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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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부분은 앞 부분에 대한 연암의 총평이다. 요컨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자취는 포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내가 증명하려 들고 증거 삼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이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인생이란 하나의 포말일 뿐이 아닌가. 이미 스러진 과거의 포말이 있고, 눈앞에서 영롱한 모습을 비춰내는 현재의 포말이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포말도 있다. 주공은 이미 스러진 과거의 포말이요, 이 글을 돌에 새기려는 현랑은 현재의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 또 천백년 뒤에 이 비석을 읽을 그 어떤 이들 역시 미래의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서 그 거품 위에 비쳤던 내 모습은 내가 아니라 거품일 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거품 위에 거품이 비춰진 것일 뿐이 아니겠는가? 거품은 허무요, 거품은 적멸이니, 거기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그 모습이 사라졌다하여 슬퍼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주공이 이상한 빛으로 떠돌다가 세 알의 사리를 남겼다하여 감격할 것도 없고, 다시 볼 수 없는 스승을 그려 슬퍼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상 「주공탑명」을 네 개의 의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탑명을 쓰게 된 경과를 말하고, 이어 지황탕의 비유로 탑명을 써달라는 요청이 마땅찮음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 명銘 대신 계시係詩로 나무에 달린 열매와 씨앗이라는 새로운 화제를 꺼냈고, 끝에 와서 다시 앞서 지황탕의 비유를 게송偈頌의 형식을 빌어 부연하였다. 결국 전체 글 어디에도 「주공탑명」에서 기술되었어야 마땅한 주공에 대한 기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주공에 대한 기술이 없기에 결국 탑명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어 계시係詩와 게송偈頌을 장황하게 부연한 것은 주공의 탑명이면서도 주공도 탑명도 없는 이 기형적인 글에 대한 글쓴이의 입장 표명인 셈이다.
연암은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현랑玄郞과 같은 대비구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존재와 무無의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여 그의 미망迷妄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만 볼 수 있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 허무적멸虛無寂滅이면서 동시에 생생불식生生不息한 천지만물의 오묘한 이치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려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다음은 신동집 시인의 「오렌지」란 작품이다.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고,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지만 결국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있다. 시를 읽다가 그때 「주공탑명」을 쓰던 연암의 심정도 시인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거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몰라도.
▲ 전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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