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의미 없는 독서에 대해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대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눈이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는 바의 것이 모두 물이고 보니 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인게지. 이제 자네의 책은 용마루에 가득차고 시렁을 꽉 채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비록 동중서董仲舒의 전일專一함을 본받고, 장화張華의 기억력에 도움 받으며, 동방삭東方朔의 암기력을 빌려온다 해도 장차 스스로 얻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完山李洛瑞, 扁其貯書之室, 曰素玩. 而請記於余, 余詰之曰: “夫魚游水中, 目不見水者, 何也? 所見者皆水, 則猶無水也. 今洛瑞之書, 盈棟而充架, 前後左右, 無非書也, 猶魚之游水. 雖效專於董生, 助記於張君, 借誦於東方, 將無以自得矣, 其可乎?” |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동그란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점점 도타워지고 오므라들면서 꼭 칠흑 속에 숨은 고양이 눈깔처럼 요괴롭게 빛나다가, 마침내 종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올리고, 구멍을 내고, 구멍이 실고추처럼 가늘고 새빨갛게 종이를 먹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히고 배창자가 쪼글쪼글 오그라들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두 번째 읽으려는 글은 독서의 방법에 대해 적고 있는 「소완정기」란 글이다. ‘소완素玩’이란 바탕을 익힌다는 의미이다. 화사후소繪事後素라고 했다. 그림을 그리자면 먼저 본 바탕이 하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채색이 먹지 않는다. 옛날에 종이가 없을 때 이야기다. 흰 바탕의 준비 없이 화가가 채색을 베풀 수 없듯이, 책읽는 사람은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서책을 통해 그 지식을 소화해낼 수 있도록 바른 바탕을 갖추어야 한다. 낙서 이서구가 방 하나 가득 책을 쌓아두고서 그 이름을 소완정이라 한 것은 그것과 더불어 바탕을 다져 익히겠다는 뜻이니,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을 치듯이 책 속에 파묻혀 그 속에서만 노닐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많은 책속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좋지만 물고기가 물속에 있어 물이 있는 줄을 아예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정작 책 속에 파묻혀 책의 의미를 그냥 놓쳐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제 아무리 한우충동의 장서라 해도, 그 안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다 해도, 그저 물고기가 제 앞의 물을 의식하지 못하듯 깨달음 없이 문자로만 읽는 공부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 아닌가? 물고기는 물에 있으면서도 물을 의식하지 못한다. 물밖에 있을 때 물고기는 오히려 물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서책의 정보는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 바라볼 때 비로소 내게 의미로 다가온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도 그 서책 속에 담긴 정보를 내 삶의 의미와 연관 짓지 못한다면 그 많은 독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식이 없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 전문
인용
2. 의미 없는 독서에 대해
4-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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