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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시인의 입냄새 - 3. 전적이 있다면 뭐든 좋단 말인가 본문

책/한문(漢文)

시인의 입냄새 - 3. 전적이 있다면 뭐든 좋단 말인가

건방진방랑자 2020. 4. 1.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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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적이 있다면 뭐든 좋단 말인가

 

 

靑靑陵陂麥 口珠暗批撦

푸릇푸릇 언덕엔 보리 돋아도 입속 구슬 남몰래 쳐서 꺼낸다[각주:1].

不思腸肚俗 强覓筆硯雅

뱃속이 속된 것은 생각지 않고 붓 벼루 좋은 것만 굳이 찾는다.

點竄六經字 譬如鼠依社

육경의 글자를 훔쳐 모으니 사당에 숨어 사는 쥐새끼 같네[각주:2].

掇拾訓詁語 陋儒口盡啞

훈고의 말들을 주어 섬기매 촌스런 유자들 입다물 밖에.

太常列飣餖 臭餒雜鮑鮓

제관이 제사 음식 진열하면서 절인 고기 젓갈 섞어 고약한 냄새.

夏畦忘疎略 倉卒飾緌銙

여름철 농사꾼이 제 꼴을 잊고 얼떨결에 끈 달고 혁대 박아 꾸민듯[각주:3].

41구에서 52구까지는 옛것을 추구한다는 자들의 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장자』 「외물에 보면 시례詩禮를 외우면서 남의 무덤을 도굴하는 두 명의 유자가 나온다. 무덤 속 시체의 입에서 미처 구슬을 빼내지 못했는데 동녘이 터오자, 대유大儒가 근엄한 목소리로 시경의 시를 한 수 외운다. 그 시는 이렇다. “푸릇푸릇 보리는 언덕에 돋아났네. 살아 베풀지 않았으니 죽어 어이 구슬을 머금으리오.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焉.” 그리고는 냉큼 이렇게 말한다. “시경에도 이렇게 적혀 있느니라. 그러니 시체의 살적을 움켜잡고 아래턱 수염을 누르고 쇠망치로 그 턱을 두들겨 천천히 두 뺨을 벌려 입 속에 구슬이 상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야.” 아아! 그는 남의 무덤을 도굴하면서도 시경의 말씀에 따라 하고 있구나. 시경에도 이미 죽어 어이 구슬을 머금으리오라고 했으니 그의 도적질은 조금도 죄될 것이 없고 거리낄 것이 없다. 시체의 턱뼈를 부수더라도 입안의 구슬은 깨지면 안 된다.

오늘날 옛것을 모의하여 흉내 내는 자도 이 도둑놈이나 무엇이 다른가? 두보가 말하고 이백이 말했으니 괜찮고, 사기에 나오고 한서에 나오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그것이 내 말이 아니고 그들의 말인데도 그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다. 왜 그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그것은 옛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가? 시경에만 나오면 시체의 입을 벌리는 도둑질도 합리화될 수 있는가?

가슴 속에는 온통 구린내가 나는데 붓만 좋고 벼루만 좋으면 무얼 하는가? 43, 44구에서 연암이 던지는 질문이다. 붓만 좋으면 그저 명필이 되는 법이 있던가? 벼루만 훌륭하면 시도 저절로 훌륭해지는가? 찌푸리기만 하면 나도 아름다워 질 수가 있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중요한 것은 붓과 벼루가 아니다. 정작 관건은 시를 쓰는 이의 마음속에 담긴 생각에 있다. 훌륭한 벼루에 좋은 먹을 갈아도 생각이 속되고 보면 그 벼루 그 먹이 빛을 잃고 만다. 나는 없고 옛 사람의 망령만 득실대는 그런 시는 아무리 때깔이 좋더라도 나는 취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육경의 글자를 여기저기서 주워 모아 제 글인양 으스댄다. 그들은,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빌붙어 사는 지라 불을 지를 수도 없고 물을 들이부을 수도 없어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쥐새끼 같은 인간들이다. 그래도 곧 죽어도 입만 열면 경전의 말을 주워 섬기고, 붓만 들면 훈고의 문자를 늘어놓으니 무식한 촌놈들은 그저 주눅이 들어 예예 하고 굽신거릴 도리밖에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그들의 진면목을 보자면 참으로 가관이다. 제관이 종묘 제례에 쓸 제사 음식을 진열하면서 절인 고기와 젓갈 따위를 마구 얹어 놓아 온갖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꼴이나 진배없으니 말이다. 여기저기서 끌어 모아 왔지만, 애초에 놓일 자리가 아니고 보니,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오사리 잡탕이 되고 만 것이다. 그도 아니면 시골 무지랭이 농사꾼이 창졸간에 벼슬아치의 인끈을 매달고 혁대고리를 걸어 온갖 치장을 하고 으스대는 모양과 진배없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얼굴이 까맣게 탄 시골 농부가 부시시한 머리로 턱시도에 넥타이를 매고 때 빼고 광낸 꼴이라는 말이다. 인끈과 혁대 고리가 훌륭한 장식이긴 하지만 시골 농사꾼에게는 어울리지 않듯이, 옛 것이 아무리 좋아도 제 깜냥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무작정 옛날만 흉내 내면 제 촌스러움만 더 드러내게 되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인용

목차

원문

작가 이력 및 작품

소품체란 무엇인가

1. 흉내내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2. 칭찬을 듣고도 기쁘지 않은 이유

3. 전적이 있다면 뭐든 좋단 말인가

4. 지금ㆍ여기를 말하라

5. 큰 학자가 되려면 품이 넉넉해야

6.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시인의 고약한 입냄새 

 

  1. 詩禮로 남의 무덤을 파혜치는 위선적인 儒者의 허위를 풍자한 『장자』 「外物」에 나오는 이야기. 시체의 입안에 있는 구슬을 훔치기 위해 남의 무덤을 파던 儒者가 “푸릇푸릇 보리는 언덕에 돋아났네. 살아 베풀지 않았으니, 죽어 어이 구슬을 머금으리오. 靑靑之麥, 生於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焉?”라는 시를 읊으면서 시체의 턱을 망치로 깨서 입 속의 구슬을 꺼내는 이야기다. 입으로는 詩禮를 논하면서 뒤로는 남의 墓穴이나 파헤치는 위선적인 유자들을 풍자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사당에 사는 쥐는 사당에 불이 날까봐 연기로 내쫓지도 못하고, 바닥이 더러워 질까봐 물을 붓지도 못하므로 죽일 수가 없다. 『晏子春秋』에 나오는 고사로, 城狐社鼠는 교활하게 남의 세력에 의지하여 나쁜 짓을 하는 간사한 무리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본문으로]
  3. 夏畦는 여름날 농사짓는 농사꾼을 말한다. 『맹자』 「등문공」하에 “어깨를 수굿이 하고 아첨하며 웃는 것은 여름날 밭가는 사람보다 수고롭다. 脅肩諂笑, 病于夏畦”라 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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