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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3. 뒷골목의 등불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3. 뒷골목의 등불

건방진방랑자 2020. 3. 2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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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흘을 굶고 머슴과 친해진 연암

 

 

윗글은 제자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연암 댁을 방문했던 일을 적은 하야방연암장인기夏夜訪燕巖丈人記란 소품 산문이다. 여기에는 연암이 사흘 굶던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가난이 선비의 다반사라지만, 그 높은 뜻에 안쓰런 궁핍이 읽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5월 그믐에 서편 이웃으로부터 걸어 연암 어른 댁을 찾았다. 때마침 희미한 구름은 하늘에 걸렸고, 숲속에 걸린 달은 푸르스름하였다. 종소리가 울렸다. 처음엔 은은하더니 나중엔 둥둥 점차 커지는 것이 마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어른이 댁에 계실까 생각하면서 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먼저 그 집 들창을 살펴보았다. 등불이 비치고 있었다.
季夏之弦, 步自西隣, 訪燕巖丈人. 時微雲在天, 林月蒼翳. 鍾聲初起, 其始也殷殷, 其終也泛泛, 若水漚之方散. 意以爲丈人在家否, 入其巷, 先覘其牖, 燈照焉.

그럼에도 이 글의 첫 단락은 알 수 없는 흥취와 절묘한 리듬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 그믐날 저녁 무렵이다. 희미한 녈구름은 하늘 위로 한가로이 떠가고, 아직 숲을 벗어나지 못한 으스름 달빛은 푸르스름한 제 빛을 흐는히 흘리고 있다. 한낮의 더위도 한 소금 물러나 제법 선선해진 시간이다. 이 양반이 서울에 올라 오셨다는데 정말 댁에 계실까? 걸음걸이가 저도 몰래 바빠진다. 그때 마침 멀리 종각에서 종소리가 울린다. 은은하게 멀리서 한 차례 울리는가 싶더니만, 연거푸 둥둥 울리자 종소리는 점점 긴 여운을 남긴다. 마치 물방울이 수면 아래서부터 보글보글 퍼지면서 올라오는 것만 같다. 청각 이미지를 시각 이미지로 그려낸 절묘한 포착이다.

종소리의 간격이 잦아들수록 그의 걸음걸이도 자꾸 더 빨라진다. 혹 이 어른이 댁에 안 계시면 어찌 하나? 그믐밤의 어두운 길을 혼자 터덜거리며 되돌아가기는 싫다. 바쁜 걸음이 골목으로 접어든다. 선생 집 들창 쪽으로 눈길이 먼저 달려간다. 불이 켜 있다. ! 계셨구나. ‘등조언燈照焉’, ‘불이 켜 있다!’ 그 한 마디 표현 속에 담긴 그의 반가움과 안도를 나는 느낄 수가 있다.

 

 

그 문으로 들어섰다. 어른께서는 벌써 사흘째 끼니를 거르고 계셨다. 마침 맨발에 맨 상투로 창턱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문간방의 아랫것과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내가 온 것을 보시더니 옷을 고쳐 입고 앉으시고는,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자세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듣고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入其門, 丈人不食已三朝矣, 方跣足解巾, 加股房櫳, 與廊曲賤隸相問答. 見余至, 遂整衣坐, 劇談古今治亂及當世文章名論之派別同異, 余聞而甚奇之也.

그리고는 선생이 사흘째 굶고 계셨다는 이야기, 맨 발 맨 상투로 창턱에 다리를 척 걸쳐 얹고서 곁방 아랫것과 말씀을 나누고 있더란 이야기, 그러더니 마치 좀 전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당대 문장명론文章名論의 파별동이派別同異를 꿰뚫어 말씀하시더란 이야기를 적었다. 앞쪽의 사흘 굶은 가난과 맨 발 맨 상투의 풀어진 자세 때문에 뒤쪽의 해박한 경륜이 더 낙차 있게 다가온다. 요컨대 그는 그 해박한 경륜을 어디에도 펼 곳이 없었던 것이다.

 

 

 

 

 

2. 켜진 촛불 속 희망과 꺼진 촛불 속 절망

 

 

그때 밤은 하마 삼경으로 내려왔다. 우러러 창 밖을 보았다. 하늘빛이 갑자기 열릴 듯 모여들어 은하수가 환해지는가 싶더니만 더욱 멀리로 날리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가 놀라 말하였다. “저건 어찌된 건가요?” 어른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네 그 옆을 좀 살펴보게.” 대개 등촉불이 막 꺼지려하여 불꽃이 더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좀 전에 보았던 것이 이것과 서로 비치어서 그런 것임을 알았다.
時夜已下三更. 仰見窓外, 天光焂開焂翕, 輕河亙白, 益悠揚不自定. 余驚曰: “彼曷爲而然?” 丈人笑曰: “子試觀其側.” 蓋燭火將滅, 焰動搖益大. 乃知向之所見者, 與此相映徹而然也.

이윽고 밤은 깊어 자정 무렵이 되었다. 창밖으로는 은하수가 길게 꼬리를 늘이며 중천에 가로 걸려 있다. 그러더니 문득 은하수 아래로 한 줄기 빛이 희게 열리더니만 길게 흔들리며 요동을 치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 저 불빛이 뭐지요?” 그러자 선생은 웃으며 에이, 이 사람! 옆을 좀 보게. 그게 다름 아니라 꺼져가는 등불 빛일세 그려.” 기름을 다 태운 심지는 꺼지기 직전 마지막 안간힘을 쓰느라 불빛을 흔들었고, 그 불빛이 때마침 하늘에 가로 걸려 있던 은하수 아래를 헤집고 들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등불이 꺼졌다. 두 사람은 캄캄한 방 가운데 앉아 웃고 얘기하며 自若하였다. 내가 말했다. “예전에 말이죠. 어르신께서 저와 한 마을에 사실 때 한 번은 눈오는 밤에 어르신을 찾아 뵈었었지요. 어르신께서는 절 위해 손수 술을 뎁혀 주셨구요. 저도 손으로 떡을 집어 흙난로에다 구웠는데, 불기운이 올라와 손이 너무 뜨거워 자꾸만 떡을 재 속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서로 보면서 몹시 즐거워 했었지요. 이제 몇 해 사이에 어르신께선 머리가 벌써 하얗게 세시고, 저 또한 수염과 머리털이 희끗해졌군요.” 이 말 때문에 서로 한참동안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으로부터 13일이 지난 뒤에 이 글을 쓴다.
須臾燭盡. 遂兩坐黑室中, 諧笑猶自若. 余曰: “昔丈人與余同里, 嘗雪夜訪丈人, 丈人爲余親煖酒, 余亦手執餠, 爇之土爐中, 火氣烘騰, 余手甚熱, 數墮餠于灰. 相視甚歡, 今幾年之間, 丈人頭已白, 余亦髭髮蒼然矣.” 因相與悲歎者久之. 是夜後十三日而記成.

그리고는 이내 불빛은 꺼져 버리고 방안에는 암흑이 찾아 왔다.

! 시대의 여명은 아직도 멀었는데, 선생의 창에 흔들리던 불빛을 이서구 그는 한줄기 서광이 비쳐 오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불빛에 연이어 찾아온 것은 환한 광명의 세상이 아니라 칠흑 같은 그믐밤의 암흑 뿐이었다. 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따지고 보면 선생이 사흘을 내리 굶으며 흐트러진 나날을 보내는 것도 어찌 그 시대의 암담함과 무관할 것이랴.

머쓱해진 제자는 화제를 딴 곳으로 돌리고 만다. “선생님! 예전 눈 오던 밤, 흙난로에 떡 구워 먹던 그 때를 기억하시지요? 술을 덥게 뎁혀 놓고, 안주 대신 꽁꽁 언 떡을 구워 먹겠다고 하다가 손이 뜨거워 재로 떡고물을 묻히던 그 밤 말씀입니다. 그땐 선생님도 참 젊으셨는데요.” 끝에 말은 공연히 해서 안 될 말이었나 싶어 대화는 여기서 다시 막히고 만다. 캄캄한 방안에서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다가 침묵하다가 마침내는 비감에 젖고 말았던 것이다.

 

 

 

 

 

3. 연암협에 살던 연암이 서울로 온 이유

 

 

이 글을 읽은 뒤 박지원도 여기에 답장하는 글을 지었다. 이 글의 제목은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이다. 읽기에 따라 씁쓸하기도 했을 제자의 글을 받아본 뒤 막상 연암은 머쓱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똑같은 형식으로 답장을 했다. 오늘의 눈에는 무의미한 장난 글로 비치겠으나, 그 글 한 줄 한 줄에 살가운 정이 담겨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 멋이 깃든 줄을 알겠다.

 

 

6월 어느 날,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가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연암 어른을 찾아가니 어른은 사흘이나 굶고 계셨다. 탕건도 벗고 맨발로 방 창턱에 발을 걸치고 누워 행랑채의 아랫것과 서로 문답하고 계셨다.” 소위 연암燕巖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금천협金川峽에 살므로 사람들이 인하여 이를 호로 삼은 것이다. 내 집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에 있었다. 나는 평소에 살이 쪄서 더위를 괴로워하는 데다 또 푸나무가 울창해서 여름밤이면 모기와 파리가 걱정되고, 논에서는 개구리가 밤낮 쉴 새 없이 울어대는 까닭에, 매번 여름만 되면 항상 서울 집으로 피서를 오곤 했다. 서울 집은 비록 몹시 습하고 좁지만 모기나 개구리, 푸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六月某日, 洛瑞夜訪不侫, 歸而有記, : “余訪燕巖丈人, 丈人不食三朝. 脫巾跣足, 加股房櫳而臥, 與廊曲賤隸相問答.” 所謂燕巖者, 卽不侫金川峽居, 而人因以號之也. 不侫眷屬, 時在廣陵. 不侫素肥苦暑, 且患草樹蒸鬱, 夏夜蚊蠅, 水田蛙鳴, 晝夜不息以故, 每當夏月, 常避暑京舍. 京舍雖甚湫隘, 而無蚊蛙草樹之苦.

당시 연암은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에 살고 있었는데, 한 여름에는 물 것들과 더위를 피해 서울 집으로 혼자 와 있곤 했다.

 

 

홀로 계집종 하나가 집을 지키다가 갑자기 눈병이 나서 미쳐 소리지르며 주인을 버리고 떠나가버려 밥 지어줄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행랑채에 밥을 부쳐 먹다보니 자연히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저도 또한 일 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는지라 노비와 같았다. 고요히 앉아 한 생각도 뜻속에 두지 않았다. 때로 시골 편지를 받으면, 단지 평안하단 글자나 살펴보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더욱 성글고 게으른 것이 몸에 배어 경조사慶弔事도 폐하여 끊었다. 혹 여러 날을 세수도 하지 않고, 열흘이나 두건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손님이 이르면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하고, 혹 땔감이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다가 더불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를 이야기 하며 정성스레 수백 마디의 말을 나누곤 하였다. 남들이 그 우활하여 마땅함이 없고 지리하여 싫어할만 함을 책망해도 또한 그만둠을 알지 못하였다. 또 제 집에 있으면서 객처럼 지내고 아내가 있으면서 중처럼 사는 것을 나무람이 있어도, 더욱 편안하여 바야흐로 한 가지 일도 없음을 가지고 자득自得하며 지내었다.
獨有一婢守舍, 忽病眼, 狂呼棄主去, 無供飯者. 遂寄食廊曲, 自然款狎, 彼亦不憚使役, 如奴婢. 靜居無一念在意. 時得鄕書, 但閱其平安字. 益習疎懶, 廢絶慶弔. 或數日不洗面, 或一旬不裹巾. 客至或黙然淸坐, 或販薪賣瓜者過, 呼與語孝悌忠信禮義廉恥, 款款語屢數百言. 人或讓其迂濶無當, 支離可厭, 而亦不知止也. 又有譏其在家爲客, 有妻如僧者, 益晏然, 方以無一事爲自得.

당시 가족들은 광릉에 있고, 자신만 혼자 서울 집에 머물던 사정을 길게 이야기 한 후, 그나마 집을 지키던 계집종마저 눈병 끝에 발광하여 집을 나가버리고, 정거무념靜居無念의 상태로 세상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내던 이런 저런 정황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찾아온 사람 무안하게 침묵으로 어깃장을 놓다가도, 말귀도 못 알아들을 참외 장수, 땔감 장수 앞에서는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일장 강의를 늘어놓기도 하였다. 어차피 효제충신孝悌忠信이니 예의염치禮義廉恥니 하는 것은 이미 사대부에게서는 빛을 잃은 것들이거니와 더불어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4. 연암의 호기로움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절룩거리는 것이 우스웠다. 밥알을 던져주어 더욱 길이 들자 날마다 찾아와서 서로 친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 놈과 더불어 장난하며 말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완전히 하나도 없고, 오로지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네[각주:1].”라 하였다. 우리나라 시속時俗에 돈을 이라 말하므로 맹상군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자다가 깨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간 또 잠을 잤다. 아무도 깨우는 이가 없고 보니,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쿨쿨 잠자기도 하고, 때로 간혹 글을 지어 뜻을 보이기도 했다. 새로 철현금鐵絃琴을 배워, 지루할 때는 몇 곡조 뜯기도 하였다. 혹 술을 보내주는 벗이라도 있으면 문득 기쁘게 따라 마셨다.
有雛鵲折一脚, 蹣跚可笑. 投飯粒益馴, 日來相親. 遂與之戱曰: “全無孟嘗君, 獨有平原客.” 東方俗謂錢爲文, 故稱孟嘗君. 睡餘看書, 看書又睡. 無人醒覺, 或熟睡盡日, 時或著書見意. 新學鐵絃小琴, 倦至爲弄數操. 或故人有餉酒者, 輒欣然命酌.

연암이 서울 집에 홀로 지내며 마음을 나눈 유일한 벗은 우습게도 사람 아닌 다리 부러진 새끼 까치였다. 새끼 까치만이 저를 위해 베푸는 사람의 후의를 마음으로 받을 줄 알았던 까닭이다. 졸리면 잠을 자고, 잠을 깨면 책을 읽고, 피곤하면 다시 잠을 자는 나날이었다. 정 지루하면 새로 배운 양금洋琴을 뜯으며 시간을 죽였다. 호주머니에 돈 한 푼 없고 보니, 목이 컬컬해도 벗이 그 사정을 알아 술을 보내주기 전에는 목구멍을 축이지도 못했다.

 

 

취한 뒤에는 스스로를 찬미하여 말하였다.
저만을 위함은 양주楊朱와 비슷하고, 남을 같이 사랑하기는 묵적墨翟과 같구나. 뒤주가 자주 비기는 안연顔淵과 같고, 꼼짝 않고 지내기는 노자老子와 한가질세. 광달曠達함은 장자莊子인가 싶고, 참선參禪하기는 석가釋迦인 듯 하다. 공손치 않기는 유하혜柳下惠와 진배 없고, 술 마심은 유령劉伶과 흡사해라. 밥을 빌어 먹기는 한신韓信과 비슷하고, 잠을 잘 자기는 진박陳搏[각주:2]과 같은 것을. 거문고를 연주함은 자상호子桑戶[각주:3]와 방불하고, 책을 저술함은 양웅揚雄과 한가지라. 스스로를 견주기는 제갈량諸葛亮과 비슷하니, 내가 거의 성인인게로구나. 다만 키는 조교曹交[각주:4]만 못하고, 청렴함은 오릉중자於陵仲子[각주:5]에게 양보해야 하니 부끄럽구나! 부끄럽구나!”
인하여 홀로 크게 웃었다.
旣醉乃自贊曰: “吾爲我似楊氏, 兼愛似墨氏. 屢空似顔氏, 尸居似老氏. 曠達似莊氏, 參禪似釋氏. 不恭似柳下惠, 飮酒似劉伶. 寄食似韓信, 善睡似陳搏.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 自比似孔明, 吾殆其聖矣乎? 但長遜曹交, 廉讓於陵, 慚愧慚愧.” 因獨自大笑.

그래도 마음 한 켠엔 도연陶然한 흥취가 남아 있어 양주楊朱ㆍ묵적墨翟에서부터 노장老莊과 석가釋迦까지 끌어들이는 호기를 부렸다.

 

 

 

 

 

  1. 孟嘗君은 戰國時代 齊나라의 귀족이니, 그의 이름이 田文이다. 平原君은 趙나라 사람인데, 그 食客 중에 다리 저는 자가 있었다. 그의 애첩이 이를 비웃자 식객이 평원군에게 항의하여 애첩을 벌줄 것을 청하였는데, 평원군이 약속하고 이를 지키지 않자 식객들이 그를 떠나갔다. 이에 평원군이 그 애첩을 죽였다. 맹상군이 없다 함은 時俗에서 돈을 ‘문’이라 하므로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음을 말함이고, 평원군의 식객만 있다는 것은 다리 저는 까치만이 자신의 손님임을 자조한 것이다. [본문으로]
  2. 陳搏 : 송나라 때 도사로 한 번 잠을 자면 백여 일을 깨지 않고 잠만 잤다는 인물. [본문으로]
  3. 子桑戶 : 『莊子』 「大宗師」에 나오는, 孟子 反子 등과 더불어 거문고로 莫逆의 心交를 나누었다는 인물. [본문으로]
  4. 曹交 : 『孟子』 「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척 4촌이나 된다고 했다. [본문으로]
  5. 於陵仲子 : 『孟子』 「滕文公」下에 나오는 陳仲子로 오릉 땅에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사흘을 굶어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는데, 우물가에 굼벵이가 파먹은 오얏을 먹고 굶어 죽기를 면하였다. [본문으로]

 

 

5. 기백이 시들어 뜻마저 재처럼 식다

 

 

이때 내가 과연 사흘 아침을 굶고 있었다. 행랑채의 아랫것이 남을 위해 지붕을 얹어주고 품삯을 받아다가 밤에야 비로소 밥을 지었다. 어린 것이 밥투정을 해 울며 먹으려 들지 않자, 행랑채의 천예賤隸가 화가 나서 밥주발을 엎어 개에게 던져주며 나쁜 말로 나가 뒈지라고 욕을 해댔다. 이때 나는 막 식사를 마치고 곤하여 누웠다가, 장괴애張乖崖가 촉 땅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목벤 일을 들어 비유하며 일깨워 주고,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욕만 하면 자라서 더욱 은공을 저버리게 되네라고 타일러 주었다.
時余果不食三朝. 廊隸爲人蓋屋, 得雇直, 始夜炊. 小兒妬飯, 啼不肯食, 廊隸怒覆盂與狗, 惡言詈死. 時不侫纔飯, 旣困臥, 爲擧張乖崖守蜀時斬小兒事, 以譬曉之, 且曰: “不素敎反罵, 爲長益賊恩.”

그리고는 다시 이서구가 찾아오던 날, 과연 사흘을 굶고 있었던 일과 행랑채에서 벌어진 일들을 해명 삼아 적어 놓았다.

 

 

그러다가 우러러 보니 은하수는 집에 드리워 있고, 별똥별이 서편으로 날아가며 흰 금을 허공에 남기고 있었다. 말이 채 마치지 않아 낙서洛瑞가 와서는 어르신은 혼자 누워 누구와 말씀하십니까?”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른바 행랑채 사람과 더불어 문답하더란 것은 이를 말함이다. 낙서는 또 눈 오던 날 떡 구워 먹을 때 일을 적었다. 그 당시는 내 옛 집이 낙서의 집과는 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아이 적부터 이따금씩 보았는데, 나는 손님이 날마다 많았고 당시 세상에 대해 의욕도 있었다. 그러나 금년에 마흔도 못되었는데 이미 터럭이 허옇게 세었으므로 자못 그 감개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쇠락하여 담담히 세상에 뜻이 없으니, 그때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이에 그를 위해 기문記文을 써서 수답酬答한다.
而仰視天河垂屋, 飛星西流, 委白痕空. 語未卒, 而洛瑞至, 問丈人獨臥誰語也? 所謂與廊曲問答者此也. 洛瑞又記雪天燒餠時事. 時不侫舊居與洛瑞對門, 自其童子時見. 不侫賓客日盛, 有意當世. 而今年未四十, 已白頭, 頗爲道其感慨. 然不侫已病困, 氣魄衰落, 泊然無意, 不復向時也. 玆爲之記以酬.

정작 마음에 걸리는 것은 끝 대목이다. 이서구가 어릴 적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 적에 연암에게는 찾아오는 손님도 많았고, 그 자신 또한 세상에 대한 의욕으로 충천해 있었다. 그러나 마흔도 채 못 된 젊은 나이에 그는 이미 병들고 지쳤음을 말하고, 기백은 시들어버려 세상을 향한 뜻마저 재처럼 싸늘히 식어버렸다고 했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했다. 너무 일찍 식어버린 세상을 향한 열정이 나는 새삼 안스럽다. 충천하던 의욕이 매몰찬 방관으로 돌아서기까지 그가 겪었을 거듭된 절망들을 나는 슬퍼한다.

 

 

 

 

 

6. 한 끼 때우려던 바람이 벼락에 사라지다

 

 

풍석楓石 서유구徐有矩 봉조하奉朝賀가 연암의 문장을 몹시 좋아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그 젊을 적에 자주 더불어 왕래하였는데 글을 지으면 반드시 연암에게 보여 그 허가함을 얻은 뒤에야 썼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 어른이 말솜씨가 뛰어나 이따금 글보다도 나았지. 한 번은 내가 가서 여쭈었네. ‘공께서 자꾸 남들의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을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이라도 있나요?’ 연암은 웃으며 말하였지. ‘자네가 그걸 알고 싶은가? 내가 일찍이 여름 장마 때 여러 날을 먹지를 못했었네. 하루는 비가 조금 그치길래 베개를 고이고 하늘가의 무지개와 노을을 보고 있었겠지. 붉은 빛이 비치며 쏟아지는데, 희미하게 번갯불이 그 가운데 있더군. 배가 몹시 고프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먹을 것을 찾을 도리가 없질 않겠나. 그래서 걸어 안채로 들어가 그릇 나부랑이 중에 팔아먹을 만한 것을 찾아 보았지만 하나도 없는걸세. 다락방 속에는 대대로 전해오던 오래된 시렁 상자가 있었는데, 속명으로 각기소리라는 것이었네. 부서지고 지저분하여 쓰기에 마땅치 않아 내버려 둔 것이어서 후한 값을 받기엔 부족하더군. 그래도 생각해보니 굶어 죽는 것을 구할 방법이 없더란 말일세. 그래서 몸소 그 앞으로 갔지. 그러다 잠깐 다락 창 틈으로 음산한 구름이 사방에 잔뜩 흐린 것을 보았네. 다만 아까 비치며 쏟아지던 빛은 더욱 빛나 눈이 어지럽더군. 그래서 넋놓고 구경하다가 두 손을 뻗어 시렁 상자를 맞들고서 겨우 땅에서 들어 올리는데 갑자기 우레소리가 한바탕 울리더니 집이 온통 흔들리는 게야. 마치 번갯불이 곧장 내 머리통에 떨어지는 것 같지 뭔가. 깜짝 놀라 시렁 상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네. 내가 평소 비방을 듣는 것이 대략 모두 이같을 뿐일세그려.’ 이에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네.”
楓石徐奉朝賀, 酷好燕巖文. 嘗自言, 其少時, 屢與之往來, 有作, 必示之, 得其許可然後用之. 又曰: “此丈談辯奇偉, 往往勝於文詞. 嘗造問曰: ‘公積受人雌黃, 豈有以耶?’ 燕巖笑曰: ‘子欲知之乎? 吾嘗於夏潦中, 累日乏食. 一日雨少歇, 支枕見天際虹霞, 赬紅暎射, 微有閃電在其中. 覺吐裏甚飢, 顧無覓食計. 遂步入內舍, 索器用之可鬻者, 而無有. 樓屋中, 有世傳舊架函, 俗名閣庋所里者. 缺汙不中用斥之, 不足以取厚値. 度它無救死策, 乃躬詣其前. 乍從樓牕鄛, 見陰雲四黑, 唯向之映射者, 益炫爍奪目. 旣無心戀玩, 伸兩手, 扛架函, 甫離地, 忽一聲霹靂, 屋宇皆震. 有若雷火之直墜吾頭腦者. 愕然不覺架函之落于地. 吾平日訾謗, 大略皆此類耳.’ 仍相與大笑.”

연암이 그 여름에 굶기를 다반사로 한 것은 위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홍길주洪吉周수여난필睡餘瀾筆에 실려 있다. “공을 두고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데 왜 그렇습니까?” 서유구徐有矩가 이렇게 따져 묻자, 연암은 씩 웃으며 천연스럽게 여름 장마철에 며칠을 굶고 있을 적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 가만히 따져 읽어보면, 여기에도 기승전결의 구성이 있고 기복이 있다.

며칠 굶었다 하고는, 그래서 못 견디게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로 바로 연결 짓지 않고, 뚱딴지 같이 어느 날 비가 잠시 개었을 때 하늘가에 걸린 빛나던 무지개 이야기와 그 사이에 번개가 번쩍번쩍 하더란 말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배가 고팠다는 이야기, 그래도 끼니를 때울 방법이 없더란 이야기, 안채로 들어가 팔아먹을 만한 그릇 나부랑이를 찾아보았지만 없더란 이야기, 다락방에 올라가 각기소리라고 하는 종이를 발라 만든 서랍장이라도 팔까 싶어 꺼내 들었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다가 잠깐 창틈을 보니 시커먼 구름이 사방으로 몰려들어 앞서 빛나던 무지개가 더욱 황홀하길래 넋 놓고 바라보다가 생각없이 각기소리를 시렁 위에서 꺼내 드는 순간 갑자기 일성벽력이 우르릉 꽝 하고 쳐서 정수리에 꽂히는 것만 같아 나도 몰래 각기소리를 땅에 떨궈 그나마 낡은 그것을 아예 망가뜨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이런 저런 비방은 며칠을 굶다가 목숨이나 부지할까 싶어 각기소리를 꺼내드는 순간 우르릉 하고 떨어진 벼락과 같다는 것이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창밖 아름다운 광경에 도취되어 넋 놓고 바라본 잘못 밖에는. 그러다가 난데없는 벼락에 그나마 한 끼 때워 보려던 바램마저 허망하게 된 잘못 밖에는.

 

 

 

 

7. 한 인물에 대한 극단적 평가

 

 

풍고楓皐 김조순金祖淳 충문공忠文公은 연암의 문장을 몹시 싫어 하였다. 일찍이 내각에 있을 때, 풍석楓石과 더불어 의론이 맞지 않자, 풍고가 불끈하여 말하기를,
박 아무개는 맹자한 장을 읽게 하면 반드시 구절도 떼지 못할걸세.”
하였다. 그러자 풍석 또한 기운을 돋워 대답하기를,
박 어른은 반드시 맹자한 장을 지을 수도 있을겝니다.”
하였다. 풍고가
그대가 문장을 모르는 것이 이 지경이냐고 말하지는 않겠네. 내가 있는 동안에 그대는 문원文苑의 관직은 바라지도 말게.”
하자, 풍석은
내 진실로 문원의 직책은 바라지도 않을 뿐이요.”
하였다. 이때 정승을 지낸 심두실沈斗室 공이 호남지방에 있었는데, 태학사 이극원李屐園이 편지를 보내 두 사람이 논쟁한 일을 고하였다. 내각 제공의 한때에 성대함을 그려볼 수가 있다. 이제 다만 풍석만이 우뚝함이 있는데, 날 위해 크게 탄식하며 그 일을 말해주었다.
楓皐金忠文公, 甚不喜燕巖文. 嘗在內閣, 與楓石論不合. 楓皐怫然曰: “朴某, 使讀孟子一章, 必不能成句.” 楓石亦盛氣而答曰: “朴丈, 必能作孟子一章.” 楓皐曰: “不謂公不知文, 至此. 吾在之日, 公勿望文苑官職.” 楓石曰: “吾固不願做文苑職耳.” 時沈斗室故相, 在湖南藩, 李屐園太學士, 貽書告兩公爭論事. 內閣諸公一時之盛, 可想見也. 今惟有楓石巋然. 爲余太息, 而道其事.

이 역시 홍길주洪吉周전언傳言이다. 한 사람 연암을 두고 이쪽에서는 맹자孟子의 구두조차 떼지 못할 인간이라고 매도하고, 다른 편에서는 맹자를 넉넉히 짓고도 남을 분이라고 높였다. 이런 극단적 평가의 엇갈림 속에서 시대의 우울과 연암의 절망은 깊어만 갔던 것이다.

 

 

 

 

인용

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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