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허균 시론, 깨달음의 시학
1. 조선의 문제아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 그의 이름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그는 국문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면서, 『성수시화(惺叟詩話)』ㆍ『학산초담(鶴山樵談)』 등의 시화를 엮은 당대 최고의 비평가였다. 그를 ‘천지간(天地間)의 일괴물(一怪物)’이라고 폄하하던 사람조차도 시를 보는 그의 안목만은 높이 인정하였다. 역대로 가장 훌륭한 엔솔로지(anthology)라는 평가를 들은 『국조시산(國朝詩刪)』을 엮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다채로운 지적 편력을 거쳐, 당대에 성행했던 도교와 내단 수련 방면에도 정심한 이론과 실천을 보였다. 남궁두와 송천옹, 그리고 유형진 등 당대에 이름난 도류(道流)들과 교유하였고, 단학(丹學) 이론에도 밝았다. 스스로 100상자가 넘는 불교 경전을 읽었다고 적고 있을 만큼 불교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다. 이밖에 위로 제자백가에서 아래로 명나라 당대 대가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과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 없었을 정도였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주의자
그는 활달한 자유주의자였다. 사회가 금기시하는 터부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자각된 민중의 무서운 힘을 역설한 「호민론(豪民論)」은 오늘날 읽어봐도 진보적이다. 그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홍길동전」을 「호민론」과 관련지어 이해하고 싶어 하는 시각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아침마다 승려의 복장을 하고 불전에 분향하였다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던 일도 있었다. 서얼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였다. 그에게 시를 가르쳐 준 스승 이달(李達)이 서얼이었고, 훗날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역모 사건도 이른바 강변칠우(江邊七友)로 불리는 서자들과의 결사가 빌미가 되었다. 그리고 끝내는 역적으로 몰려 세상을 마쳤다.
그는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그 때문에 검속함이 부족하고 교활하다는 비방을 늘 받았다. 실제로 벼슬길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은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을 저질러 귀양 간 일도 있었다. 그 뛰어난 기억력을 살려 누이인 허난설헌의 시집을 엮으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시를 슬쩍슬쩍 끼워 넣었다가 정작 중국에서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최근 확인한 바로 가공의 인물을 동원하여 우리나라 명산 동천을 기록한 도교적 산수기록인 『동국명산동천지(東國名山洞天志)』란 책을 지었던 것도 바로 그였다. 허균은 무어라 한 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허균(許筠)이 활동했던 선조 광해연간은 훗날 목릉성제(穆陵盛際)로 일컬어질 정도로 문예적 역량이 극성했던 시기였다. 삶의 진실과 정감 어린 서정을 중시하는 ‘시필성당 문필진한(詩必盛唐, 文必秦漢)’의 복고적 문학 주장이 전면에 부상하여, 이전 성율(聲律)과 격식을 중시하던 강서시풍(江西詩風)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족출(簇出)한 재재다사들에 의해 창작과 비평 양면에서 새로운 시풍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실험되고 또 실천되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허균이 있었다.
2. 개성론: 정신은 배우되 표현방식은 배우지 않는다
이제 허균의 문학 주장을 몇 가지로 대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첫 번째 화두는 ‘개성론’이다.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시필성당(詩必盛唐)이라하여 그 지향을 성당(盛唐)의 시에 두고 있기는 해도, 지금 내가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 사람으로 시 짓는 자들은 문득 말하기를 “나는 성당(盛唐)이다, 나는 이두(李杜)다, 나는 육조(六朝)다, 나는 한위(漢魏)다”라고 하여, 스스로 서로들 내세우며 모두 문단의 맹주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는 그 말을 표절하고 어떤 이는 그 뜻을 답습하여 모두들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다시 얽으면서도 스스로 크다고 뽐냄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야랑왕(夜郞王)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明人作詩者, 輒曰: “吾盛唐也, 吾李ㆍ杜也, 吾六朝也, 吾漢魏也.” 自相標榜, 皆以爲可主文盟. 以余觀之, 或剽其語, 或襲其意, 俱不免屋下架屋, 而誇以自大, 其不幾於夜郞王耶.
「명사가시선서(明四家詩選序)」의 말이다. ‘옥하가옥(屋下架屋)’ 즉 남의 집 아래에 다시 제 집을 짓고는 제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것이 오늘날 시를 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이다. 야랑(夜郞)은 오랑캐의 나라 이름인데 그 나라 왕은 스스로 제 나라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였다. 남의 흉내 잘 내는 것만으로야 어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야랑왕의 착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시류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조금이라도 유행에 뒤떨어지면 어찌하나를 걱정할 뿐, 무엇을 노래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렇고 그런, 모두 고만고만한 시만 있을 뿐이다.
오늘에 시를 하는 자들이, 한위(漢魏)ㆍ육조(六朝)를 높이 보고, 당나라 개천(開天)ㆍ천력(大曆) 연간의 것을 그 다음으로 치며, 가장 낮은 것으로 소식(蘇軾)과 진사도(陳師道)를 일컫는다. 모두들 스스로 그 지위를 빼앗을 수 있다고 말들 하지만, 이는 망령된 말일 뿐이다. 그 말과 뜻을 주워 모아 답습하고 표절하면서 스스로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시도(詩道)를 말할 수 있겠는가?
今之詩者, 高則漢魏六朝, 次則開天大曆, 最下者乃稱蘇ㆍ陳, 咸自謂可奪其位也, 斯妄也已. 是不過掇拾其語意, 蹈襲剽盜以自衒者, 烏足語詩道也哉.
「시변(詩辨)」의 이 말도 같은 취지에서 나왔다. 한위(漢魏)ㆍ육조(六朝)는커녕 소식(蘇軾)과 진사도(陳師道)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할 위인들이, 성당(盛唐)의 시만을 으뜸이라 하면서 그 나머지는 우습게 본다. 그네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옛 사람의 말과 뜻을 주워 모아 흉내내고 표절하는 일뿐이다. 그러면서 어찌 그들보다 더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 하는가? 이런 자들과는 결단코 더불어 시도(詩道)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옹(翁)께서는 저의 근체시가 순숙(純熟) 엄진(嚴縝)하여 성당(盛唐)의 시가 아니라 하며, 물리쳐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유독 고시(古詩)만은 좋아 안연지(顔延之)와 사령운(謝靈運)의 풍격이 있다 하십니다. 이는 옹께서 얽매여 변화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려. 저의 고시(古詩)가 비록 옛스럽기는 해도, 이는 책상에 앉아 진짜처럼 흉내낸 것일 뿐이니, 남의 집 아래 집을 얽은 것이라, 어찌 족히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핍진하지는 않아도 절로 저 자신만의 조화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고 송나라 시와 비슷해짐을 염려합니다. 도리어 남들이 ‘허자(許子)의 시(詩)’라고 말하게 하고 싶답니다. 너무 외람된 것일까요?
翁以僕近體爲純熟嚴縝, 不涉盛唐, 斥而不御, 獨善古詩爲顏ㆍ謝風格, 是翁膠不知變也. 古詩雖古, 是臨榻逼眞而已, 屋下架屋, 何足貴乎. 近體雖不逼眞, 自有我造化, 吾則懼其似唐似宋, 而欲人曰: “許子之詩也.” 毋乃濫乎.
「여이손곡(與李蓀谷)」, 즉 이달에게 보낸 편지의 전문이다. 이에 앞서 이달은 허균(許筠)이 보낸 시고(詩稿)를 보고, 고시는 육조(六朝)의 풍격이 있어 좋은데 근체시에는 왜 성당(盛唐)과 핍진함이 없느냐고 나무란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그러자 허균은 고시가 안연지나 사령운과 핍진한 것은 ‘옥하가옥(屋下架屋)’일 뿐이니 거짓 흉내에 지나지 않고, 근체시가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와 같지 않은 것은 내 자신만의 조화(造化)를 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답장하였던 것이다.
허균(許筠)의 ‘허자지시(許子之詩)’의 선언은 우리 비평사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장면이다. 뒷날 정약용(丁若鏞)이 ‘아시조선인 감작조선시(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즉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고 한 ‘조선시 선언’도 그 선성(先聲)이 허균에 있었음을 본다. 인간의 감정이 아무리 보편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는 해도,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람이 다른데, 어찌 옛 사람과 똑같이 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진정으로 옛 사람과 똑같이 되려거든 옛 사람과 달라져야 한다.
뒷날에 지금의 글을 봄이 어찌 지금 우리가 앞의 몇 분의 글을 봄과 같지 않겠는가? 하물며 거침없고 아득하게 말하는 것은 크게 되고자 함이요, 옛 것을 본받지 않는 것은 또한 홀로 우뚝 서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말 많음이 되리요. 그대는 그 몇 분의 글을 자세히 보았는가? 좌씨는 절로 좌씨가 되고, 장자는 절로 장자가 되며, 사마천과 반고는 절로 사마천과 반고가 되고,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은 또한 절로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 되어, 서로 답습치 않고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덧짓고서 도둑질해 끌어낸다는 나무람을 답습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後之視今文, 安知不如今之視數公文耶? 況滔滔莽莽, 正欲爲大, 而不銓古者, 亦欲其獨立, 奚飫爲? 子詳見之數公乎? 左氏自爲左氏; 莊子自爲莊子; 遷固自爲遷固; 愈․宗元․脩․軾亦自爲愈․宗元․脩․軾, 不相蹈襲, 各成一家. 僕之所願, 願學此焉, 恥向人屋下架屋, 蹈竊鉤之誚也.
「문설(文說)」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도 ‘옥하가옥(屋下架屋)’이란 표현이 나온다. 벌써 세 번째(明四家詩選序, 與李蓀谷)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명하다. 나는 옛 사람의 글에서 배운다. 그렇지만 내가 옛 글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기승전결의 문장구성이나, 편장자구(篇章字句)의 표현방식이 아니다. 좌씨는 좌씨가 되고, 장자(莊子)는 장자가 되며, 한유(韓愈)가 구양수(歐陽修)와는 다르고, 유종원(柳宗元)이 소식이 될 수 없게 하는 정신, 서로 답습치 않고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일가를 이루는 길, 나는 그들의 글에서 이것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허균(許筠)의 이 말은 한유(韓愈)의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옛 글을 본받되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그 표현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겉모습이 같다고 해서 내가 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정신의 실질, 그 속에 담겨진 삶의 진실을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지역에 따라 차이나며, 사람마다 같지 않은 것이니, 내가 두보(杜甫)가 아니고, 내가 소식이 아닐진대, 그의 흉내만으로 그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한유(韓愈)는 이를 달리 ‘동곡이곡(同工異曲)’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공교로움은 한 가지인데, 곡조는 다르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면 그 표현하는 방법은 갖가지이지만, 그 원리는 한 가지이다. 고수(高手)는 결코 획일화되지 않는다. 상동구이(尙同求異), 그들과 같아지기를 추구하려거든 그들과 달라져야만 한다. 같아지려고만 해서는 결코 같아질 수가 없다.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앞선 시인들의 망령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그들의 울타리 아래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빈 들판 위에 네 기둥을 세워라.
3. 표현론: 입의(立意) → 명어(命語) → 점철성금(點鐵成金)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 편의 시 속에 나만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을까? 이글에서 다루려는 두 번째 화두는 ‘표현론’이다. 허균은 「시변(詩辨)」에서 그 과정과 단계를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먼저 뜻을 세움에 나아가고 그 다음으로 말을 엮는 것을 바르게 하여, 구절이 살아 있고 글자가 원숙하며, 소리가 맑고 박자가 긴밀해야 한다. 그리고 소재를 취해 와서 엮되 놓여야 할 자리에 놓아두고 빛깔로 꾸미지 아니하며, 두드리면 쇳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고 가까이 보면 화려한 듯하여, 이를 눌러 깊이 잠기게 하고 높이 올려 솟구쳐 내달리게 한다. 시상(詩想)을 닫는 것은 우아하면서도 굳세게 하고, 여는 것은 호방하고 시원스레 하여, 이를 펼치면 시상이 넘쳐흘러 읽는 이를 고무시켜야 한다. 쇠를 써서 금이 되게 하고 진부한 것을 변화하여 신선하게 만들어야 한다. 평평하고 담담하면서도 얕고 속된 데로 흘러서는 안 되며, 기이하고 옛스럽더라도 괴벽한 것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형상을 노래하되 그 사물의 모양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 서술하더라도 성률에 병통이 없어야 한다. 아름답게 꾸미더라도 이치를 손상하지 않고, 의논을 펼치더라도 엉기지 않아야 한다. 비유가 깊은 것은 사물의 이치와 통하며, 용사가 공교로운 것은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 같아야 한다. 작품이 이루어지면 격조가 드러나 혼연(渾然)히 지적할 수가 없고, 말 밖으로 기운이 솟아나 호연(浩然)하게 꺾을 수가 없다. 이를 다 갖춘 뒤에 내놓는다면 시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先趣立意, 次格命語, 句活字圓, 音亮節緊, 而取材以緯之, 不犯正位, 不着色相. 叩之鏗如, 卽之絢如, 抑之而淵深, 高之而騰踔, 闔而雅徤, 闢而豪縱, 放之而淋漓鼓舞. 用鐵如金, 化腐爲鮮, 平澹不流於淺俗, 奇古不隣於怪癖, 詠象不泥於物類, 鋪敍不病於聲律, 綺麗不傷理, 論議不粘皮. 比興深者通物理, 用事工者如己出. 格見於篇成, 渾然不可鐫, 氣出於外言, 浩然不可屈. 盡是而出之, 則可謂之詩也.
시짓기의 출발은 ‘입의(立意)’에 있다. 무심히 지나치던 사물이 설레듯 내게 다가와 하나의 의미로 맺힌다. 저 사물은 내게 무엇을 말하라 하는 것인가? 무정한 것이 오늘 내게 왜 유정하게 느껴지는가? 입의(立意)란 한 편의 시에서 시인이 말하고 싶어 하는 궁극점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또렷하기도 하고, 막상 모호하다가 점점 형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혹 끝내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생각의 덩어리인 채로 남아 있을 때도 있다.
입의(立意)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명어(命語)’의 차례이다.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은 생각이 아니다. 살아있는 언어로 구상화될 때 그것은 비로소 하나의 의미가 된다. 시는 리듬의 언어이니, 그저 의미의 나열로만 되지 않고 음절의 조화가 덧붙여져야 한다. 적절한 표현과 제재를 끌어오고,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것들을 배치하며, 쓸데없는 꾸밈으로 감정의 진솔함을 잃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공연히 시선을 놀라게 하는 아름다운 표현에 집착하느라, 정작 제 하려는 말을 놓쳐서도 안 된다.
점철성금(點鐵成金), 쇠를 쳐서 금을 만들어라. 훌륭한 시는 일상 속에 있다. 진부한 일상 속에서 신선한 의미의 샘물을 길어 올려라. 남들이 보면서도 못 보는 사실, 늘 마주하면서도 간과해버리고 마는 사물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 사물의 비의(秘儀)는 높고 고원한 것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말똥과 소오줌 속에 있고, 길 위에 구르는 자갈돌과 기왓장 속에 있다. 깨어 있는 시인의 눈은 그것을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좋은 시는 평범 속에 비범을 담고 있다. 일상에서 끌어왔다 해서 천박하지도 속되지도 않다. 때로 기이한 것을 끌어와도 괴벽한 데로 흐르는 법이 없다. 그 사물을 노래하되 그 외양에 집착하여 얽매이지 않는다. 길게 설명하는 듯싶어도 언어의 가락은 그대로 살아있다. 보다 나은 표현을 위한 배려가 말하고자 하는 이치를 손상시키지 않고, 더욱이 자신의 이념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러할 때라야 시는 비로소 나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격조가 일렁여 물결을 이루고, 언어의 밖으로 호연한 기상이 솟아나 가슴으로 느낄 뿐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 시를 읽는 이들이 시를 쓴 나의 마음자리를 알고, 나의 사람됨을 알게 되는 시, 이러한 경계가 바로 허균(許筠)이 추구했던 ‘허자지시(許子之詩)’의 궁극적 도달점이었다.
4. 묘오론: 학력과 식견과 공정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점철성금(點鐵成金)하는 표현의 묘를 통해 전달된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목소리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점철성금하는 표현의 묘는 어떻게 획득되는가? 이 글의 세 번째 화두는 ‘묘오론(妙悟論)’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깨달음은 이론을 많이 알거나, 학력이 높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의 깨달음은 그런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
권필이 이름과 지위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지 못한데다가 세상 사람들이 눈으로 봄을 가지고 그를 천하게 여기지만, 옛날에 태어나게 했더라면 사람들이 그를 우러름이 어찌 다만 김종직 정도일 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권필이 학력이 적고 원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마땅히 김종직에게 한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하나, 이는 더더욱 시도(詩道)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으니 이치와는 관계된 것이 아니고, 시에는 별도의 재주가 있으니 글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오직 그 천기(天機)를 희롱하고 오묘한 조화를 빼앗는 즈음에 신(神)이 빼어나고 울림이 맑으며 격조(格調)가 뛰어나고 생각이 깊은 것이 가장 상승(上乘)이 된다. 저가 학문의 온축(蘊蓄)이 비록 풍부하여도 비유하자면 교종(敎宗)에서 점수(漸修)를 말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감히 선종(禪宗)의 임제(臨濟) 이상의 지위를 바랄 수 있겠는가.
汝章名位不能動人, 而世以目見賤之. 使其生於前古, 則人之仰之, 奚啻佔畢乎? 或以汝章少學力乏元氣, 當輸佔畢一着, 是尤不知詩道者. 詩有別趣, 非關理也; 詩有別材, 非關書也. 唯其於弄天機奪玄造之際, 神逸響亮, 格越思淵爲最上乘. 彼蘊蓄雖富, 譬猶談敎漸門, 其敢望臨濟以上位耶?
「석주시고서(石洲小稿序)」에서 권필(權韠)과 김종직(金宗直)을 비교한 대목이다. 권필은 당대의 시인이고, 김종직은 이미 이름난 전대의 시인이다. 김종직은 이름과 지위가 높았고, 권필은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또 김종직은 학문이 높아 밑바탕의 울력이 있었으나 권필은 별반 그렇지도 못했다. 이 몇 가지 드러난 사실로만 볼 때, 김종직이 권필보다 훨씬 더 우수한 시인임에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허균(許筠)은 잘라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자야말로 시도(詩道)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시론(詩論)에 해박하다하여 그의 시가 좋은 것이 아니다. 학력이 높다 해서 시 쓰는 능력도 높아지지는 않는다. 시에는 별도의 지취(旨趣)가 있고, 별도의 재주가 있다. 관건은 사물과 만나는 접점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그 오묘한 떨림을 포착하는 정신의 투명함과 섬세함에 있을 뿐이다. 불경을 많이 공부했다하여 저마다 고승대덕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으로 닦아 수행하다보면 대각(大覺)의 길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기왓장을 숫돌에 간다고 거울이 되는 법은 없지 않은가? 점수(漸修)의 노력만으로는 마침내 돈오(頓悟)의 한 소식을 깨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의 세계이다.
그런데 “시유별취 비관리야 시유별재 비관서야(詩有別趣, 非關理也; 詩有別材, 非關書也)”는 허균(許筠) 자신의 말이 아니라 송나라의 비평가 엄우嚴羽가 그의 『창랑시화(滄浪詩話)』에서 한 말이다. 엄우는 성율(聲律)의 격식만을 추구했던 당대 강서시풍(江西詩風)의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허균(許筠)의 시관도 송나라 때의 시를 비판하는 같은 기조 위에 놓여 있다.
시는 송나라에 이르러 없어졌다 할 만하다. 이른바 없어졌다는 것은 그 말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시의 원리는 상세함을 다하고 에돌려 곡진히 하는 데 있지 않고, 말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지고 가리킴은 가까우나 지취(旨趣)는 먼 데에 있다. 이치의 길에 걸려들지 아니하고 말의 통발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상승(上乘)이 되니 당나라 사람의 시가 왕왕 이에 가까웠다.
詩至於宋, 可謂亡矣. 所謂亡者, 非其言之亡也, 其理之亡也. 詩之理, 不在於詳盡婉曲, 而在於辭絶意續, 指近趣遠. 不涉理路, 不落言筌, 爲最上乘, 唐人之詩, 往往近之矣.
「송오가시초서(宋五家詩鈔序)」의 첫 대목이다. 송나라 때는 시를 가슴으로 쓰지 않고 머리로만 썼다. 누가 시를 한 편 쓰면 이러쿵저러쿵 쉴 새 없이 떠들어대지만, 실제 그들의 처방은 시를 짓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질곡이 될 뿐이다. 그들의 처방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시적 감흥을 일으키지 못하는 ‘죽은 언어’의 시체일 뿐이다. 그들은 툭하면 이론의 잣대로 수술의 칼날을 들이댄다. 종양을 제거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작 환자는 죽고 만 꼴이다.
시의 원리는 그런데 있지 않다. 시는 시시콜콜히 다 말하는데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고도 말하기, 언어의 길은 이미 끊어졌는데도 의미는 이어지며, 가까운 주변의 일을 말했는데도 생각은 저 먼 하늘 구름 저편에 떠돌게 하는 것, 이것이 시의 언어이다. ‘불섭리로 불락언전(不涉理路, 不落言筌)’ 즉 이치의 길에 떨어지지 않고 말의 통발에 걸려들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은 엄우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하는가? 소질만 타고나면 공부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문장이 비록 작은 재주라고는 하지만 학력(學力)과 식견, 그리고 공정(功程)이 없이는 지극한 데로 이를 수가 없다. 이르는 바에 비록 크고 작고, 높고 낮음은 있지만 그 오묘함에 이르기는 한 가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 것에 널리 통하지 못한 까닭에 학력이 없고, 스승에게 나아가지 않아서 식견이 없으며, 온축하여 익히지 않으므로 공정(功程)이 없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서도 망령되이 스스로 옛 사람을 뛰어넘어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나는 감히 믿지 못하겠다.
文章雖曰小技, 無學力無識見無功, 不可臻其極. 所瑧雖有大小高下, 及其妙則一也. 我東人不博古, 故無學力, 不就師, 故無識見, 不溫習, 故無功程. 無此三者, 而妄自標榜, 以爲可軼古人名後世, 吾不敢信也.
「답이생서(答李生書)」의 한 구절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학력과 식견, 공정(功程)이 그것이다. 옛 것을 널리 통하여 익히는 데서 학력은 갖추어진다. 좋은 시를 쓰려면 선배들의 시를 많이 읽고 음미해야 한다. 좋은 스승을 만나 배우는 속에서 비로소 식견이 생겨난다.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 자칫 자신의 이명(耳鳴)에 현혹되기 쉽다. 제게는 비록 아름다운 소리로 들릴지 몰라도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자칫 자신의 코골기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 남들은 다 보는 단점도 정작 저 자신만은 종내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선에 빠지고 아집에 빠진다. 학력이 있고 식견을 갖추었어도, 끊임없는 습작과 퇴고가 없이는 공정(功程)을 이룰 수 없다.
앞선 이의 성취를 널리 익혀 통하는 학력, 훌륭한 스승을 통해 얻는 식견, 배워 익히는 한편으로 부단히 습작하는 공정, 이 세 가지는 옛 사람을 뛰어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시가 비록 별도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라 해도, 노력 없이 그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5. 좌절된 꿈을 아로새기다
봄여름 한철을 울고 내처 휴식하는 꾀꼬리 종달새의 교앙(驕昻)함보다, 사철 지저귀는 까마귀 참새의 시끄러움만 가득 찬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시단의 표정이다. 앉을 자리조차 가리지 못하는 범용(凡庸)한 시 따위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지용의 말마따나 꽃이 봉오리를 머금고 꾀꼬리 목청이 제 철에 트이듯, 아기가 열 달을 차서 태반을 돌아 탄생하듯 온전히 제자리가 돌아 빠진 시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고금이 한 이치이다.
시의 위의(威儀)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어떻게 쓰는 시가 좋은 시인가? 어찌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는가? 허균(許筠)의 그때나 지금의 여기나 우리를 늘 곤혹스럽게 하는 물음들이다. 이 짧은 글에서는 허균의 시 창작과 관련된 논의만을 추려 간단히 살펴보았다. 오늘날 시인들에게도 음미할만한 것이 될지 모르겠다.
허균의 외가가 있던 강릉 경포대 옆 초당에서 바다를 옆에 끼고 30분 가량 차를 타고 올라가면 사천이란 곳이 있다. 그가 유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 뒷산의 이름은 교산(蛟山)인데 실제로는 야트막한 뒷동산에 지나지 않는다. 울창한 숲이 해를 가리고, 산의 등줄기가 구비구비 서려있어 교룡(蛟龍), 즉 이무기가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처음 이곳에서 나는 그의 시비(詩碑)를 찾다가 길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다. 이 교산(蛟山)은 허균의 호이기도 하다. 내게는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던 허균의 한 상징으로 읽힌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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