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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1. 갈림길의 뒷 표정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1. 갈림길의 뒷 표정

건방진방랑자 2020. 3. 2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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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그대를 장하게 여기리

 

 

현실에 좌절하고 가난을 못이겨 식솔들을 이끌고 강원도 두메 산골로 들어가는 벗 백영숙白永叔전송하며 써준 글이다. 친구를 전송하면서도 글을 써주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예전에는 그랬다.

그의 이름은 백동수白東修(1743-1816)이니 영숙永叔은 그의 자이다. 호는 인재靭齋 또는 야뇌당野餒堂이라 하였고 점재漸齋라고도 했다.

 

 

영숙永叔은 장수 집안의 자손이다. 그 선대에 충성으로 나라를 위해 죽은 이가 있으니, 지금까지 사대부들이 이를 슬퍼한다. 영숙은 전서와 예서에 능하고 장고掌故에 밝다. 젊어서 말 타기와 활 쏘기에 뛰어나 무과에 뽑히었다. 비록 벼슬은 시명時命에 매인 바 되었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뜻만은 선조의 공덕을 잇기에 족함이 있었으니 사대부에게도 부끄럽지가 않다.
永叔將家子.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永叔工篆隸嫺掌故, 年少善騎射, 中武擧. 雖爵祿拘於時命,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而不媿其士大夫也.

백영숙은 장수 집안의 후예로서 선열을 이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장한 뜻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서체書體에 두루 능하였고, 장고掌故에도 밝았으며, 젊어서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나 당당히 무과에 급제하였다. 다만 시명時命이 그를 얽어매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고, 그럼에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마음만은 사대부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였다. 뛰어난 역량을 지녔고, 나라 위한 붉은 마음을 지녔으되, 세상은 그를 크게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를 얽어맸던 시명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두 번째 단락에서 연암은 문맥을 확 틀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뜻을 품었던 그가 어찌하여 식솔을 이끌고서 예맥의 고장, 즉 강원도 두메 산골로 들어가는가 하며 의문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치고 빠지는 식으로 다시금 딴전을 부렸다.

 

 

아아! 그런 영숙이 어찌하여 식솔을 이끌고서 예맥𧴖貊의 고장으로 들어가는가? 영숙이 일찌기 나를 위해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거처를 잡아준 일이 있었다. 산이 깊고 길이 막혀 종일을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었다. 서로 더불어 갈대 숲 가운데에 말을 세우고 채찍으로 높은 언덕배기를 구획지으면서 말하였다.
저기라면 울타리를 치고 뽕나무를 심을 수 있겠군. 갈대에 불을 질러 밭을 갈면, 한 해에 조를 천 석은 거둘 수 있겠네.”
시험삼아 쇠를 쳐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으니, 꿩이 깍깍 대며 놀라 날고, 새끼 노루가 앞으로 달아났다. 팔뚝을 부르걷고 이를 쫓다가 시내에 막혀 돌아왔다. 서로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백년도 못되는 인생이 어찌 답답하게 목석 같이 살면서, 조나 꿩, 토끼를 먹으며 지낼 수 있겠는가?”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永叔嘗爲我相居於金川之燕巖峽. 山深路阻, 終日行, 不逢一人.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 “彼可籬而桑也, 火葦而田, 歲可粟千石.” 試敲鐵, 因風縱火,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奮臂追之, 隔溪而還. 仍相視而笑曰: “人生不百年, 安能鬱鬱木石居食粟雉兎者爲哉?”

백영숙은 일찍이 내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려 할 때, 나를 위해 거처를 잡아준 적이 있었다. 그곳은 산은 깊고 길은 막혀 종일 가도 사람 하나 만날 수 없는 궁벽한 곳이었다. 뒤덮힌 갈대숲에 불을 놓자 꿩이 깍깍대며 날아가고 새끼 노루가 놀라 달아나는 그런 곳이었다. 내가 그곳에 은거하려 하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사람이 산대야 백년을 못사는데, 품은 뜻을 마음껏 펼쳐보지도 못한 채 이 궁벽진 곳에서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처럼 답답하게 지내면서 조나 꿩, 토끼를 잡아먹으며 한 세월을 보내겠다니 이것이 어디 차마 할 일이란 말인가?”

!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그는 세상을 등질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현실을 등지려는 나의 처지를 안타까워하였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기린협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기린협은 지금의 춘천 땅이다. 송아지를 지고 들어가 그놈을 키워 밭을 갈게 하겠다 한다. 소금도 된장도 없는지라 산아가위와 돌배로 장을 담그겠다고 한다. 다시는 더러운 세상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고 한다.

 

 

 

 

 

 

2. 서얼금고법으로 뜻을 펴지 못한 채

 

 

이제 영숙은 기린협에서 살겠다고 한다. 송아지를 지고 들어가 키워서 밭을 갈게 하겠다고 한다. 소금도 된장도 없는지라 산아가위와 돌배로 장을 담그리라고 한다. 그 험하고 가로막혀 궁벽한 품이 연암협보다도 훨씬 심하니, 어찌 견주어 같이 볼 수 있겠는가?
今永叔將居麒麟也, 負犢而入, 長而耕之. 食無鹽豉, 沈樝梨而爲醬, 其險阻僻, 遠於燕巖, 豈可比而同之哉.

한때 그에게도 젊음의 야망에 불타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장한 기개를 품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야망, 그 기개를 다 접어두고 세상을 등져 자취를 감추겠다고 한다. 날더러 이런 궁벽한 곳에서 어찌 살려 하느냐고, 답답하지도 않느냐고 안타까워하던 그가, 나 살던 연암협보다 더 궁벽한 두메 산골로 들어가겠다 한다.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그에게 이런 결심을 강요했는가?

 

 

그러나 나는 갈림길 사이를 서성이면서 여태도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물며 감히 영숙이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뜻을 장히 여길지언정 그 궁함을 슬퍼하지 않으련다.
顧余徊徨岐路間, 未能決去就, 況敢止永叔之去乎?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그러나 나는 그의 뜻을 장하게 여길지언정, 그의 궁함을 슬퍼하지 않겠다. 티끌세상의 그물에 얽혀 현실에 발을 들여놓지도, 그렇다고 현실을 등져 숨지도 못한 채, 갈림길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는 나의 망설임에 비긴다면, 그의 이번 결행은 오히려 장하지 아니한가?

백영숙의 증조부는 백시구白時耈(1649-1722)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경종景宗 때 왕세제王世弟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간에 벌어진 신임사화辛壬士禍에서 영의정 김창집의 편에 섰다가 모함에 걸려 옥사하였고, 뒤에 영조 즉위 후에 호조판서로 추증된 일이 있다. 그런데 백영숙의 조부 상화尙華는 바로 백시구의 서자였다. 위에서 시명에 얽매인바 되었다 함은 곧 그가 서얼의 신분임을 두고 한 말이다. 할아버지가 서출이니 그 손자도 서얼이 된다. 서얼은 능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문과文科는 꿈조차 꾸지 못하고 무과武科에만 겨우 응시할 수 있으며, 벼슬을 주더라도 한직閑職만 제수한다는 것이 조선시대 서얼들을 옭죄이고 있던 이른바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다. 무슨 이런 끔찍한 법이 있는가? 선대先代가 서출이면 그 후손은 천형天刑처럼 서얼의 낙인을 찍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백영숙이 견디다 못해 식솔들을 이끌고 강원도 두메 산골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이다. 요컨대 그는 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28세 때 무과에 당당히 급제하였다. 그도 청운의 꿈을 품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뜻을 굽히는 비굴한 굴종이 아니고서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생각해 보면 백영숙과 같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세상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유위有爲한 인재들이 제 스스로 세상을 버리게끔 만드는 현실, 이러한 현실을 향한 울분을 연암은 이 글을 통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글 전체를 통해 볼 때 극적인 반전을 통한 비장미가 잘 구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3. 백동수는 참된 야뇌인이구나

 

 

한때 그는 버려진 야인野人의 삶과 굶주리는 가난을 자조하며 자신의 당호堂號를 아예 야뇌당野餒堂이라 짓기도 하였다. 이덕무는 그를 위해 야뇌당기野餒堂記를 지어주었는데, 이제 그 일부를 읽어보기로 하자.

 

 

야뇌野餒는 누구의 호인가? 내 친구 백영숙의 자호自號이다. 내가 영숙을 보건데는 기위奇偉한 선비인데, 무슨 까닭으로 스스로 그 낮고 더러운 곳에 처한단 말인가? 나는 이를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세속을 벗어나 무리와 어울리지 않는 선비를 보면 반드시 이를 조소하고 비웃어 말하기를,
저 사람은 생김새가 고박古樸하고 의복이 세속을 따르지 않으니 야인野人이로구나. 말이 실질이 있고 행동거지가 시속時俗을 좇지 않으니 뇌인餒人이로다.”
라고 하며 마침내 더불어 어울리지 않는다.
野餒誰號? 吾友白永叔自號也. 吾見永叔, 奇偉之士, 何故自處其鄙夷? 我知之矣. 凡人見脫俗不群之士, 必嘲而笑曰: “彼人也, 顔貌古樸, 衣服不隨俗, 野人哉! ; 語言質實, 行止不遵俗, 餒人哉!” 遂不與之偕.
 
온세상이 모두 그러한지라, 이른바 야뇌野餒한 사람은 홀로 기쁘게 그 길을 가다가도 세상 사람이 나와 함께하지 않음을 탄식하여, 혹 후회하여 그 순박함을 버리거나, 혹 부끄러워하여 그 질박함을 버려, 점차 각박한데로 나아가게 되니, 이 어찌 참으로 야뇌한 것이라 하겠는가? 야뇌한 사람은 또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擧世皆然, 其所謂野餒者, 獨行于于, 歎世人之不我與也, 或悔而棄其樸, 或愧而棄其質, 漸趨于薄, 是豈眞野餒哉? 野餒之人, 其亦不可見矣.
 
백영숙은 고박古樸하면서도 실질實質이 있는 사람이다. 차마 도타움을 가지고 세상의 화려함을 사모하거나, 질박함을 가지고 세상의 속임수 쓰는 것을 뒤쫓지 아니하고, 굳세게 스스로를 세워 마치 방외方外에서 노니는 사람과 같음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무리로 모여 헐뜯고 비방하여도 야함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함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니, 이 사람이야 말로 진실로 야뇌한 사람이라고 말할 만 하다.
永叔古樸質實人也. 不忍以質慕世之華, 以樸趨世之詐, 崛强自立, 有若遊方外之人焉. 世之人, 群謗而衆罵, 乃不悔野, 不愧餒, 是可謂眞野餒哉.

이룬 것 없는 야인의 삶과 굶주림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뇌인餒人의 생활을 자조하면서도, 질박하고 도타운 삶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이 이 야뇌당이란 이름 속에 담겨 있음을 본다. 요컨대 백영숙은 그런 사람이었다.

 

 

 

 

4. 나의 모든 걸 다 털어놓게 만드는 친구

 

 

그런데 기린협으로 떠나가는 백영숙을 글로써 전송한 사람은 연암만이 아니었다. 박제가朴齊家의 문집에서도 송백영숙기린협서送白永叔基麟峽序란 같은 제목의 글과 만날 수 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에서 우정의 참 의미를 되새기자는데 이 글의 주된 뜻을 두었으므로 좀 길지만 함께 읽어보기로 한다.

 

 

천하에서 가장 지극한 우정은 궁할 때의 사귐이라 하고, 벗의 도리에 대한 지극한 말로는 가난을 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아! 청운靑雲의 선비가 혹 굽히어 초가집에 수레타고 찾아오기도 하고, 포의布衣의 선비가 혹 권세가의 붉은 대문에 소매자락을 끌기도 하니, 어이하여 서로 간절히 구하는데도 서로 마음맞기가 이다지 어렵단 말인가?
天下之至友曰窮交, 友道之至言曰論貧. 嗚呼! 靑雲之士, 或枉駕於蓬蓽, 韋布之流, 或曳裾于朱門, 何其相求之深而相合之難也?
 
대저 이른바 벗이란 것은 반드시 술잔을 머금고 은근히 대접하여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는 것만은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절로 말하게 되는 것, 이 두 가지에서 그 사귐의 깊고 얕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夫所謂友者, 非必含杯酒, 接殷勤, 握手促膝而已也. 所欲言而不言, 與不欲言而自言, 斯二者, 其交之深淺, 可知已.
 
대저 사람은 인색하지 않음이 없어 아끼는 것에 재물보다 심한 것이 없고, 또한 추구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매 혐오하는 바가 재물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도, 그 아껴 혐오하지 않음만을 논하니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이겠는가!시경에 이르기를, “마침내 구차하고 가난한데도 내 어려움을 알아주는 이 없네.”라고 하였다. 대저 내가 어렵게 여기는 바에 대해 남들은 반드시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천하의 은혜와 원망이 이로부터 일어나게 된다.
夫人莫不有恡, 故所私莫過於財; 亦莫不有求, 故所嫌莫甚於財, 論其私而不嫌, 而况於他乎! 詩云 : “終窶且貧, 莫知我艱.” 夫我之所艱, 人未必動其毫髮. 故天下之恩怨, 從此而起矣.
 
저 가난함을 감추고서 말하지 않는 사람인들 어찌 남에게 구할 것이 전혀 없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문을 나서 억지로 웃으면서 좋게 말을 해보지만 능히 오늘 밥을 먹었는지 죽을 먹었는지를 하나하나 들어 말할 수야 있겠는가? 평생의 일을 두루 말하면서도 오히려 감히 지척에 있는 빗장의 자물쇠에 대해 묻지 못하는 것은, 기미를 살피는 사이에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까닭이다. 반드시 어쩔 수 없게 되면 대략 이를 시도하여 잘 이끌어 나가다가 그 요점을 말했는데도 막연히 상대방의 눈썹 사이에서 반응이 없게 되면, 앞서 이른바 말을 하려 하다가도 말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마니, 이제 비록 이를 말했어도 그 실지로는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은 셈이 되는 것이다.
彼諱貧而不言者, 豈盡無求於人哉? 然而出門强笑語, 寧能數擧今日之飯與粥乎? 歷陳平生, 而猶不敢問其咫尺之扃鐍, 則幾微之際, 而至難言者, 存焉耳. 必不得已而略試之, 善導而中其彀, 漠然不應於眉睫之間, 則向之所謂欲言而不言者, 今雖言之, 而其實與不言同.
 
그래서 재물이 많은 사람은 남이 요구할까 근심하여 먼저 그 없는 것을 일컬어 남의 바램을 끊어 버리는 까닭에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 바가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른바 술잔을 머금고서 은근히 대접하여 손을 맞잡고 무릎을 맞대던 자도 모두 그 서글피 머뭇거림을 이기지 못한채 구슬프게 낙심하여 돌아가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다. 나는 이에 있어 가난을 논의함이 쉬 얻을 수 없으며, 앞서의 말이 대개 격동됨이 있어 그렇게 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故多財者, 患人之求, 則先稱其所無, 斷人之望, 則故有所不發, 則其所謂含杯酒, 接殷勤, 握手促膝者, 擧不勝其悲凉躑躅, 而不悵然失意而歸者, 幾稀矣. 吾於是乎知論貧之爲不可易得, 而向者之言, 蓋有激而云然也.
 
대저 곤궁할 때의 사귐을 지극한 벗이라 함이 어찌 자질구레 하고 비루하다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또한 어찌 반드시 요행으로 얻을 수 있기에 말하는 것이겠는가? 처한 바가 같고 보니 자취를 돌아볼 것이 없고, 근심하는 바가 한가지인지라 그 어렵고 힘든 사정을 아는 것일 뿐이다. 손을 잡고 괴로움을 위로할 때엔 반드시 그 굶주리고 배부르며 춥고 따뜻한지를 먼저 묻고, 그 집안사람의 생산을 묻는다.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절로 말하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슬퍼함에 감격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지난날에 지극히 말하기 어렵던 것이 지금은 입을 따라 곧장 거침없이 쏟아져 능히 막을 수 없게 된단 말인가? 때로는 문으로 들어가 길게 읍을 하고는 하루 종일 말없이 있으면서 베개를 찾아 한숨 자고서 떠나가도 오히려 다른 사람과 십년 이야기 한 것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이는 다른 것이 아니다. 사귐에 있어 마음이 맞지 않으면 말을 하더라도 말하지 않은 것과 같고, 그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묵묵히 둘이 서로 말을 잊더라도 괜찮은 것이다. 옛말에 머리가 흰데도 낯설고, 길에서 잠깐 만나 사귀었는데도 오랜 친구와 같다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 아니겠는가?
夫窮交之所謂至友者, 豈其𤨏細鄙屑而然乎? 亦豈必僥倖可得而言哉? 所處同, 故無形迹之顧, 所患同, 故識艱難之狀而已. 握手勞苦, 必先其飢飽寒煖, 問訊其家人生産, 不欲言而自言者, 眞情之惻怛而感激之使然也. 何昔之至難言者, 今之信口直出而沛然, 莫之能禦也? 有時乎入門長揖, 竟日無言, 索枕一睡而去, 不猶愈於他人十年之言乎? 此無他. 交之不合, 則言之而與不言同, 其交之無間, 則雖黙然兩相忘言, 可也. 語云 : “白頭而新, 傾蓋而故.” 其是之謂乎!
 
내 친구 백영숙은 재기才氣를 자부하며 이 세상에서 노닌지 30년인데도 마침내 곤궁하여 세상과 만나지 못하였다. 이제 장차 그 양친을 모시고 끼니를 해결하러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려 한다. 아아! 그 사귐은 곤궁함을 가지고서였고, 그 대화는 가난을 가지고서였으니, 나는 이를 몹시 슬퍼한다. 그러나 대저 내가 영숙에게 있어 어찌 다만 곤궁한 때의 친구일 뿐이겠는가? 그 집에 반드시 이틀의 땔거리가 있지 않았는데도, 서로 만나면 오히려 능히 차고 있던 칼을 끌러 술집에 전당잡히고서 술을 마셨고, 술이 거나해지면 큰 소리로 노래하며 업신여겨 꾸짖고 장난치며 웃어버리니, 천지의 비환悲歡과 세태世態의 염량炎凉, 마음 맞음의 달고 씀이 일찍이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었다.
吾友白君永叔, 負才氣, 遊於世三十年, 卒困無所遇. 今將携其二親, 就食深峽. 嗟乎! 其交也以窮, 其言也以貧, 余甚悲之. 雖然, 夫吾之於永叔, 豈特窮時之交而已哉? 其家未必有並日之煙, 而相逢猶能脫珮刀典酒而飮, 酒酣, 嗚嗚然歌呼, 嫚罵而嬉笑, 天地之悲歡, 世態之炎凉, 契濶之甘酸, 未嘗不在於中也.
 
아아! 영숙이 어찌 곤궁할 때의 벗이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찌 그렇게 자주 나와 종유해 마지 않았더란 말인가? 영숙은 진작부터 당시에 이름이 알려져, 사귐을 맺은 벗이 온 나라에 두루 퍼져 있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 목사와 관찰사에서, 그 다음으로 현달한 사람과 이름난 선비들이 또한 이따금 서로 밀어 허락하였다. 그 친척과 마을 사람, 그리고 혼인으로 교의交誼를 맺은 이가 또 한둘이 아니었다. 대저 말 달리고 활 쏘며 칼로 치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書畵와 인장印章, 바둑 장기, 거문고와 의술醫術, 지리地理, 방기方技의 무리로부터 저잣거리의 교두꾼과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등의 천한 사내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길에서 만나 정을 나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또 집으로 연신 찾아오는 사람도 접대하였다. 영숙은 또 능히 그 사람에 따라 얼굴빛을 달리하여 각기 그 환심을 얻었다. 또 산천의 노래하는 풍속과 이름난 물건, 옛 자취 및 관리의 다스림과 백성들의 고충, 군정軍政과 수리水利를 잘 말하였는데, 모두 그의 뛰어난 바였다. 이것으로 여러 수많은 사귀는 사람과 노닌다면 또한 어찌 뜻을 얻어 마음껏 질탕하게 따를 한 사람이 없겠는가? 그러나 홀로 때때로 내 집 문을 두드리는데, 물어보면 달리 갈데가 없다는 것이다. 영숙은 나보다 일곱 살 위인데, 나와 더불어 한 마을에 살던 것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때 아직 동자였는데 이제는 이미 수염이 나 있다. 십년을 손꼽아 보는 사이에 모습의 성쇠가 이와 같건만, 우리 두 사람에게는 오히려 하루와 같으니, 그 사귐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嗟乎! 永叔豈窮交之人歟? 何其數從我而不辭也? 永叔早知名於時, 結交遍國中, 上之爲卿相牧伯, 次之爲顯人名士, 亦往往相推許. 其親戚鄕黨婚姻之誼, 又不一而足, 而與夫馳馬習射擊劒拳勇之流, 書畵印章博奕琴瑟醫師地理方技之倫, 以至市井皁輿耕漁屠販之賤夫, 莫不日逢於路而致款焉. 又踵門而至者, 相接也. 永叔又能隨其人, 而顔色之, 各得其歡心. 又善言山川謠俗名物古蹟及吏治民隱軍政水利, 皆其所長. 以此而遊於諸所交之人之多, 則亦豈無追呼得意, 淋漓跌蕩之一人? 而獨時時叩余門, 問之則無他往. 永叔長余七歲, 憶與余同閈而居也, 余尙童子, 而今焉已鬚矣. 屈指十年之間, 容貌之盛衰若斯, 而吾二人者, 猶一日也. 卽其交可知已.
 
아아! 영숙은 평생 의기意氣를 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손수 천금을 흩어 남을 도운 것이 여러번이었으나, 마침내 곤궁하여 세상과 만나는 바가 없어, 사방에서 그 입에 풀칠함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비록 활을 잘 쏘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그 뜻이 또 녹록하게 남을 따라 오르내리며 공명을 취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이제 또 집안 식구들을 이끌고서 기린협 가운데로 들어가는데, 내 듣기에 기린협은 옛날 예맥의 땅으로 험준하기가 동해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그 땅 수백리가 모두 큰 고개와 깊은 골짝으로 나뭇가지를 더위잡고서야 건너고, 그 백성은 화전을 일구고 너와를 얹어 집짓고 사니, 사대부는 살지 않는다고 한다. 소식은 일년에 겨우 한차례나 서울에 이를 것이다. 낮에 나가면 오직 손가락 끝이 무지러진 나뭇꾼과 쑥대머리를 한 숯쟁이들이 서로 더불어 화로에 빙 둘러 앉아 있을 뿐이리라. 밤이면 솔바람소리가 쏴아 하며 일어나 집 둘레를 흔들며 지나가고, 궁한 산새와 슬픈 짐승들은 울부짖으며 그 소리에 응답할 것이다. 옷을 떨쳐 일어나 방황하며 사방을 둘러보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면서 구슬피 서울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嗟乎! 永叔平生重意氣, 嘗手散千金者數矣, 而卒困無所遇, 使不得糊其口於四方. 雖善射而登第, 其志又不肯碌碌浮沈取功名. 今又絜家屬, 入基麟峽中, 吾聞基麟古𧴖國, 險阻甲東海. 其地數百里, 皆大嶺深谷, 攀木杪以度, 其民火粟而板屋, 士大夫不居之. 消息歲僅得一至于京. 晝出則惟禿指之樵夫, 鬅髮之炭戶, 相與圍爐而坐耳. 夜則松風謖謖繞屋而磨軋, 窮禽哀獸, 鳴號而響應. 披衣起立, 彷徨四顧, 其有不泣下沾襟, 悽然而念其京色者乎!
 
아아! 영숙은 또 어찌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한 해가 저물어 싸라기 눈이 흩뿌리면, 산이 깊어 여우와 토끼는 살져 있으리니, 활을 당기고 말을 달려 한 발에 이를 잡고 안장에 걸터앉아 웃으며, 또한 아웅다웅 하던 뜻을 통쾌히하여 적막한 바닷가임을 잊기에 충분할 것이 아닌가? 또 어찌 반드시 거취의 갈림길에 연연해 하며 이별의 즈음에 근심할 것이랴? 또 어찌 반드시 서울 안에서 먹다 남긴 밥을 찾아 다니다 다른 사람의 싸늘한 눈초리나 만나고, 남과 말못할 처지에 있으면서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형상을 짓는단 말인가? 영숙이여! 떠날지어다. 나는 지난 날 곤궁 속에서 벗의 도리를 얻었었소. 비록 그러나 영숙에게 있어 내가 어찌 다만 가난한 때의 사귐일 뿐이겠는가?
嗟乎! 永叔又胡爲乎此哉! 歲暮而霰雪零, 山深而狐兎肥, 彎弓躍馬, 一發而獲之, 據鞍而笑, 亦足以快齷齪之志, 而忘寂寞之濱也歟! 又何必屑屑於去就之分, 而戚戚於離別之際也! 又何必覓殘飯於京裏, 逢他人之冷眼, 從使人不言之地, 而作欲言不言之狀也! 永叔行矣! 吾向者窮而得友道矣. 雖然, 夫吾之於永叔, 豈特窮時之交而已哉.

무언가 아쉬운 일이 있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친구가 있고,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저도 모르게 어려운 형편을 다 털어 놓게 되는 친구가 있다. 사귐의 깊고 얕음은 이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술잔을 따르며 손을 잡고 무릎을 맞대는 것만이 참된 우정이 아닌 것이다.

 

 

 

 

5. 친구의 궁핍함을 알면서도 마음엔 갈등이 생기네

 

 

청나라 김성탄金聖嘆(1608-1661)쾌설快說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러 와서는 좀체 입을 열지 못하고서 묻는 말에 예예 대꾸하며 딴 소리만 한다. 내가 가만히 그 난처한 뜻을 헤아리고는 사람 없는 곳으로 데려가 얼마나 필요한지 묻고 급히 내실로 들어가 필요하다는대로 주었다. 그런 뒤에 그 일이 반드시 지금 당장 속히 돌아가서 처리해야 할 일인가? 혹 조금 더 머물면서 함께 술이나 마실 수는 없는가? 하고 물었다.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寒士來借銀, 謂不可啓齒, 于是唯唯, 亦說他事. 我窺見其苦意, 拉向無人處, 問所需多少; 急趨入內, 如數給與. 然後問其必當速歸料理是事耶? 爲尙得少留共飮酒耶? 不亦快哉!

 

 

그러자 황균재黃鈞宰란 이가 이를 패러디하여 술애정述哀情이란 글을 지었는데, 이렇게 고쳐 놓았다.

 

빈한한 선비가 이틀이나 땔거리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달려가 친구에게 부탁이나 해보려고 머뭇머뭇 문에 들어가 말을 꺼내려다가는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인이 벌써 그 뜻을 알아차리고 먼저 자기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寒士斷炊兩日, 不得已走告親友, 逡巡入門, 欲言又止. 主人已察其意, 先訴艱難, 豈不哀哉!

이 두 가지 사이의 엇갈림에서 우리는 참된 우정의 소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마음 나누는 우정이 없는 인생은 삭막한 사막이다. 길 떠나는 벗을 전송해 지어준 고인의 두 편 글이 우리네 삶을 부끄럽게 한다.

과정록을 보면 백영숙은 박지원을 마치 부하 장수가 주장主將을 섬기듯 했고, 이덕무나 박제가 등에게 내가 연암을 섬기는 것은 마치 주창周倉이 관운장關雲長에 대해서와 같다고 하였다 한다. 한 번은 울분을 못 이겨 술이 엉망으로 취해 연암을 찾아와 술주정을 해대자, 연암은 곧장 그를 엎어놓고 종이 자르는 판으로 볼기 열 대를 때려 그 무례를 꾸짖은 일도 있었다. 서울을 떠나 기린협에 들었던 백영숙은 뒷날 다시 기린협을 나와 장용영壯勇營의 장관將官이 되었다. 박제가 등과 함께 전통 무예지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편찬에도 관여하였고, 외직에 나가 비인庇仁 현감과 박천博川 군수를 지냈다. 이 모두 마음에서 우러난 벗들의 주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용

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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