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금ㆍ여기를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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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53구에서 64구까지 연암의 도도한 논설이 이어진다. ‘진취眞趣’, 즉 참된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멀고 아득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지금 세상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의 노래는 중국과는 다르다.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 시대가 바뀌면 생각도 바뀌고, 언어도 바뀐다. 사마천과 반고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들은 지금 여기의 문장을 쓰려 할 터이지 예전 제가 썼던 문장을 모의하려 들진 않았으리라. 비록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예전에 없던 새 글자를 만들어 쓰지는 못한다 해도, 옛 사람이 한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며 정작 제 할 말은 한 마디도 못하는 그런 글을 쓴대서야 말이 되는가. 지금 것을 우습게 보지 말아라. 천년 뒤엔 이것이 옛 것으로 될 터이니. 지금 사람이 지금 것에 충실할 때, 그것이 뒷날에는 훌륭한 고전이 된다. 지금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양한과 성당도 모두 ‘그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 사람이 지금 것을 버리고 옛 것에만 충실할 때, 뒷날에 그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쓰레기가 될 뿐이다. 남의 흉내만 내며 정작 제 목소리 한마디 내보지 못하는 ‘지금의 옛날’들은 새겨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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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배움은 어찌 해야 하는가? 한신이 배수진을 치듯이 해야 한다. 장수치고 孫吳兵法을 안 읽은 자가 어디 있었으랴만, 진을 치는 것은 ‘배산임수背山臨水’라야 하는 줄만 알았지, 오합지졸을 이끌고 싸울 때는 ‘죽을 땅에 둔 뒤에 산다’는 병법을 응용해 거꾸로 ‘배수진’을 치는 것이 승리의 요체가 되는 줄은 아무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옛 것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옛것을 오늘에 맞게 응용하는 정신이다. 옛것은 쓸모 있고 유용한 가치이지만, 털도 안 뽑고 통째로 가져다 써서는 지금에 맞을 수가 없다. 옛것은 적재적소에 변통할 줄 아는 안목과 만날 때라야 비로소 쓸모 있는 지금 것이 된다.
여불위는 왕위 후계 서열에서 한참 떨어져 남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던,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천덕꾸러기로 구박받던 자초子楚에게 투자하여 마침내 그를 진나라의 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는 제 씨앗을 잉태한 초희楚姬를 자초에게 바쳐 그 아들이 뒤에 결국 진나라의 대통을 이었다.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67, 68구에서 한 연암의 말뜻은 여불위의 행위가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다. 여불위가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 한 수 위였다는 것이다. 남들이 눈앞의 득실에만 마음이 팔려 작은 이익에 일희일비할 때, 그는 원대한 포부로 마음먹은 제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전혀 별 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심상한 것에서 남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남들이 보면서도 못보는 사실, 늘 마주하면서도 그냥 지나치고 마는 일상 속에서 의미를 자아내어 내 삶과 연관 짓는 일, 시를 쓴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 전문
인용
4. 지금ㆍ여기를 말하라
- 「초정집서」에도 나온다. 한신이 병법과 반대로 배수진을 쳐서 이기자, 여러 장수들이 이긴 연유를 물었는데, 이때 한신이 “죽을 땅에 둔 뒤에 살고, 망할 당에 둔 뒤에 남는다. 置之死地以後生, 置之亡地以後存”라 한 병법을 썼던 것이라고 한 것을 두고 하는 말. 因循姑息의 융통성 없는 法古보다. 임기응변의 變通을 강조한 것이다. [본문으로]
- 陽翟의 장사꾼 呂不韋가 趙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秦王의 서자 子楚를 후원하여 그로 하여금 왕비의 양자가 되게하여 진나라의 후사를 잇게 했던 일. 子楚는 秦始皇의 아버지이다. 남들이 미처 미치지 못한 생각을 해서 큰 일을 이룬 것을 말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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