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李穀, 1298 충렬왕24~1351 충정왕3, 자 仲父, 호 稼亭)은 초명(初名)이 예백(藝白)이며 이색(李穡)의 아버지다. 그의 가계(家系)는 한산(韓山)의 향리층(鄕吏層)이었으며 이곡(李穀)의 부자대(父子代)에 이르러 중앙에 진출하게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등제(登第)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있다가 원(元)의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그곳에서 한림국사원검열(翰林國史院檢閱)까지 지냈으며 그 뒤에도 원(元)과의 왕래가 자주 있었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에 ‘與中朝文士, 交遊講劘…辭嚴義興, 典雅高古, 不敢以外國人視也.’라 한 것으로 보아 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가정집(稼亭集)』에 전하는 것 외에도 『동문선(東文選)』등 선발책자(選拔冊子)에 30여편이 수록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도중피우유감(途中避雨有感)」(七絶), 「설야소작(雪夜小酌)」(五律), 「칠석소작(七夕小酌)」(七律), 「정조설(正朝雪)」(七律), 「원정숭천문하(元正崇天門下)」(七律), 「수도한강(水渡漢江)」(七律) 등 수작(秀作)이 많으나 재원(在元) 시절에 쓴 것이 대부분이다.
「도중피우유감(途中避雨有感)」은 다음과 같다.
甲第當街蔭綠槐 | 길 가에 덩실한 집 푸른 회나무에 덮였는데 |
高門應爲子孫開 | 높은 문은 응당 자손 위해 열렸겠지. |
年來易主無車馬 | 근년(近年)에 주인이 바뀌어 찾아드는 거마(車馬)도 없는데 |
惟有行人避雨來 | 지나가는 나그네만 비를 피하고 있구나. |
변전(變轉)을 거듭하던 려말(麗末)의 정국(政局)을 직절(直截)하게 고발하고 있지만 사어(辭語)가 근엄(謹嚴)하여 품위를 돋보이게 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문풍(文風)이 떨치지 못하고 있는 당시의 현실을 개탄한 바 있거니와 그에게 있어서의 문풍(文風)은 곧 교화 또는 풍교(風敎)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이러한 관풍(觀風)의 의지가 그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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