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점철성금(點鐵成金)하는 표현의 묘를 통해 전달된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목소리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점철성금하는 표현의 묘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이 글의 세 번째 화두는 ‘묘오론(妙悟論)’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이론을 많이 알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의 깨달음은 그런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
권필이 이름과 지위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지 못한데다가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 봄을 가지고 그를 천하게 여기지만, 옛날에 태어나게 했더라면 사람들이 그를 우러름이 어찌 다만 김종직 정도일 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권필이 학력이 적고 원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마땅히 김종직에게 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하나, 이는 더더욱 시도(詩道)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으니 이치와는 관계된 것이 아니고,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으니 글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천기(天機)를 희롱하고 오묘한 조화를 빼앗는 즈음에 신(神)이 빼어나고 울림이 맑으며 격조(格調)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은 것이 가장 상승(上乘)이 된다. 저가 학문의 온축(蘊蓄)이 비록 풍부하여도 비유하자면 교종(敎宗)에서 점수(漸修)를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히 선종(禪宗)의 임제(臨濟) 이상의 지위를 바랄 수 있겠는가.
汝章名位不能動人, 而世以目見賤之. 使其生於前古, 則人之仰之, 奚啻佔畢乎? 或以汝章少學力乏元氣, 當輸佔畢一着, 是尤不知詩道者. 詩有別趣, 非關理也; 詩有別材, 非關書也. 唯其於弄天機奪玄造之際, 神逸響亮, 格越思淵爲最上乘. 彼蘊蓄雖富, 譬猶談敎漸門, 其敢望臨濟以上位耶?
「석주시고서(石洲小稿序)」에서 권필(權韠)과 김종직(金宗直)을 비교한 대목이다. 권필은 당대의 시인이고, 김종직은 이미 이름난 전대의 시인이다. 김종직은 이름과 지위가 높았고, 권필은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또 김종직은 학문이 높아 밑바탕의 울력이 있었으나 권필은 별반 그렇지도 못했다. 이 몇 가지 드러난 사실로만 볼 때, 김종직이 권필보다 훨씬 더 우수한 시인임에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잘라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야말로 시도(詩道)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시론(詩論)에 해박하다하여 그의 시가 좋은 것이 아니다. 학력이 높다 해서 시 쓰는 능력도 높아지지는 않는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고, 별도의 재주가 있다. 관건은 사물과 만나는 접점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그 오묘한 떨림을 포착하는 정신의 투명함과 섬세함에 있을 뿐이다. 불경을 많이 공부했다하여 저마다 고승대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닦아 수행하다보면 대각(大覺)의 길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거울이 되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점수(漸修)의 노력만으로는 마침내 돈오(頓悟)의 한 소식을 깨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의 세계이다.
그런데 “시유별취 비관리야 시유별재 비관서야(詩有別趣, 非關理也; 詩有別材, 非關書也)”는 허균(許筠) 자신의 말이 아니라 송나라의 비평가 엄우嚴羽가 그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한 말이다. 엄우는 성율(聲律)의 격식만을 추구했던 당대 강서시풍(江西詩風)의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허균(許筠)의 시관도 송나라 때의 시를 비판하는 같은 기조 위에 놓여 있다.
시는 송나라에 이르러 없어졌다 할 만하다. 이른바 없어졌다는 것은 그 말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의 원리는 상세함을 다하고 에돌려 곡진히 하는 데 있지 않고,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지고 가리킴은 가까우나 지취(旨趣)는 먼 데에 있다. 이치의 길에 걸려들지 아니하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상승(上乘)이 되니 당나라 사람의 시가 왕왕 이에 가까웠다.
詩至於宋, 可謂亡矣. 所謂亡者, 非其言之亡也, 其理之亡也. 詩之理, 不在於詳盡婉曲, 而在於辭絶意續, 指近趣遠. 不涉理路, 不落言筌, 爲最上乘, 唐人之詩, 往往近之矣.
「송오가시초서(宋五家詩鈔序)」의 첫 대목이다. 송나라 때는 시를 가슴으로 쓰지 않고 머리로만 썼다. 누가 시를 한 편 쓰면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떠들어대지만, 실제 그들의 처방은 시를 짓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질곡이 될 뿐이다. 그들의 처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시적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죽은 언어’의 시체일 뿐이다. 그들은 툭하면 이론의 잣대로 수술의 칼날을 들이댄다. 종양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작 환자는 죽고 만 꼴이다.
시의 원리는 그런데 있지 않다. 시는 시시콜콜히 다 말하는데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기, 언어의 길은 이미 끊어졌는데도 의미는 이어지며, 가까운 주변의 일을 말했는데도 생각은 저 먼 하늘 구름 저편에 떠돌게 하는 것, 이것이 시의 언어이다. ‘불섭리로 불락언전(不涉理路, 不落言筌)’ 즉 이치의 길에 떨어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걸려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은 엄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하는가? 소질만 타고나면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문장이 비록 작은 재주라고는 하지만 학력(學力)과 식견, 그리고 공정(功程)이 없이는 지극한 데로 이를 수가 없다. 이르는 바에 비록 크고 작고, 높고 낮음은 있지만 그 오묘함에 이르기는 한 가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 것에 널리 통하지 못한 까닭에 학력이 없고, 스승에게 나아가지 않아서 식견이 없으며, 온축하여 익히지 않으므로 공정(功程)이 없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서도 망령되이 스스로 옛 사람을 뛰어넘어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나는 감히 믿지 못하겠다.
文章雖曰小技, 無學力無識見無功, 不可臻其極. 所瑧雖有大小高下, 及其妙則一也. 我東人不博古, 故無學力, 不就師, 故無識見, 不溫習, 故無功程. 無此三者, 而妄自標榜, 以爲可軼古人名後世, 吾不敢信也.
「답이생서(答李生書)」의 한 구절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학력과 식견, 공정(功程)이 그것이다. 옛 것을 널리 통하여 익히는 데서 학력은 갖추어진다. 좋은 시를 쓰려면 선배들의 시를 많이 읽고 음미해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 배우는 속에서 비로소 식견이 생겨난다.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 자칫 자신의 이명(耳鳴)에 현혹되기 쉽다. 제게는 비록 아름다운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자칫 자신의 코골기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남들은 다 보는 단점도 정작 저 자신만은 종내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선에 빠지고 아집에 빠진다. 학력이 있고 식견을 갖추었어도, 끊임없는 습작과 퇴고가 없이는 공정(功程)을 이룰 수 없다.
앞선 이의 성취를 널리 익혀 통하는 학력, 훌륭한 스승을 통해 얻는 식견, 배워 익히는 한편으로 부단히 습작하는 공정, 이 세 가지는 옛 사람을 뛰어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시가 비록 별도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라 해도, 노력 없이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용
1. 조선의 문제아
5. 좌절된 꿈을 아로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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