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님의 죽음은 사리가 아닌 씨 속에 담겨있다
그리고 나서도 연암은 주공의 생애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선문답처럼 시 한 수를 현랑에게 던진다. 지황탕의 비유가 이번에는 높은 나무 가지에 걸린 열매의 비유로 전개된다. 정상적인 글이라면 이른바 탑명塔銘이 들어설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글에서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분명하게 ‘명왈銘曰’이라 하지 않고, 단지 ‘내위계시왈乃爲係詩曰’이라고만 말하여 아예 명을 쓰지 않을 작정임을 슬며시 내비쳤다. 아니 명銘 뿐 아니라 명에 앞서 기술되었어야 마땅할 주공의 생애마저도 완전히 외면해 버리고 있다.
乃爲係詩曰: 이에 시로 잇대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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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맞은 나뭇잎은 죄 떨어지고, 벌레 먹은 잎새 사이로 미처 덜 익은 감 하나가 내걸려 있다. 열매에는 벌레가 갉아 먹어 드러난 씨앗이 보인다. 그 아래엔 군침을 흘리며 그 과일을 올려다보는 꼬맹이들이 있다. 돌멩이도 던져 보고, 장대를 이어도 보지만 종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다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에 그 열매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면서 바라보던 그 감을 까마귀와 까치가 먹어 버린 줄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얘길까? 서리 맞아 잎을 다 떨군 나무에 걸린 열매 하나, 혹은 벌레가 먹어 드러난 씨앗은 바로 세상을 뜬 주공의 시신 위로 떠돌던 이상한 빛이거나, 시신을 태우고 난 재에서 추스려 낸 세 알의 사리와 대응된다. 그것만 군침 흘리며 바라보던 꼬맹이들은 마당을 돌며 그 빛을 보고 두려워 떨던 현랑의 무리다. 어느덧 땅에 떨어져 찾을 길 없게 된 열매는 다비 끝에 한줌 재로 화해버린 주공의 육신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은 안타까워 부도라도 세우겠다고 다짐하는 현랑 등이다. 그러나 정작 열매는 땅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정작 주공의 정신은 다 타버린 한 줌 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현랑은 알지 못한다. 열매를 열매 되게 하는 이치가 씨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주공을 주공되게 하는 이치는 과연 세 알의 사리 속에 담겨 있는 것일까? 한 개의 작은 씨 속에 한 그루 커다란 나무의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이치가 담기어 있듯, 주공이 남기고 간 세 알의 사리 속에서 우리는 주공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지황탕 위에 잠시 끓어오르다 스러져버린 거품 방울 같은 것은 아닐까? 현랑이여! 그대는 지금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주공탑 앞으로 나아가서 주공의 사리를 보며 자네의 그 마음을 주공께 전하여 그것을 증명해 보여주게나.
인仁이 곧 천지만물의 생생불식지리生生不息之理라고 말한 것은 정자程子이다. 씨는 곧 인仁이니 거기에는 생생불식生生不息의 이치가 담겨 있다. 정작 아이들은 허공만 보며 열매를 찾는다.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던 주공은 세 개의 사리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현랑 등은 스승이 남긴 정신은 잊은 채 사리만 받들고 있다. 땅에 떨어진 씨 속에 담긴 생생불식의 실리實理, 그것은 만물 위에 구현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기에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이심전심以心傳心하고 증심상조證心相照하는 미묘법문微妙法文이 아니며,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이언절려離言絶慮의 깨달음일 수도 없다. 그것은 천하가 천하되게 하고 사물이 사물 되게 하는 공변된 이치일 뿐이다. 스승의 육신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사리뿐이다. 그러나 스승의 정신은 한낱 사리 속에는 없다. 그러니 사리에 집착함은 이심전심의 논법과도 배치되고 더욱이 생생불식의 이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럴진대 탑은 무엇 때문에 세우려 하는가? 대개 이것이 연암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한 본 뜻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해서 주공의 사리를 수습해서 스승이 남기고 가신 ‘마음’을 길이 전해 보겠다는 현랑의 ‘마음’이 허망한 줄을 알았다. 그것은 지황탕 위 거품에 비친 상相을 돌에다 새기려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연암은 애초부터 탑명을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제목을 ‘주공탑명麈公塔銘’이라 해놓고도 짐짓 딴전을 부려 시 한 수를 적고 말았던 것이다.
▲ 전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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