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국시(韓國詩)의 정착(定着)
1)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의 관풍의식(觀風意識)
이제현(李齊賢)과 이곡(李穀)은 주자학(朱子學)의 보급이 아직도 일반화되지 않은 중간 과정에서 특히 풍교(風敎)의 떨침에 같은 관심을 보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의지는 근엄한 이곡(李穀)의 시작(詩作)에 천근(千斤)의 무게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제현(李齊賢)에 있어서는 따로 소악부시(小樂府詩)를 마련하여 민풍(民風)을 정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현(李齊賢, 1287 충렬왕13~1367 공민왕16, 자 내思, 호 益齋ㆍ櫟翁)은 분명히 우리나라 문학사의 한 시기를 구획하는 데 중요하게 구실한 시인이요 문장가(文章家)임에 틀림없다. 그는 중국의 음률(音律)에 정통하여 우리나라에서도 드물게 보는 악부(樂府)의 작자로서,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가요를 악부체(樂府體)로 번역하여 이를 소악부(小樂府)라 했으며, 만상(萬象)을 구비한 그의 시는 당시의 소단(騷壇)이 온통 송시(宋詩)를 배우고 있을 때 한시(漢詩)를 우리시로 정착시키어 단연 그 정종(正宗)으로 군림하였다. 때문에 이덕무(李德懋)는 그의 시를 이천년래(二千年來) 동방(東方)의 명가(名家)라 했으며, 김택영(金澤榮)은 조선 삼천년(三千年)의 제일대가(第一大家)라 했던 것이다.
문(文)에 있어서도 그는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말한 그대로, 사육대우(四六對偶)를 오로지 하던 당시의 풍상(風尙)에서 빠져 나와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修)의 고문(古文)과 신사(新辭)를 제창하여 세상을 크게 울렸다.
고려중기에 이르러 기사문(記事文)에 뛰어난 김부식(金富軾)이 그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통하여 고문(古文)의 선구로서 풍후박고(豊厚樸古)한 서한(西漢)의 산문(散文)을 시범했으나, 이는 당송(唐宋)의 고문(古文)과는 스스로 구별되는 것이다. 익재(益齋)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목은(牧隱)이 정주(程朱)의 학(學)을 존숭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주소(注疏) 어록(語錄)의 기미가 많았다고 하지만, 익재(益齋)의 영향을 받은 목은(牧隱)의 문장은 아래로 양촌(陽村) 권근(權近)ㆍ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등에 상전(相傳)된 것이 사실이고 보면, 익재(益齋)가 후세의 문장가에 대하여 개산(開山)의 공을 끼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구한말(舊韓末)에 김택영(金澤榮)이 려한구가(麗ㆍ韓九家)의 문(文)을 선정할 때 고려에서 김부식(金富軾)과 이제현(李齊賢)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초명(初名)은 지공(之公),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현달(顯達)한 문학세가(文學世家)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20대에 백이정(白頤正)을 사사(事師)하여 남보다 먼저 정주(程朱)의 학(學)을 배웠다.
그러나 28세 때, 원(元) 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부름을 받아 연경(燕京)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곳 만권당(萬卷堂)에서 충선왕(忠宣王)을 모시면서 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사귀어 학문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2년 뒤에 왕명(王命)으로 남촉(南蜀)에 주유(周遊)하게 되자 그는 가는 곳마다 시를 남기어 시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33세 때에는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강남(江南, 浙江地方)으로 두루 여행을 하였으며 35세가 되던 해에는 토번(吐蕃)으로 귀양간 충선왕(忠宣王)이 타사마(朶思馬)로 이배(移配)하게 되어 왕을 만나러 1만 5천리의 장정(長征)을 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그의 인간과 문학의 폭을 크게 넓힐 수 있었으며, 이덕무(李德懋)가 말한 바와 같이, 중국에서 우리 선인(先人)의 족적(足跡)이 이렇게 넓은 지역을 편답(遍踏)하기도 처음 있은 일이 되었으며, 그 성예(聲譽)를 중국에서 자자(藉藉)하게 한 것도 최치원(崔致遠) 이후 처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랜 동안의 중국 생활을 통하여 그는 중국의 음률과 사곡(詞曲)을 익혀, 그 이전에도 시도된 일이 없었고 이후에도 변변한 작품을 창작해 내지 못한 사(詞)의 작가가 되기도 했다.
충선왕(忠宣王)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은 그는 이후 오조(五朝)를 역사(歷仕)하는 동안 네 번이나 국상(國相)의 자리에 올라 안으로는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기에 정(精)과 성(誠)을 다했으며, 밖으로는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성신(誠信)으로 조정하여 고려왕조를 위기에서 구해 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임금이 인견(引見)을 청하면, 경사(經史)를 강론하고 치도(治道)를 진주(進奏)하여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러나 『고려사(高麗史)』에서 그를 가리켜 ‘성리(性理)의 학(學)을 즐기지 않은 까닭으로 정력(定力)이 없이 공맹(孔ㆍ孟)을 공설(空說)한다’고 한 것은 그가 불가(佛家)의 문자를 찬술(撰述)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폄척(貶斥)을 받은 것 같다.
이제현(李齊賢)의 모든 것은 그의 문생(門生) 목은(牧隱)이 그 묘지명(墓誌銘)에서 쓰고 있는 바와 같이 ‘이름이 온누리에 떨치고’, ‘도덕(道德)이 으뜸이요 문장의 정종(正宗)’이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현(李齊賢)의 시는 시문집(詩文集)인 『익재난고(益齋亂藁)』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각종 시선집(詩選集)에 50수 가까운 시편(詩篇)이 수록되어 있어 시가 정종(正宗)의 면모를 알아내는 데는 이로써도 충분하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보덕굴(普德窟)」(五絶), 「산중설야(山中雪夜)」(七絶)를 비롯하여 「팔월십칠일 방주향아미산(八月十七日 放舟向峨嵋山)」(七律), 「구요당(九曜堂)」(七絶), 「표모분(漂母墳)」(七絶), 「범려(范蠡)」(七絶), 「탁군(涿郡)」(七絶), 「업성(鄴城)」(七絶), 「황토점(黃土店)」(七律), 「민지(澠池)」(五古)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이것들은 대부분 재원(在元) 시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산중설야(山中雪夜)」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
紙被生寒佛燈暗 | 종이 이불 한기가 돌고 불등(佛燈)은 어두운데 |
沙彌一夜不鳴鐘 | 사미(沙彌)는 한밤 내내 종을 치지 않는다. |
應嗔宿客開門早 | 틀림없이 자던 손님 일찍 나간 것 꾸짖겠지만 |
要看庵前雪壓松 | 암자 앞에 눌린 소나무 보려 했을 뿐이로다. |
이 시는 일자(一字)의 허비(虛費)나 이완(弛緩)도 없이 마치 구슬을 꿰듯이 삼엄(森嚴)하게 조직되고 있어 문자 그대로 공묘(工妙)의 극치를 보게 하는 작품이다. 숙객(宿客)도 의례적인 숙빈(宿賓)이 아니라 가까운 거리를 느끼게 하는 소박한 숙객(宿客)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서거정(徐居正)의 『동인시화(東人詩話)』 권하(卷下) 5번이나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시평 98번에서 보면 이상은(李商隱)의 ‘鑪煙消盡寒燈晦, 童子開門雪滿松’에서 따온 것은 틀림없겠으나 최해(崔瀣)는 ‘익노(益老) 반생(半生)의 시법(詩法)이 이 시에서 다했다[益老半生詩法. 盡在此詩].’고 격찬했을 정도다.
이 밖에도 이제현(李齊賢)은 민간에서 유행하던 시속(時俗)의 노래들을 칠언(七言)으로 번역하고 이를 소악부(小樂府)라 하였다. 그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에 11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형식은 모두 칠절(七絶)로 되어 있다. 「처용가(處容歌)」ㆍ「서경별곡(西京別曲)」ㆍ「정과정곡(鄭瓜亭曲)」은 원가(原歌)가 전해지고 있으나 그밖의 「장암가(長巖歌)」ㆍ「거사련(居士戀)」ㆍ「제위보(濟危寶)」ㆍ「사리원(沙里院)」ㆍ「소년행(少年行)」ㆍ「오관산(五冠山)」은 실전(失傳) 가요이므로 이 소악부(小樂府)를 통하여 원가(原歌)의 내용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원가(原歌)가 전하고 있는 작품의 경우를 보면 한 노래의 전편(全篇)을 직역한 것이 아니고 그 정서를 살리기는 하되 정채(精彩)만 표현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소악부(小樂府)란 명호(名號)에 대해서도 아직 정론이 없다. 중국의 악부(樂府)에 대하여 우리나라 악부(樂府)란 뜻으로 사용한 것이라고도 하고【이우성(李佑成), 「고려말기(高麗末期)의 소악부(小樂府)」, 『한국한문학연구(韓國漢文學硏究) 1】 또는 단시형(短詩型)인 칠절(七絶)로 되어 있으므로 그 소시적(小詩的) 성격을 강조한 것이라고도 한다【이종찬(李鍾燦), 「소악부시고(小樂府試攷)」, 『동악어문논집(東岳語文論集)』 1 參照】 그러나 소악부(小樂府)란 명칭은 제양(齊梁) 시대에 이미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민간 노래를 지칭한 데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소시적(小詩的) 단형시(短型詩) 형태에 붙여진 것인지는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그 이름이 중국의 제양(齊梁) 시대에서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의 진술에서 보아 짐작할 수 있다.
詩歌自齊梁以來, 因爲文人模倣小樂府, 一步一步走向輕艷浮靡的風格. -장장궁(張長弓), 『중국문학사(中國文學史)』, p.121.
詩餘之興, 齊梁小樂府先之. -왕국유(王國維),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유대걸(劉大杰),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 p.505
但到了齊梁間之小樂府, 句法字數確能有一定的形式. -유대걸(劉大杰), 『중국문학발전사(中國文學發展史)』.
그러나 이것들은 제양(齊梁) 당시의 기록이나 구체적인 작품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인의 짐작에 의하여 임의로 붙인 것인지 의심은 남는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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