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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한시미학산책, 허균 시론, 깨달음의 시학 - 6.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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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미학산책, 허균 시론, 깨달음의 시학 - 6.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②

건방진방랑자 2021. 12. 8.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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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

 

 

허균(許筠)의 시관도 송나라 때의 시를 비판하는 같은 기조 위에 놓여 있다.

 

 

시는 송나라에 이르러 없어졌다 할 만하다. 이른바 없어졌다는 것은 그 말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의 원리는 상세함을 다하고 에돌려 곡진히 하는 데 있지 않고,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지고 가리킴은 가까우나 지취(旨趣)는 먼 데에 있다. 이치의 길에 걸려들지 아니하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상승(上乘)이 되니 당나라 사람의 시가 왕왕 이에 가까웠다.

詩至於宋, 可謂亡矣. 所謂亡者, 非其言之亡也, 其理之亡也. 詩之理, 不在於詳盡婉曲, 而在於辭絶意續, 指近趣遠. 不涉理路, 不落言筌, 爲最上乘, 唐人之詩, 往往近之矣.

 

 

송오가시초서(宋五家詩鈔序)의 첫 대목이다. 송나라 때는 시를 가슴으로 쓰지 않고 머리로만 썼다. 누가 시를 한 편 쓰면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떠들어대지만, 실제 그들의 처방은 시를 짓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질곡이 될 뿐이다. 그들의 처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시적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죽은 언어의 시체일 뿐이다. 그들은 툭하면 이론의 잣대로 수술의 칼날을 들이댄다. 종양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작 환자는 죽고 만 꼴이다.

 

시의 원리는 그런데 있지 않다. 시는 시시콜콜히 다 말하는데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기, 언어의 길은 이미 끊어졌는데도 의미는 이어지며, 가까운 주변의 일을 말했는데도 생각은 저 먼 하늘 구름 저편에 떠돌게 하는 것, 이것이 시의 언어이다. ‘불섭리로 불락언전(不涉理路, 不落言筌)’ 즉 이치의 길에 떨어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걸려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은 엄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하는가? 소질만 타고나면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문장이 비록 작은 재주라고는 하지만 학력(學力)과 식견, 그리고 공정(功程)이 없이는 지극한 데로 이를 수가 없다. 이르는 바에 비록 크고 작고, 높고 낮음은 있지만 그 오묘함에 이르기는 한 가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 것에 널리 통하지 못한 까닭에 학력이 없고, 스승에게 나아가지 않아서 식견이 없으며, 온축하여 익히지 않으므로 공정(功程)이 없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서도 망령되이 스스로 옛 사람을 뛰어넘어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나는 감히 믿지 못하겠다.

文章雖曰小技, 無學力無識見無功, 不可臻其極. 所瑧雖有大小高下, 及其妙則一也. 我東人不博古, 故無學力, 不就師, 故無識見, 不溫習, 故無功程. 無此三者, 而妄自標榜, 以爲可軼古人名後世, 吾不敢信也.

 

 

답이생서(答李生書)의 한 구절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학력과 식견, 공정(功程)이 그것이다. 옛 것을 널리 통하여 익히는 데서 학력은 갖추어진다. 좋은 시를 쓰려면 선배들의 시를 많이 읽고 음미해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 배우는 속에서 비로소 식견이 생겨난다.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 자칫 자신의 이명(耳鳴)에 현혹되기 쉽다. 제게는 비록 아름다운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자칫 자신의 코골기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남들은 다 보는 단점도 정작 저 자신만은 종내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선에 빠지고 아집에 빠진다. 학력이 있고 식견을 갖추었어도, 끊임없는 습작과 퇴고가 없이는 공정(功程)을 이룰 수 없다.

 

앞선 이의 성취를 널리 익혀 통하는 학력, 훌륭한 스승을 통해 얻는 식견, 배워 익히는 한편으로 부단히 습작하는 공정, 이 세 가지는 옛 사람을 뛰어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시가 비록 별도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라 해도, 노력 없이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용

목차

한국한시사

1. 조선의 문제아

2. 개성론: 정신은 배우되 표현방식은 배우지 않는다

3. 개성론: 정신은 배우되 표현방식은 배우지 않는다

4. 표현론: 입의(立意)명어(命語)점철성금(點鐵成金)

5.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

6.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

7. 좌절된 꿈을 아로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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