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장님의 눈이야말로 평등안
다시 책문밖에 이르러 책문 안을 바라다보니 일반 집들도 모두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았고, 띠로 이엉을 이어 위를 덮었는데, 등마루는 우뚝하고 대문은 가지런하였다. 거리는 평평하고 곧아서 양쪽 가로 마치 먹줄을 친 듯하였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타는 수레와 짐 싣는 수레가 길 가운데로 이리저리 오가고, 벌려 놓은 그릇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자기들이다. 이미 그 제도를 보고 나니 시골구석의 촌티라고는 아예 없었다. 예전에 내 친구 홍덕보가 일찍이 규모는 큰데도 심법心法은 세밀하다고 말하더니,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끝 모퉁이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으매, 앞길의 유람이 갑자기 생각이 탁 막히면서 곧장 이 길로 되돌아가고만 싶어, 나도 몰래 배가 부글거리고 등이 타는 듯하였다. 復至柵外, 望見柵內, 閭閻皆高起五樑, 苫艸覆盖, 而屋脊穹崇, 門戶整齊, 街術平直, 兩沿若引繩然. 墻垣皆甎築, 乘車及載車, 縱橫道中. 擺列器皿, 皆畵瓷. 已見其制度,絶無邨野氣. 往者洪友德保, 嘗言大規模細心法, 柵門天下之東盡頭, 而猶尙如此, 前道遊覽, 忽然意沮, 直欲自此徑還, 不覺腹背沸烘. |
여기에도 장님 이야기가 나온다. 『열하일기』 「도강록」 중의 한 부분이다. 예전에 중국에 오기 전 나는 중국이 뙈놈의 나라, 오랑캐의 천지인 줄로만 알았다.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북벌北伐, 즉 ‘무찌르자 오랑캐’의 구호가 의당 그래야만 하는 진리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막상 국경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고 보니, 중국에서는 가장 귀퉁이 시골의 하나임에 분명할 이곳의 문물이 내 이목을 압도해 온다. 우뚝한 들보 위에 이엉을 얹은 집들과 가지런한 대문들, 벽돌로 쌓은 담, 사통팔달로 죽죽 뻗은 도로 위로 이리 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각종 수레들, 하다못해 집에서 쓰는 허드렛 그릇도 모두 그림을 그려 넣은 도자기 들이다. 이것이 우리가 무찌르자고 노래하던 오랑캐의 시골 모습인가? 시골이 이럴진대 그 서울은 또 어떠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그만 부끄럽고 풀이 팍 꺾여서 그길로 내쳐 돌아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크게 반성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질투심인 게로구나. 내가 평소 성품이 담박하여 남을 부러워하고 시기 질투하는 것은 본시 마음에 없었다. 이제 한 번 다른 지경으로 건너와 본바가 만분의 일에 불과 한데도 다시금 쓸데없는 망상이 이와 같음은 어찌된 것인가? 이는 바로 본바가 작은 까닭일 뿐이다. 만약 여래의 밝은 눈을 가지고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본다면 평등치 않음이 없으리라. 온갖 일이 평등하고 보면 절로 질투하고 선망하는 마음이 없게 될 것이다.” 장복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만일 네가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어떻겠느냐?” “중국은 오랑캐인 걸입쇼. 쉰네는 원하지 않습니다요.” 조금 있으려니까 맹인 한 사람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치고 손으로는 월금月琴을 타면서 걸어간다. 내가 크게 깨달아 말하였다. “저것이 어찌 평등안平等眼이 아니겠는가?” 余猛省曰: “此妒心也. 余素性淡泊, 慕羨猜妒, 本絶于中. 今一涉他境, 所見不過萬分之一, 乃復浮妄若是, 何也? 此直所見者小故耳. 若以如來慧眼, 遍觀十方世界, 無非平等. 萬事平等, 自無妒羨.” 顧謂張福曰: “使汝往生中國, 何如?” 對曰: “中國胡也. 小人不願.” 俄有一盲人, 肩掛錦囊, 手彈月琴而行. 余大悟曰: “彼豈非平等眼耶!” |
그러나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그것은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지 못한데서 비롯된 질투심일 뿐이다. 내 본 바가 워낙에 작고 보니, 조금만 새로운 것을 보아도 눈과 귀가 현혹되어 중심을 잃고 마는 때문이다. 문제는 내 눈이다. 만일 편견 없는 석가여래의 눈으로 시방세계를 살펴본다면 조선이나 중국이나 다를 바 없으리라. 평등의 눈으로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이 다 스러지리라. 나는 ‘명심’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석가여래의 눈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래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말구종꾼 장복이에게 묻는다. “얘! 너 중국에 태어나고 싶지 않니?” 느닷없는 질문에 녀석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대답한다. “에이! 싫어요. 나으리. 중국은 뙈놈의 나라가 아닙니까요. 전 오랑캐는 되기 싫은 걸입쇼.” 녀석의 논리는 단순하다. 오랑캐인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중국이 아니다. 제 아무리 문화와 문물이 발달해도 그것은 무찔러야 할 오랑캐일 뿐이다. 그렇지만 조선은 요순공맹의 도를 지켜나가고 있기에 문화와 문물이 아무리 뒤쳐져도 오랑캐가 아니라 중화中華인 것이다. 말 그대로 ‘못 살아도 나는 좋아’다. 아! 이념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로구나. 중국 먼 변방의 문물이 이렇듯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발달한 것이건만, 말구종꾼의 의식 깊은 곳까지 이른바 춘추의리란 것이 뿌리 박혀 있어, 좋은 것도 좋은 것으로 보려 들지를 않는구나.
그때 마침 장님 하나가 비단주머니를 어깨에 걸치고서 월금을 타며 길을 걸어간다. 아! 그의 눈이야말로 평등하겠구나. 오랑캐도 없고 중화도 없고, 보는 것으로 인한 시기심과 질투심도, 부끄러움도 자괴감도 없겠구나. 그의 눈이 곧 석가여래의 눈이로구나. 연암의 글에는 소경이 등장하는 것이 아직도 한 편 더 있다.
인용
2. 눈에 현혹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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