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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 22. 실낙원의 비가 - 2.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미학, 22. 실낙원의 비가 - 2.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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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현실의 억압은 개체의 삶을 질식시킨다. 인간은 닫힌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반란을 꿈꾼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어떤 갈등도 없으며 모든 것이 조화롭고 충만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그렇듯이 슬프고, 인간은 그렇듯이 나약한 존재인가? 삶의 짙은 회의 속에서 시인들은 무의식의 저편에 저장된 언젠가 떠나온 곳, 잃어버린 낙원의 기억들을 떠올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완벽한 꿈의 세계이다.

 

유선시(遊仙詩)는 고대인이 꿈꾼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것은 아득한 은하수 저편 아홉 층의 하늘을 지나 있는 옥황상제가 거처하는 황금 궁전이거나 동해 너머 출렁이는 파도 속에서 거대한 여섯 마리 거북이가 등에 업고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상상의 섬 삼신산으로 나타난다. 아니면 서쪽 하늘 저편 아득한 그곳 하늘에 맞닿을 듯 솟아 있는 옥으로 된 곤륜산, 둘레엔 새의 깃털조차 가라앉아버린다는 약수(弱水)란 강물이 300리에 걸쳐 흐른다. 날개가 아니고는 접근조차 할 수 없다. 곤륜산 정상에는 요지(瑤池)란 연못이 있어 밤에 천상에서 신선들이 용이나 기림 또는 봉황을 타고 내려온다. 그곳의 주인 서왕모(西王母)가 주재하는 파티에 간다. 안주는 한 알을 먹으면 3,000년을 살 수 있다는 반도(蟠桃)1,000년쯤 너끈한 안기생(安期生)의 대추다 술은 옥()을 녹여 고은 경장(瓊漿) 또는 안개의 수분을 빚어 걸러낸 유하주(流霞酒). 입은 옷은 동해의 곱 빛깔 무지개 실을 자아지은 옷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지은 옷이라 바느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조희일(趙希逸, 1575~1638)은 이 요지의 잔치를 묘사한 요지연부(瑤池宴賦)를 남겼다. 그의 안내로 선계를 따라가 보자. 티끌세상을 버려두고 여덟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선계에 이른 나는, 곤륜산 요지에 올라 아침엔 옥룡타(玉龍唾)를 마시고 저녁엔 금아탕(金鴉盪)에 목욕을 하며 신선들을 벗 삼아 노닌다. 이런 중에 청조(靑鳥)는 서왕모의 도착을 알린다. 상서로운 무지개가 걷히면 백은의 화려한 궁궐이 모습을 드러내고, 영롱한 햇살이 비치자 황금방(黃金牓)은 광채를 말한다. 그녀가 요대(瑤臺)에서의 향기로운 꿈에서 깨어나 운모(雲母) 커튼을 걷으면 삼각형으로 머리를 묶은 봉황은 칠보로 짠 학창의(鶴氅衣)를 가져오고, 얼룩무늬 기린을 타고 걸음을 재촉하면 채란(彩鸞)이 끄는 수레가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이를 타고 높이 올라 구름 깃발 나부끼는 곳에 도착한다. 빙설같이 흰 피부에 부용꽃 같은 수줍음을 머금고, 초승달 눈썹을 살짝 찌푸려 별 같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나를 맞이한다. 서왕모는 내가 이곳과 삼생의 묵은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며 요지 곁에 옥으로 만든 자리를 펴고, 잔치를 베풀어 용의 육포 안주와 봉황의 골수로 빚은 술을 권한다. 천년 반도를 따오고 아홉 번 찐 기장(杞醬)을 내온다. 앞에선 선녀들의 멋들어진 춤이 펼쳐지고 오색구름 감도는 저편에선 맑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계화(桂花)는 떨어져 온 천지가 향기롭고 화풍은 건 듯 불어 패옥소리는 쟁그랑거린다. 이 아니 황홀한가! 심의는 반도부(蟠桃賦)의 서두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悲生死之浮休兮 삶과 죽음 부질없음 슬퍼하면서
超塵寰以遠徂 티끌세상 벗어나 멀리 떠났네
跆上界之仙府兮 상게의 선부(仙府)까지 올라가서는
俯下土之積蘇 하토(下土)의 풀덤불을 굽어보았지
過瑤池以悵忘歸兮 요지를 지나서는 돌아옴도 잊으니
王母鉥余以啓途 왕모가 날 이끌고 길을 인도하였네
贐一顆之神核兮 한 알의 신령한 복숭아를 주는데
芳酷烈其誾誾 그 향기 은은하게 몹시도 짙었다오
漠處靜以咀嚼兮 가만히 받아서 씹어 삼키니
忽乎吾將返眞 문득 이 몸 진인으로 되돌아가서
紛仙仙而担撟兮 어지러이 두둥실 날아올라선
逴絶垠乎東溟 아득한 동해 바다 넘놀았다네

 

서왕모의 요지연에 참여하여 선도를 먹고 진인으로 되돌아가 티끌세상의 갈등을 훌훌 벗어던진 기쁨을 구가하는 대목이다. 이후 그는 선계의 당당한 일원이 되어 직접 여러 곳을 두루 소요하며 노닌다.

 

선계의 광경은 어떠한가. 앞의 요지연부(瑤池宴賦)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상상력이란 상상력은 모두 한데 모아 엮었다.

 

 

허난설헌 또한 선계인 광상산(廣桑山)에서 노니는 꿈을 깬 뒤 그곳 광경을 묘사했다.

 

 

을유년에 내가 상을 만나 외삼촌댁에 묵고 있을 때 일이다. 밤중 꿈에 바다 위의 산으로 둥실 날아올랐다. 산은 온통 구슬과 옥이었다. 뭇 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흰 옷과 푸른 구슬이 밝게 빛나 현란하여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무지개 구름이 그 위를 에워쌌는데 오색 빛깔이 곱고도 선명했다. 옥 샘물 몇 줄기가 벼랑 사이에서 쏟아지고, 콸콸 쏟아져 내리는 소리는 옥을 굴리는 것 같았다.

乙酉春, 余丁憂, 寓居于外舅家. 夜夢登海上山. 山皆瑤琳珉玉. 衆峯俱疊, 白璧靑熒明滅, 眩不可定視. 霱雲籠其上, 五彩姸鮮. 瓊泉數派, 瀉於崖石間, 激激作環玦聲.

 

스물 남짓 두 여인은 얼굴빛이 모두 빼어나게 고왔다. 하나는 자줏빛 노을 옷을 걸쳤고, 하나는 푸른 무지개 옷을 입었다. 손에는 모두 금색 호로병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와 내게 절을 올렸다. 굽이굽이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니 기화이초가 곳곳에 피었는데 이루다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난새와 학과 공작과 비취새가 옆으로 날며 춤을 추고, 숲 저편에선 온갖 향기가 진동하였다.

有二女年俱可二十許, 顏皆絶代. 一披紫霞襦, 一服翠霓衣. 手俱持金色葫蘆, 步屣輕躡, 揖余. 從澗曲而上, 奇卉異花, 羅生不可名. 鸞鶴孔翠, 翺舞左右, 衆香馚馥於林端.

 

마침내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동남쪽은 큰 바다라 하늘과 맞닿아 온통 파랬다. 붉은 해가 막 솟아오르니 물결이 해를 목욕시켰다. 봉우리 위 큰 연못은 아주 맑았다. 연꽃은 빛깔이 푸르고 잎이 컸고, 서리를 맞아 반나마 시들었다. 두 여인이 말했다. “이곳은 광상산이랍니다. 십주(十洲) 중에서도 으뜸이지요. 그대가 신선의 인연이 있는 까닭에 감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시를 지어 이를 기념치 않겠습니까.” 내가 사양하였으나 한사코 청하는 것이었다. 이에 절구 한 수를 읊조리자 두 여인은 박수를 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는 신선의 말씀이로군요.” 조금 있으려니 한 떨기 붉은 구름이 하늘 가운데로부터 내려와 봉우리 꼭대기에 걸리더니, 둥둥 북소리에 정신이 들어 깨어났다. 잠자리엔 아직도 연하(煙霞)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遂躋絶頂. 東南大海, 接天一碧. 紅日初昇, 波濤浴暈. 峯頭有大池湛泓. 蓮花色碧葉大被, 霜半褪. 二女曰: “此廣乘山也. 在十洲中第一. 君有仙緣, 故敢到此境, 盍爲詩紀之.” 余辭不獲已. 卽吟一絶, 二女拍掌軒渠曰: “星星仙語也.” 俄有一朶紅雲, 從天中下墜, 罩於峯頂, 擂鼓一響, 醒然而悟. 枕席猶有煙霞氣.

 

 

이 꿈이 깨고 나서 그녀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34구가 이랬다.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 서리 달 찬 속에서 붉게 떠지네.

 

이 시가 시참이 되어 스물일곱의 나이로 그녀는 천상 백옥루로 훌훌 올라가고 말았다.

 

그녀의 대표작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이다. 천상 광한전의 백옥루가 완공되어 쓴 상량문이다. 이 글의 선계 묘사는 더욱 황홀해서 정신이 아득해진다. 요지의 잔치를 묘사한 한 대목만 살짝 들여다보자.

 

 

선인 쌍성(雙城)은 나전 피리를 불고 안향(晏香)은 은쟁(銀箏)을 쳐서 균천(鈞天)의 우아한 곡조를 합주한다. 완화(婉華)는 해맑게 노래하고 비경(飛瓊)은 공교롭게 춤추어 놀랍도록 신령스런 소리를 빚어낸다. 용 머리에다 봉황의 골수로 담근 술을 따라, 학의 등에 기린의 육포로 만든 안주를 받들어 올리니, 구슬 돗자리에 옥방석은 아홉 갈래 등불에 빛이 흔들리고, 푸른 연밥과 얼음 같은 복숭아에는 여덟 바다의 그림자가 쟁반에 가득하다.

雙成鈿管晏香銀箏, 合鈞天之雅曲. 婉華淸歌飛瓊巧舞, 雜駭空之靈音. 龍頭瀉鳳髓之醪, 鶴背捧麟脯之饌, 琳筵玉席, 光搖九枝之燈, 碧藕氷桃, 盤盛八海之影.

 

 

용의 두개골로 만든 주전자에 봉황의 골수로 담근 술, 학의 등뼈로 만든 쟁반에 기린의 육포로 만든 안주. 어디 그뿐인가. 한 알만 먹으면 3,000년을 산다는 복숭아도 있다.

 

 

이수광(李晬光)기몽(記夢)이란 작품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紫宮半夜群仙會 자궁(紫宮)의 한밤중 신선들 모여들어
群仙色喜迎我拜 기쁜 낯빛 신선들 날 맞아 절 올리네
坐我堂中七寶床 방 안의 칠보상(七寶床)에 나를 앉게 하나니
怳然身入靑蓮界 아득히 이 몸이 청련계(靑蓮界)에 들었구나
餉我一杯船若湯 반야탕을 한 잔 따라 나를 마시게 하며
云是玉帝之瓊漿 옥제께서 드시는 경장(瓊漿)이라 일러주네
啜罷精神頓淸爽 마시자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洗盡十年塵土腸 진토에 찌든 속을 깨끗이 씻어준다
庭前有爐烟細起 뜰 앞의 화로에서 가는 연기 일더니만
令我了悟三生事 삼생의 온갖 일들 깨치게 하는구나
瑤空笙鶴覺來失 요대 허공 생() 불던 학, 깨어보니 간 곳 없고
萬里烟霞造夢裏 만 리 가득 안개 또한 꿈속의 일일레라
海上逢萊久無主 바다 위 봉래산엔 오랫동안 주인 없고
樂天偶餉人間苦 백낙천은 인간 괴롬 실컷 만나 겪었다오
唯須作急理歸笻 돌아갈 지팡이를 서둘러 만들리라
東風吹老三花樹 시든 삼화수를 봄바람이 불어가네

 

전형적인 몽유(夢遊) 구조에 의한 유선시(遊仙詩)이다. 꿈에 문득 자궁(紫宮)에 이끌려간 그는 여러 신선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옥례천(玉醴泉)의 경액(瓊液)을 달여 빚었다는 반야탕(般若湯)을 마시고 속세에 찌든 속이 깨끗해지는 환골탈태를 경험한다. 대궐 앞 화로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른 연기는 전생과 현생과 내세의 일을 모두 환히 보여주지 않는가. ! 내가 봉래산을 너무 오래 방치해두었던 것은 아닐까. 봉래산을 떠나와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가 겪었던 것은 신맛 나는 인간고(人間苦)’ 뿐이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원래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자.

 

선계의 형상은 현실에서의 억압이 역으로 투사되어 열린 세계로의 비상을 꿈꾼 결과다. 꿈은 무의식의 세계이다. 인간의 의식이 한계에 도달할 때 무의식이 열린다. 무의식의 세계는 원초적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상징은 좌절되었던 본능적 충동을 만족시키려는 욕구와 관련된다. 이러한 상징들은 꿈을 통해 신비한 세계를 열어 보임으로써 현실에서 상처받고 왜소해진 자아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소생시켜준다.

 

작자 미상, [신선 세계의 복숭아], 19세기

 

 

 

인용

목차

1. 풀잎 끝에 맺힌 이슬

2. 닫힌 세계 속의 열린 꿈

3. 구운몽, 적선의 노래

4. 이카로스의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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