말한다. 천자 이하 다섯 등급으로 나눈 오복(五服)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효경(孝經)경대부장(卿大夫章)선왕의 법복이 아니면 감히 입지 않는다[非先王之法服 不敢服].”고 하였다. 청 나라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한족에게 만주족의 옷을 입도록 강제하였다.

 

雖然, 其人所處之地,

비록 그렇다 해도 그 사람이 살던 땅이

 

豈非堯舜禹湯文武周公孔子所履之土乎;

어찌 요임금, 순임금, 탕임금, 문무, 주공, 공자가 밟던 땅이 아니겠으며

 

其人所交之士,

그 사람이 사귄 선비들이

 

豈非齊蜀博見遠遊之士乎;

어찌 제나라, 노나라, 연나라, 조나라, 오나라, 초나라, 민나라, 촉나라가 널리 보고 멀리 사귄 선비들이 아니겠으며,

 

其人所讀之書, 豈非三代以來,

그 사람이 읽은 책이 어찌 하()ㆍ은()ㆍ주() 이래로,

 

四海萬國極博之載籍.

사해 여러 나라들의 매우 많은 전적이 아니겠는가사기(史記)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무릇 학식 있는 사람은 전적이 극히 많지만 그래도 육경(六經)에서 진실을 찾는 법이다[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藝]”라고 한 구절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制度雖變, 而道義不殊,

제도는 비록 변했지만 도의는 다르지 않으니

 

則所謂非古之諸夏者,

말했던 옛날의 중화가 아니다라는 것에도

 

亦豈無爲之民而不爲之臣者乎?

또한 어찌 백성은 될지라도 신하는 되지 않겠다는 사람이 없겠는가?

 

然則彼三人者之視吾,

그러하다면 저 세 사람이 나를 봄에

 

亦豈無華夷之別而形跡等威之嫌乎?

또한 어찌 중화와 오랑캐를 분별하고 드러난 자취나 계급의 위엄으로 싫어함이 없겠는가.

 

然而破去繁文, 滌除苛節,

그러나 번잡스런 꾸밈을 제거하고 가혹한 절도를 제거하고

 

披情露眞, 吐瀝肝膽,

정을 피력하고 참을 드러내 속마음을 드러내

 

其規模之廣大,

그들의 인간적 규모가 광대하기만 하니홍대용은 그의 연행록(燕行錄)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통이 크면서도 마음 씀씀이가 세심한 점을 들었다. 湛軒書 外集 卷8 燕記 沿路記略

 

夫豈規規齷齪於聲名勢利之道者乎?”

대저 어찌 성명과 권세와 이익의 도리에 쪼잔하게 악착스러운 사람들이겠는가?”

 

 

 

관습, 관념에 구애되지 않고 벗을 사귄 홍대용

 

迺出其所與三士譚者, 彙爲三卷以示余曰:

이에 세 선비와 필담한 것을 꺼내 모아 세 권으로 만들고서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子其序之.”

그대가 서문을 써주게.”

 

余旣讀畢, 而歎曰:

나는 이미 읽기를 마치고서 탄식하며 말했다.

 

達矣哉, 君之爲友也!

통달했구나. 홍군의 벗 사귐이여!

 

吾乃今得友之道矣.

나는 곧 이제야 벗을 사귀는 방법을 알게 됐다.

 

觀其所友, 觀其所爲友,

누굴 사귀는지 보고 누구의 벗이 되는지 보며

 

亦觀其所不友, 吾之所以友也.” 燕巖集卷之一

또한 누굴 사귀지 않는지 보는 것이 내가 친구를 사귀는 방법이다.”

 

 

해설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會友錄]은 홍대용(洪大容)이 엮은 책이다. 아마도 홍대용이 처음 붙였던 책이름 간정동 회우록(乾淨衕 會友錄)(간정동은 북경 유리창琉璃廠의 지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홍대용의 작은 아버지 홍억(洪檍)176511월 중국으로 출발한 외교사절단에서 서장관(書狀官)의 직책을 맡았는데, 홍대용은 이 작은아버지의 수행원으로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홍대용은 이해 1227일 북경에 도착했으며, 이듬해 북경의 유리창에서 항주의 세 선비 엄성(嚴誠)ㆍ반정균(潘庭筠)ㆍ육비(陸飛)를 알게 되어 서로 필담을 나누며 교유하다가 31일 북경을 출발해 411일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였다. 홍대용은 귀국 후 북경에 체류할 때 이들과 주고받았던 필담(筆談), 시문(詩文), 편지들을 정리해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이라는 책을 엮었다. 홍대용의 문집인 담헌서(湛軒書)외집(外集) 2간정동필담(乾淨衕筆談)및 외집 권3에 실린 간정동필담 속(乾淨衕筆談續)간정록 후어(乾淨錄後語)가 이에 해당한다. 중국인 벗들과의 우정1766615일에 완성되었다.

 

 

 

 

 

 

인용

작가 이력 및 작품

1111

1. 조선이라는 땅덩어리가 너무 작다

2. 조선의 습속이 편협하다

3. 연암이 홍군이라 호칭하는 이유

4. 항주라는 곳의 문화적 특성

5. 중국 친구와 사귀다 보니 인식이 바뀌네

6. 중국인과의 교류로 우리 홍대용이 달라졌어요

7. 조선의 한계가 중국에 대한 선망을 낳다

8. 외줄타기의 긴장감을 지닌 북학정신

9. 청나라의 땅과 인민과 학술과 문화는 옛 중국 그대로다

10. 중국인들과 나눈 필담으로 비난받다

11. 홍대용의 필담으로 벗 사귀는 도를 깨닫다

12.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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