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흉내내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군의 시고詩稿는 몹시 적어서, 고체와 금체시 모두 50수 뿐이다. 고체시는 오로지 한유韓愈를 배웠는데 기이하고 험벽하기는 그보다 더 해서, 정경情境은 핍근하고 필력이 막힘이 없다. 율시와 절구 등의 시는 항상 성률에 구속되어 마음 속에 말하려는 것을 그대로 쏟아낼 수 없음을 못마땅히 여기셨다. 그래서 왕왕 한 두 구절만 이룬 채 그만 둔 것이 많다.
-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태학사, 1997), p.279
연암이 시 짓기를 즐기지 않았던 것은 그러니까 운자니 평측이니 하는 성률에 얽매여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것이 싫어서였다. 이번에 보려고 하는 연암의 시 「증좌소산인贈左蘇山人」은 몇 십수밖에 남지 않은 연암의 시 중에서도 험벽한 운자를 한 번도 환운하지 않고 단숨에 내달은 5언 92구, 460자에 달하는 장시이다. 좌소산인은 서호수徐浩修의 장남 서유본徐有本(1762-1799)으로, 당대에 석학으로 이름 날렸던 서유구徐有榘의 형이다. 이 시는 연암이 문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작품인데, 표현이 난삽하고 비유가 까다로와 아직껏 전편이 논의된 적이 없다. 이제 작품의 단락에 따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시구 앞에 번호를 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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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8구까지는 ‘문필진한文必秦漢, 시필성당詩必盛唐’, 즉 문장을 하려면 선진양한을 본받아야 하고, 시를 지으려면 盛唐을 모범 삼아야 한다는 상투적인 주장에 대한 일침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미 ‘비슷한 것은 가짜다’란 말은 「공작관집서」를 비롯하여 여러 글에서 되풀이해 강조한 것이지만, 여기서도 연암은 양한이나 성당과 비슷해지려 해서는 결코 한당漢唐도 될 수 없고 자기 자신도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왜 남과 비슷해지려 하는가? 비슷하다는 말에는 이미 진짜는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내가 그때 거기를 모방해서 방불해진다고 한들, 지금 여기가 그때 거기로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그때 거기가 된다 한들 지금 여기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터이니 왜 그런 짓을 하는가?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을 좋아하니 그 하는 말이 날이 갈수록 촌스러워 지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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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을 흉내 내는 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누가 양한과 같다 하고 성당에 핍진하다고 하면 너무 기뻐 침을 흘리며 입을 다물 줄 모르는 멍청이도 있고, 손을 저어 그렇지 않다고 짐짓 물러서며 겸손한 체 하는 교활한 자들도 있다. 아니면 그런 칭찬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감당할 수 없다고 발뺌하는 못난 친구도 있고, 또 그것을 선망해서 나는 언제 그런 시를 써보나 하는 사람, 그렇게 못하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나서 공연히 심통을 부리며 싸움을 거는 인간도 있다.
▲ 전문
인용
4. 지금ㆍ여기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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