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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2. 한 여름 밤 이야기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2. 한 여름 밤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0. 3. 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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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더운 여름밤 연주하고 춤추던 친구들

 

 

이번에 읽을 두 편 글은 연암과 그 벗들이 격의 없이 만나 예술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들이다. 암울한 시대를 건너기가 답답해 가슴 터지기야 그들이 우리보다 덜하지 않았겠지만, 이런 풍류와 여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발광發狂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 윗글의 제목은 하야연기夏夜讌記이다.

 

 

22,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에게 갔다. 풍무風舞 김억金檍은 밤에야 도착하였다. 담헌이 슬을 타자, 풍무는 금으로 화답하고, 국옹麯翁은 갓을 벗고 노래한다. 밤 깊어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자 더운 기운이 잠시 가시고, 의 소리는 더욱 맑아진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모두 고요히 묵묵하다. 마치 내단內丹 수련 하는 이가 내관장신內觀臟神 하는 것 같고, 입정에 든 스님이 돈오전생頓悟前生 하는 듯하다. 대저 스스로 돌아보아 곧으매 삼군이 막아선다 해도 반드시 나아갈 기세다. 국옹麯翁이 노래할 때를 보면 해의방박解衣磅礴, 옷을 죄 벗어 부치고 곁에 사람이 없는 듯 방약무인하다.
二十二日, 與麯翁步至湛軒. 風舞夜至. 湛軒爲瑟, 風舞琴而和之, 麯翁不冠而歌. 夜深, 流雲四綴, 暑氣乍退, 絃聲益淸. 左右靜黙, 如丹家之內觀臟神, 定僧之頓悟前生. 夫自反而直, 三軍必往. 麯翁當其歌時, 解衣磅礴, 旁若無人者.

풍무風舞는 당대에 서양 칠현금의 명연주자로 이름났던 김억金檍이다. 담헌은 비파를 타고, 풍무가 칠현금으로 여기에 가세하자, 곁에 있던 국옹麯翁은 아예 갓을 벗어부치고 맨 상투로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무더운 여름밤은 깊어만 가는가 싶더니, 구름조차 그 소리에 무슨 느낌이 있었던가 사방에서 집 지붕 위로 몰려든다. 방안에 가득하던 후덥지근한 기운이 조금 가시어진다. 갑자기 연주하는 비파와 칠현금의 소리가 더욱 청아하게 들린다.

곁에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은 침도 못 삼킨 채 비파와 칠현금의 연주에 곁들어진 국옹의 노래에 숨을 죽이고 있다. 소리만 없다면 그들은 마치 수련 삼매에 빠진 내단가內丹家인가 싶고, 입정入定에 든 스님이 전미개오轉迷開悟의 한 소식을 깨친 것만 같은 표정들이다. 관객들의 눈빛은 마치 연주자의 손끝 하나, 숨 소리 하나까지도 집어 삼킬 것만 같다. 국옹의 노래는 이제 제 흥에 겨워, 갓을 벗는 차원을 넘어 웃통을 죄 걷어 부치고 곁에 있는 사람은 자못 안중에도 없다는 기세다.

 

 

 

 

 

 

2. 거미줄 이야기에서 거문고 이야기로

 

 

매탕梅宕 이덕무李德懋가 한번은 처마 사이에서 늙은 거미가 거미줄 치는 것을 보다가 기뻐하며 내게 말하였다.
묘하구나! 때로 머뭇머뭇 할 때는 생각에 잠긴 것만 같고, 잽싸게 빨리 움직일 때는 득의함이 있는 듯하다. 발뒤꿈치로 질끈 밟아 보리 모종하는 것도 같고, 거문고 줄을 고르는 손가락 같기도 하구나.”
이제 담헌과 풍무가 서로 화답함을 보며 나도 거미가 거미줄 치던 느낌을 얻게 되었다.
梅宕嘗見簷間, 老蛛布網, 喜而謂余曰: “妙哉! 有時遲疑, 若其思也; 有時揮霍, 若有得也; 如蒔麥之踵, 如按琴之指.” 今湛軒與風舞相和也, 吾得老蛛之解矣.

그리고는 둘째 단락에 가서 이야기가 돌연 이덕무의 늙은 거미 이야기로 건너뛴다. 어떤 때 거미는 꼼짝도 않고서 마치 무슨 망설임이라도 있는 듯 갈 듯 말 듯 머뭇거린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그 놈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거미줄 위를 잽싸게 내달릴 때는 그 의기양양한 기운이 내게도 느껴진다. 틀어눌러 꾹 주저앉아 있을 때에는 보리 모종을 파종한 뒤 발 뒤꿈치로 질끈 밟는 농부의 발놀림이 떠오르고, 여러 개 발을 겅중거리며 줄 위를 미끄러지듯 지날 때는 마치 거문고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손놀림도 같구나. 이제 나는 이덕무가 전날 내게 들려준 이야기처럼, 홍대용과 김억의 연주하는 손가락을 보며 거미줄 위를 제멋대로 왔다 갔다하는 거미의 능수능란한 움직임을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해 여름, 내가 담헌에게 갔더니 담헌은 마침 악사 연익성延益成과 더불어 거문고를 논하고 있었다. 그때 하늘은 비를 잔뜩 머금어, 동녘 하늘가엔 구름장이 먹빛이었다. 우레가 한번 치기만 하면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잠시 후 긴 우레가 하늘로 지나갔다. 담헌이 연에게 말하였다.
이 우레 소리는 무슨 소리에 속할까?”
그리고는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소리를 맞춰보는 것이었다. 나도 마침내 천뢰조天雷操를 지었다.
去年夏, 余嘗至湛軒, 湛軒方與師延論琴. 時天欲雨, 東方天際, 雲色如墨. 一雷則可以龍矣. 旣而長雷去天, 湛軒謂延曰: “此屬何聲?” 遂援琴而諧之. 余遂作天雷操.

다시 늙은 거미의 연상은 지난 해 여름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한낮의 여름 하늘은 먹장구름에 뒤덮혀 툭 건드리면 비가 쏟아질 형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 위로 마른번개가 번쩍하는가 싶더니 우르릉 꽈광 하고 우레 소리가 허공을 핥고 지나간다. 악사 연익성과 거문고 토론이 한창이던 홍대용은 기껏 한다는 생각이, “여보게, 자네! 저 우레 소리를 악보로 옮기면 무슨 음에 속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던 토론을 밀어 두고, 둘이 머리를 맞대고는 연신 거문고 소리로 조금 전 우레 소리와 맞춰보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어진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그 우레 소리를 한편 시로 옮겨 본 기억이 있다.

 

 

'백탑시파'는 백탑 서쪽이 이들의 주무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석치 등이 이 모임을 주도하며 '북학사상'을 폈다. 

 

 

3. 연암을 애타게 기다리던 친구들

 

 

713일 밤, 성언聖彦 박제도朴齊道가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약허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과 정생, 그리고 동자 견룡이와 더불어 무관 이덕무에게 들러 그를 데리고 왔다. 그때 마침 참판 원덕元德 서유린徐有麟이 먼저 와서 자리에 있었다. 성언은 책상다리를 한채 팔꿈치를 기대고 앉아, 자주 밤이 깊었는가를 보면서 입으로는 가겠노라고 말하면서도 부러 오래 앉아 있었다. 좌우를 돌아봐도 선뜻 먼저 일어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원덕도 또한 애초에 갈 뜻이 없는지라, 성언은 마침내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가버리고 말았다.
孟秋十三日夜, 朴聖彦與李聖緯弟聖欽元若虛呂生鄭生童子見龍, 歷携李懋官至. 時徐參判元德, 先至在座. 聖彦盤足橫肱坐, 數視夜, 口言辭去. 然故久坐. 左右視, 莫肯先起者. 元德亦殊無去意, 則聖彦遂引諸君俱去.

두 번째 이야기, 취답운종교기醉踏雲從橋記는 지금의 종로 3가 파고다 공원 뒷 편에 있던 연암의 집으로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인 박제도朴齊道와 이희경李喜經, 이희명李喜明 형제 등이 이덕무李德懋를 비롯한 여러 사람과 함께 찾아온 때의 일을 적은 것이다. 그때 연암에게는 먼저 온 손님 서유린徐有麟이 있었다. 대화 중에 끼어든 것이 멋쩍었던 성언은 책상다리를 한 채 팔꿈치를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무료한 기색을 나타낸다. 그리고는 공연히 밖을 내다보면서 시간을 묻고, 입으로는 건성 이만 가야겠군을 연발하면서도 일어서지는 않은채 앉아 있었다. 이쯤 되면 먼저 온 손님더러 이제는 우리에게 연암을 양보하라는 시위인 게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자리를 막상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먼저 온 손님 또한 작심을 한 듯 이편의 눈치를 모른 체하고 있으니, 삐뚜름하게 앉아 있던 성언이 결국 제 급한 성질을 못 이기고 사람들을 이끌고 나가고 말았다. 그렇게 연암의 집을 나선 그들은 조금은 김이 빠져서 거리를 배회했던 모양이다. 다시 연암 집 대문을 두드린 동자 녀석은 제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나으리! 아까 계신 손님은 하마 돌아가셨겠지요? 지금 저희 주인 나으리께선 다른 분들과 함께 거리를 산보하시면서, 나으리께서 빨리 나오셔서 함께 술잔이나 나누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요.” 뻔히 방안에 손님이 그대로 있음을 알면서 하는 수작이다.

 

 

한참 뒤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은 이미 가셨을 테고 여러 사람들이 거리 위를 산보하면서 나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한다고 하였다.
원덕이 웃으며 말하였다.
나라 사람이 아니면 내쫓는 구만.”
마침내 일어나 함께 거리 위로 걸어 나섰다. 성언이 나무라며 말하였다.
달이 밝아 어른이 문에 찾아왔거든 술을 차려 내와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귀한 사람만 머물려두고 이야기하면서, 어이해 어른으로 하여금 오래 바깥에 서있게 한단 말이야?”
내가 불민함을 사과하자, 성언은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서는 술을 사오게 하였다.
久之, 童子還言, 客已當去, 諸君散步街上, 待子爲酒. 元德笑曰: “非秦者逐.” 遂起, 相携步出街上. 聖彦罵曰: “月明, 長者臨門, 不置酒爲懽, 獨留貴人語, 奈何令長者, 久露立?” 余謝不敏, 聖彦囊出五十錢, 沽酒.

엉덩이 무거운 원덕도 이쯤 되면 더 배겨날 도리가 없다. 어이 없어 그가 하는 말은, “나 이것 참! 내가 진나라 사람이 아니래서 축객逐客을 당하네 그려.”이다. 옛날 전국戰國 적 진나라에서 축객逐客의 명을 내리자, 꼼짝없이 쫓겨나게 된 이사李斯간축객서諫逐客書를 써서 항의했던 고사로 뼈있게 농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래 너희들끼리 잘 놀아라가 된다. 물론 악의는 담지 않은 농담이다.

아직도 뿔이 난 성언은 손님을 내쫓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온 연암을 보고도 입을 삐죽거린다. “그래! 그 사람이 벼슬이 높대서 날 이렇게 푸대접 하긴가?” “그게 아닐세 이 사람아! 그렇다고 안 가겠단 손님을 어찌 내 쫓는단 말인가? 미안허이. 미안해.” 그제야 분이 풀렸는지, 성언은 주머니를 뒤져 50전을 내어 동자에게 술을 받아오게 한다.

 

 

 

 

 

4. 취기에 밤거릴 헤매다 만난 호백이

 

 

조금 술이 취하자 인하여 운종가雲從街로 나와 달빛을 밟으며 종각鍾閣 아래를 거닐었다. 이때 밤은 이미 삼경하고도 사점을 지났으되 달빛은 더욱 환하였다. 사람 그림자의 길이가 모두 열 길이나 되고 보니, 자기가 돌아보아도 흠칫하여 무서워 할 만하였다. 거리 위에선 뭇개들이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었다. 오견獒犬이 동쪽으로부터 왔는데 흰빛에다 비쩍 말라있었다. 여럿이 둘러싸 쓰다듬자, 좋아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서 한참을 서 있었다.
少醉, 因出雲從衢, 步月鍾閣下. 時夜鼓已下三更四點, 月益明. 人影長皆十丈, 自顧凜然可怖. 街上群狗亂嘷. 有獒東來, 白色而瘦. 衆環而撫之, 喜搖其尾, 俛首久立.

목마르던 끝에 급하게 마셔댄 술에 취기가 조금 오르자, 그들은 달빛을 밟으며 종각 아래로 진출하였다. 밤은 어느새 깊어 12시를 넘겼으되, 달빛은 한잔 술에 푸근해진 그네들의 마음처럼 더욱 환하기만 하였다. 달빛 아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들은 걷고 있다. 개들도 달빛에 취해 이리저리 몰켜다니며 어지러이 짖어대고 있다.

바로 그때 덩치 큰 오견獒犬 한 마리가 동편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왔다. 털빛은 희고, 몸은 비쩍 마른 녀석이었다. 일행이 녀석을 에워싸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경계하거나 으르렁거리는 기색도 없이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인채 그 손길을 말없이 받았다. 저를 알아주는 드문 손길이 고마웠던 것이다.

 

 

일찍이 들으니 오견獒犬은 몽고에서 나는데, 큰 놈은 말만한데다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온 것은 다만 작은 놈이어서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로 나온 것은 더욱 작은 놈인데, 우리나라 개와 비교해보면 훨씬 크다. 낯선 것을 보고도 짖지 않는데, 한 번 성이 났다 하면 으르렁거리면서 위세를 피우곤 한다. 시속時俗에선 호백胡白이라고 부른다. 특히 작은 놈은 발바리라고 부르니, 운남雲南에서 나는 종자다. 모두 고기를 좋아하는데, 비록 아무리 배고파도 불결한 음식은 먹지 않는다. 능히 사람 뜻을 잘 알아, 목에다 붉은 띠로 편지를 매달아 주면 비록 멀어도 반드시 전한다. 혹 주인을 만나지 못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주인 집 물건을 물고서 돌아와 신표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상 사신을 따라서 우리나라에 오지만, 대부분은 굶어 죽는 수가 많다. 늘상 혼자 다니며 활개치지 못한다.
嘗聞, 獒出蒙古, 大如馬, 桀悍難制. 入中國者, 特其小者易馴, 出東方者, 尤其小者, 而比國犬絶大. 見怪不吠, 然一怒則狺狺示威, 俗號胡白. 其絶小者, 俗號犮犮, 種出雲南. 皆嗜胾, 雖甚飢, 不食不潔嗾. 能曉人意, 項繫赫蹄書, 雖遠必傳. 或不逢主人, 必啣主家物而還, 以爲信云. 歲常隨使者至國, 然率多餓死. 常獨行不得意.

오견獒犬은 몽고산으로 큰 놈은 말만하고 사나워 길들일 수가 없는 짐승이라고 했다. 중국에는 그중에 작은 놈들이 들어왔고, 우리나라에는 그중에서도 다시 작은 놈들이 들어왔는데도 우리나라 토종의 개보다는 덩치가 훨씬 크니, 원래 몽고의 오견獒犬은 크고 사납기가 어떠할지 보지 않고서도 짐작이 간다. 이놈은 처음보는 괴상한 것을 보고도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업신여김을 당해 성이 나면 으르렁거리며 제 성질을 보인다. 고기를 좋아하지만, 배고파 죽게 되더라도 더러운 음식은 입에 대지 않는다. 총명하여 편지 심부름도 잘한다. 늘상 혼자 다니며, 무리 짓지 않는다. 그래서 늘 구석을 떠돌다 배가 곯아 죽는 수가 많다. 오랑캐 땅에서 온 흰 개라 해서 세상 사람들은 이 개를 호백胡白라고 부른다. 발바리는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놈만 따로 부르는 명칭이다.

굶어 죽을지언정 굴종과 타협의 더러운 음식은 먹지 않는다. 떼거리 짓지 않고 혼자 지낸다. 총명한 지혜를 지녔으되, 그 뜻을 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대부분 굶어죽는다. 이것은 북방에서 온 개 호백이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시대의 아웃사이더로 떠돌던 연암을 비롯한 일행들의 이야기인가?

 

 

 

호백이는 티벳 마스티프로 불린다. 이날 만났던 호백이도 이와 비슷하게 생겼을 거다. 매우 야윈 하얀색의 외로운 방랑자.  

 

 

5. 호백이 같은 친구들아

 

 

무관懋官이 술에 취해 호백豪伯이라고 이름 붙여 주었다. 잠시 후 있는 곳을 잃게 되자, 무관은 구슬프게 동쪽을 향해 서서 마치 친구라도 되는 듯이 호백아!’하고 이름을 부른 것이 세 차례였다.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고 떠들자, 거리의 뭇개들이 어지러이 내달리며 더욱 짖어댔다. 마침내 현현玄玄의 집에 들러 문을 두드려 더욱 마셔 크게 취하고는 운종교를 밟고서 다리 난간에 기대어 이야기 하였다.
懋官醉而字之曰豪伯. 須臾失其所在, 懋官悵然, 東向立, 字呼豪伯如知舊者三. 衆皆大笑鬨, 街群狗亂走益吠. 遂歷叩玄玄, 益飮大醉, 踏雲從橋, 倚闌干語.

술 취한 이덕무가 호백胡白호백豪伯라 부르며 어둠 속 왔던 곳으로 사라진 호백이를 반복해서 부르는 장면은 그래서 듣기에 더 슬프게 들린다. 찾는 것은 호백이인데 짖어대는 것은 거리의 개 떼들이다. 호백이는 어디로 갔는가? 저를 알아주는 일행의 손길에 잠시 행복해하던 북방에서 온 개 호백이는 어디로 갔는가? 주려 죽을망정 불의와는 타협치 않고, 뜻을 꺾는 굴종은 거부하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총명한 지혜와 고고한 정신이 득의를 낳는 대신 비참한 아사餓死거나 비굴한 굴종을 강요하던 시대에 그들과 호백이는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날 대보름 밤에 연옥 유련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었다. 혜풍 유득공은 장난으로 거위 모가지를 끌고 몇 바퀴 돌면서 마치 하인에게 분부라도 내리는 시늉을 지어서 웃고 즐거워들 하였다. 이제 하마 여섯 해가 지났다. 혜풍은 남쪽으로 금강錦江에 놀러갔고, 연옥은 서쪽으로 관서關西 땅에 나가 있으니, 모두들 별고나 없는지?
囊時上元夜, 蓮玉舞此橋上, 飮茗白石家. 惠風戱曳鵝頸數匝, 分付如僕隸狀, 以爲笑樂. 今已六年. 惠風南遊錦江, 蓮玉西出關西, 俱能無恙否?

여섯 해 전 대보름 밤에도 연암은 벗들과 함께 운종교 위에서 달빛을 밟으며 노닌 적이 있었다. 술 취한 연옥은 다리 위에서 달빛 춤을 덩실덩실 추었고, 그래도 취기가 가시지 않자 백석의 집으로 몰려가 차를 마셨었다. 혜풍은 그집 마당에서 거위의 모가지를 비틀어 쥐고서 네 이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어서 이실직고以實直告 하지 못할까?” 하는 시덥잖은 장난으로 웃고 떠들며 밤을 지샌 날도 있었다. 그러나 그 벗들 이제는 모두 뿔뿔히 흩어져 안부조차 알 길이 없구나. 그리운 날이 그렇게 가버리듯, 오늘의 이 즐거운 자리도 얼마 후엔 추억 속의 그림이 되고 말겠구나.

 

 

 

 

 

6. 밤거릴 헤매야만 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다시 수표교에 이르러 늘어 앉았자니, 다리 위 달은 바야흐로 서편에 기울어 덩달아 한창 붉고, 별빛은 더욱 흔들려 둥글고 큰 것이 얼굴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이슬은 무거워 옷과 갓이 죄 젖었다. 흰 구름이 동편에서 일어나 가로로 끄을며 둥실둥실 북쪽으로 떠가자, 성 동편은 짙푸른 빛이 더욱 짙게 보였다. 개구리 소리는 마치도 멍청한 원님에게 어지러운 백성들이 몰려들어 송사하는 것만 같고, 매미 울음은 흡사 공부가 엄한 서당에서 강송講誦하는 날짜가 닥친듯 하며, 닭 울음 소리는 마치 한 선비가 똑바로 서서 간쟁함을 제 임무로 삼는 것만 같았다.
又至水標橋列坐, 橋上月方西, 隨正紅, 星光益搖搖, 圓大當面欲滴. 露重衣笠盡濕. 白雲東起, 橫曳冉冉北去, 城東蒼翠益重. 蛙聲如明府昏聵, 亂民聚訟; 蟬聲如黌堂嚴課, 及日講誦; 鷄聲如一士矯矯以諍論爲己任.

그리하여 우리들은 처음 놀던 수표교로 다시 돌아왔다. 이제 달빛은 완연히 서편에 기울어 마지막 빛을 사르고 있다. 새벽 별빛은 오히려 휘황하여 흔들흔들 내 얼굴 위로 떨어질 것만 같다. 이슬은 또 옷과 갓을 다 적시고 말았다. 호백이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던 동편에서 이번엔 흰 구름이 일어나더니 둥실둥실 다리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떠간다. 호백이도 저 구름처럼 저 있던 북쪽 몽고땅으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구름 사라진 동쪽 숲은 어느새 미명의 새벽빛을 받아 짙은 푸르름을 뽐내고 있다.

개굴개굴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시끄럽기가 마치 말귀를 못 알아듣는 멍청한 원님에게 백성들이 몰려들어 제각금 악다구니 소리를 하는 듯 하고, 매미의 매앰매앰 하는 소음은 무서운 훈장님의 서당에서 시험 보는 날 학생들이 다투어 암송 공부를 하는 것만 같다. 그 와중에 그 소음을 압도하며 닭은 먼동을 홰친다. 교앙驕昻하게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아침이 왔음을 선포하는 그 당당함에서 연암은 마치 뜻 높은 선비가 자세를 꼿꼿히 하고 서서 시대를 향해 바른 말을 외치는 모습을 본다. ! 이 얼마나 청신한 비유인가? 그렇게 운종교와 수표교를 오가던 밤놀이는 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먼동이 터오도록 그 진진한 흥취가 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그 떠들썩한 웃음 뒤에서 자꾸만 슬픈 그 시대의 뒷표정을 읽게 된다.

 

 

 

이 날 연암은 친구들과 이 루트를 따라 밤새 움직였다. (사진 출처 - [연암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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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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