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색(李穡)의 박채불유(博採不遺)
이색(李穡, 1328 충숙왕15~1396 태조5, 자 穎叔, 호 牧隱)의 문장(文章)은 그 폭이 넓을 대로 넓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定評)되어 있지만, 각체(各體)의 도처에서 명문(名文)을 양산하고 있는 그의 문장(文章)은 높은 곳도 없고 낮은 곳도 없다. 쫓거나 내닫는 성급함도 없이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말이 풍부하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말한 그대로 먹을수록 맛있고 배부르게 해준다.
『목은집(牧隱集)』의 문장(文章)은 그가 사거(死去)한 수백년 동안 그것을 헐뜯는 입놀림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세상을 울렸다. 문장(文章)을 대하는 풍상(風尙)이 달라진 조선중기 이후에 있어서도 그의 이름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한(秦漢) 이전의 고문(古文)을 주창한 간이(簡易) 최립(崔岦)도 목은(牧隱)의 문집을 보고서는, 우리나라 문장(文章)은 당연히 목은(牧隱)으로 으뜸을 삼아야 한다고 했으며, 자손을 위하는 자는 하필이면 한유(韓愈)나 유종원(柳宗元)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목은집(牧隱集)』을 읽는 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명(明)나라 사신(使臣) 허천사(許天使)가 와서 우리나라의 문집을 찾았을 때에도 기대승(奇大昇)이 이규보(李奎報)ㆍ김종직(金宗直)ㆍ서거정(徐居正)ㆍ목은(牧隱) 등의 문집을 그 앞에 내놓았지만 그 가운데서 유독 하나를 뽑은 것이 『목은집(牧隱集)』이라고 한다.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평을 가한 것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가장 심한 경우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 「식암집서(息菴集序)」에서 우리나라 문장(文章)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의 문장(文章)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셋이 있다. 얇고 거칠어서 절심(切深)하지 못하며, 야하고 속되어서 아려(雅麗)하지 못하며, 늘어놓고 난잡하여 간정(簡整)하지 못하다.
蓋嘗謂我東之文, 其不及中國者有三. 膚率而不能切深也, 俚俗而不能雅麗也, 冗靡而不能簡整也.
창강(滄江)은 이것이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을 가리키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에는 백화체(白話體, 語錄)가 많아 이후 200년 동안 문장(文章)이 모두 여기에서 병을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농암(農巖) 자신의 진술을 들어보면, 그는 『호곡시화(壺谷詩話)』의 목록에서 이규보(李奎報)의 문장(文章)을 으뜸이라고 한 남용익(南龍翼)의 주장을 일축하고, 문(文)에 있어서는 단연코 목은(牧隱)을 대가(大家)로 받들어야 한다고 실토하고 있다. 목은(牧隱)의 시에 있어서도, 속된 말이 많다는 뒷사람들의 비평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허균(許筠)이 말한 것처럼 시대의 풍상(風尙)이 달라졌을 때에는 오히려 목은(牧隱)의 평가에 보탬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목은(牧隱)의 문장(文章)은, 문(文)은 서한(西漢)을, 시(詩)는 건안체(建安體, 漢魏間의 詩體)를 좋아했다고도 하지만 목은(牧隱) 자신은 한유(韓愈)ㆍ구양수(歐陽修)가 나의 스승이라고 했다. 때문에 그의 문장(文章)에 대한 후대인의 평가도 시끄럽고 요란하며 쉽사리 한 군데로 모아지지 않았다.
특히 목은(牧隱)의 시는 중체(衆體)를 구비하여, 웅혼(雄渾)한가 하면 곱고 예쁘며, 준결(峻潔)한 것이 있는가 하면 호섬(豪贍)한 것이 있으며 엄중(嚴重)한 것도 있고 오심(奧深)한 것이 있어 전정(全鼎)을 맛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시에 대한 평가다.
이로써 보면 일찍이 서거정(徐居正)이, 웅준(雄峻)한 포은(圃隱)과 전아(典雅)한 양촌(陽村)과, 간결(簡潔)한 도은(陶隱)과 호매(豪邁)한 삼봉(三峯)도 모두 선생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 평가는 목은(牧隱)의 시세계를 가장 포괄적으로 파악한 최초의 발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목은시(牧隱詩)의 장처(長處)를 가장 감동적으로 지적한 것은 조선후기의 신위(申緯)가 아닌가 한다. 그는 「동인논시(東人論詩)」 3에서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과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를 비교하여 한마디로 ‘위장부전요조랑(偉丈夫前窈窕娘)’이라고 했다. 훤칠한 위장부(偉丈夫)의 모습은 문(文)에 있어서도 목은(牧隱)의 진면목일 것임에 틀림없다. 이는 바로 목은시(牧隱詩)의 ‘호방(豪放)’을 말한 것이다. 다만, 목은(牧隱)의 시(詩)에는 설명(說明)은 있지만 정감(情感)의 유로(流露)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그의 ‘호방(豪放)’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색(李穡)은 유명한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의 가계(家系)는 원래 한산(韓山)의 향리층이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중앙의 사대부로 진출하였다. 14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21세에 원(元)의 서울 연경(燕京)에 갔다. 이때 이미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머물러 벼슬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性理學)에 침잠했다.
재원(在元) 3년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길에 올랐으며 26세에 이제현(李齊賢)이 주시(主試)한 과거에 장원하여 이제현(李齊賢)과의 인연이 여기서 깊어지게 되었다. 그후 그는 다시 연경(燕京)에 가 한림원(翰林院)에 보임되었으나 다음해 그 곳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여 그가 배운 학문과 능력으로 조정에 봉사했다. 그리하여 그는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치면서 문신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이때에 김구용(金九容)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學官)으로 채용하여 유학(儒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문하(門下)에서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ㆍ변계량(卞季良)ㆍ이숭인(李崇仁) 등 일대의 명류(名流)들이 배출되었다.
조선왕조가 성립된 지 4년 만에 그는 태조(太祖)의 부름을 받아 친구의 예로써 그를 만났다고 하며 한산백(韓山伯)에 봉(封)함을 받았다. 이것은 그의 이름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결과가 되었으며 다음해 그는 여강(驪江)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출처 불명의 하사주(下賜酒)를 마시고 급사(急死)했다는 마지막 수수께끼를 남기고 갔다
목은(牧隱)의 시작(詩作)은 문집 밖에도 70여 수가 시선집(詩選集)에 전한다. 호방(豪放)한 그의 시풍 때문에 『청구풍아(靑丘風雅)』에서는 선발(選拔)에 인색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서도 「부벽루(浮碧樓)」(五律)와 「독두시(讀杜詩)」(七律)가 특히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기서는 「부벽루(浮碧樓)」만 보인다.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 | 어제 영명사(永明寺)를 지나다가 잠깐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네. |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 | 텅빈 성에는 한 조각 달이 걸려 있고 늙은 돌 위에 구름도 천추(千秋)나 되었네. |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 | 기린마(麒麟馬)는 떠나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天孫)은 어느 곳에서 노닐고 있는고? |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 | 난간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산은 푸르고 강물 절로 흐르네. |
훤칠한 이색(李穡)의 모습을 시로써 보여준 것이 이 작품이다.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시간의 시각화를 기도한 표현기법에서도 크게 성공하고 있다.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지막 미련(尾聯)에 가서 자신도 모르게 두둥실 허공으로 날아가는 느낌이다. 허균(許筠)은 『성수시화(惺叟詩話)』 13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조식(雕飾)도 아니하고 탐색(探索)도 하지 않았는데 우연히도 궁상(宮商)에 합한다고 하여 성률(聲律)에 이르기까지 관심을 보이었다. 그러나 이 「부벽루(浮碧樓)」에서 부벽루(浮碧樓)는 그의 의상(意象)을 이끌어내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을 뿐 결코 묘사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부벽루를 지나가다가 지나간 역사를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부벽루는 회고적(懷古的)인 감상을 노래하게 한 매개물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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