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도로 눈을 감아라
이날 홍려시소경 조광련이 의자를 나란히 하고서 요술을 구경하였다. 내가 조경에게 말하였다. “눈이 능히 시비를 판단치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할진대 비록 눈이 없다고 해도 괜찮으리이다. 그러나 항상 요술하는 자에게 속게 되는 것은 이 눈이 일찍이 망녕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분명하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려.” 조경이 말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이가 있다 해도 소경은 속이기가 어려울 터이니, 눈이란 과연 항상된 것일까요?” 내가 말했다. “우리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이가 있었지요. 밖에 나갔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자를 만났더랍니다. ‘너는 왜 우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저는 세 살에 눈이 멀어 지금에 사십년이올시다. 전일에 길을 갈 때는 발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소리를 듣고서 누구인지를 분간할 때는 귀에다 보는 것을 부치고, 냄새를 맡고서 무슨 물건인가를 살필 때는 코에다 보는 것을 부치었습지요.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으되, 저에게는 손과 발과 코와 귀가 눈 아님이 없었습니다. 또한 어찌 다만 손과 발, 코와 귀 뿐이겠습니까? 날이 이르고 늦은 것은 낮에 피곤함을 가지고 보았고, 물건의 모습과 빛깔은 밤에 꿈으로 보았지요. 장애될 것이 없어 일찍이 의심스럽거나 어지럽지 않았습지요. 이제 길을 가는 도중에 두 눈이 갑자기 맑아지고 백태가 끼었던 눈이 저절로 열리고 보니, 천지는 드넓고 산천은 뒤섞이어 만물이 눈을 가리고 온갖 의심이 마음을 막아서 손과 발, 코와 귀가 뒤죽박죽이 되어 착각을 일으켜 온통 예전의 일상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마득히 집을 잃어 스스로 돌아갈 길이 없는지라, 그래서 웁니다.’ 선생이 말하였다. ‘네가 네 지팡이에게 물어본다면 지팡이가 응당 절로 알리라.’ 말하기를, ‘제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지팡이를 어디에다 쓴답니까?’ 선생이 말하였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바로 거기에 네 집이 있으리라.’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눈이 그 밝음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려. 오늘 요술을 보니, 요술장이가 능히 속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경하는 사람이 스스로 속은 것일 뿐입니다.” 是日鴻臚寺少卿趙光連, 聯倚觀幻. 余謂趙卿曰: “目不能辨是非察眞僞, 則雖謂之無目可也. 然常爲幻者所眩, 則是目未嘗非妄, 而視之明, 反爲之祟也.” 趙卿曰: “雖有善幻難眩瞽者, 目果常乎哉.” 余曰: “弊邦有徐花潭先生. 出遇泣于道者曰: ‘爾奚泣?’ 對曰: ‘我三歲而盲, 今四十年矣. 前日, 行則寄視於足, 執則寄視於手, 聽聲音而辨誰某, 則寄視於耳, 嗅臭香而察何物, 則寄視於鼻. 人有兩目, 而吾手足鼻耳無非目也. 亦奚特手足鼻耳? 日之早晏, 晝以倦視, 物之形色, 夜以夢視, 無所障碍, 未曾疑亂. 今行道中, 兩目忽淸, 瞖瞙自開, 天地廖廓, 山川紛鬱, 萬物礙目. 群疑塞胸, 手足鼻耳, 顚倒錯謬, 皆失故常, 渺然忘家, 無以自還, 是以泣爾.’ 先生曰: ‘爾問爾相, 相應自知.’ 曰: ‘我眼旣明, 用相何地.?’ 先生曰: ‘還閉爾眼, 立地汝家.’ 由是論之, 目之不可恃其明也如此. 今日觀幻, 非幻者能眩之, 實觀者自眩耳.” |
역시 『열하일기』 중 「환희기후지」이다. 열하에서 거리의 요술을 보고나서 그 소감을 적은 대목이다. 스무 가지에 달하는 요술장이의 요술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나서 연암은 시비도 가리지 못하고 진위도 분간할 수 없는 눈이란 없는 거나 진배없다고 말한다. 요술을 구경하는 사람이 속지 않으려고 자세히 보면 볼수록 더 잘 속게 된다. 앞서 「일야구도하기」에서, 보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더욱더 미혹되어 급기야 강물에 빠지고 마는 ‘신이목자信耳目者’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천하의 요술장이도 장님을 속일 수는 없다. 이어 연암은 이미 예전 「답창애」에서도 써먹은바 있는 서화담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 다만 내용은 이 글이 더 자세하다.
세 살에 눈이 멀어 사십년간 소경으로 살아온 사람이, 제 손과 발을 눈으로 여기고 제 코와 귀를 눈으로 알며 아무 불편함 모르고 살아오던 그가,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갑자기 눈이 열렸다. 그러자 평온하던 세계는 일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만다. 제 눈을 대신하던 손과 발, 코와 귀는 아무 소용이 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고, 아직 내 것이 아닌 내 눈은 온통 내 마음에 의심만을 일으켜 이 골목이 저 골목 같고, 이 대문이 저 대문 같아 제 집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눈을 뜨는 순간 오히려 눈이 멀어, 자신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망연자실 어쩔 줄 모르고 길 가에 서서 울고 있다. 눈을 떴으되 그 눈이 아무 소용없으니 말 그대로 ‘눈 뜬 장님’이다.
사연을 들은 서화담의 처방은 뜻밖에 간단하다. ‘도로 네 눈을 감아라.’ 눈으로 보려들지 말아라. 항상성을 회복하는 길, 정체성을 되찾는 길은 네 눈에 있지 않다. 오히려 네 손과 발, 네 코와 귀를 믿어라. 네 눈에 현혹되지 말고 네 지팡이를 믿어라. 불편함이 없던 세계, 아무 걸림이 없던 세계로 돌아가라. 네 마음의 평형을 깨뜨리는 의심의 덩어리를 놓아 버려라.
이 우화는 읽기에 따라 여러 맥락으로 읽힌다. 「답창애」에는 같은 우화를 소개하면서, 그 앞에 “본분으로 돌아가라 함이 어찌 문장만이리오. 일체의 온갖 일들이 다 그렇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말하자면 장님이 눈을 도로 감는 것을 본분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좋은 문장을 쓰려면 눈을 감아라. 훌륭한 시를 쓰고 싶거든 눈을 감아라. 문장이나 시만이 아니다. 인간 세상 온갖 일이 다 그렇다. 이때 눈을 감는다는 것은 ‘명심’의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 자리, 세계와 교통할 수 있는 촉수가 싱싱히 살아있던 그 지점으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사십년간 장님으로 살아오던 그에게 개안은 과연 천지개벽과도 같은 놀라움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자신을 잃고 만다면, 개안의 기쁨은 잠깐일 뿐 그에게는 더 큰 불행을 가져다 줄 따름이다.
‘본분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단지 ‘네 주제, 네 분수를 알아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장님 주제에 만족하고 눈 뜰 생각 아예 말고 지팡이만 믿고 살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면 어떤 눈뜸도 기쁨이기는커녕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내가 소화할 수 없는 세계, 내 것이 아닌 바깥세상만을 기웃거리다가는 오히려 나 자신을 잃게 될 뿐이다. 조나라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려다 오히려 제 본래의 걸음마저 잃고 엉금엉금 기어갔다는 저 연나라 소년의 ‘한단학보邯鄲學步’를 기억하는가? 서시의 찡그림을 흉내내다가 온 마을 사람으로 하여금 대문을 닫아걸게 만들었던 동시의 이야기가 생각나는가? 시류만을 좇아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말아라. 남의 흉내나 내다가는 결국 제 목소리마저 잃고 만다. 돌아가야 할 제 집마저 찾지 못하게 된다. 길에서 울게 된다. 눈을 믿지 마라. 부릅뜨고 볼수록 더 현혹된다. 도로 눈을 감아라. 마음으로 보아라.
인용
2. 눈에 현혹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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