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개성론: 정신은 배우되 표현방식은 배우지 않는다
이제 허균의 문학 주장을 몇 가지로 대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그의 첫 번째 화두는 ‘개성론’이다. 시에는 자기만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시필성당(詩必盛唐)이라하여 그 지향을 성당(盛唐)의 시에 두고 있기는 해도, 지금 내가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는데 있다는 것이다.
명나라 사람으로 시 짓는 자들은 문득 말하기를 “나는 성당(盛唐)이다, 나는 이두(李杜)다, 나는 육조(六朝)다, 나는 한위(漢魏)다”라고 하여, 스스로 서로들 내세우며 모두 문단의 맹주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떤 이는 그 말을 표절하고 어떤 이는 그 뜻을 답습하여 모두들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다시 얽으면서도 스스로 크다고 뽐냄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야랑왕(夜郞王)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明人作詩者, 輒曰: “吾盛唐也, 吾李ㆍ杜也, 吾六朝也, 吾漢魏也.” 自相標榜, 皆以爲可主文盟. 以余觀之, 或剽其語, 或襲其意, 俱不免屋下架屋, 而誇以自大, 其不幾於夜郞王耶.
「명사가시선서(明四家詩選序)」의 말이다. ‘옥하가옥(屋下架屋)’ 즉 남의 집 아래에 다시 제 집을 짓고는 제가 제일 잘난 줄 아는 것이 오늘날 시를 쓰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이다. 야랑(夜郞)은 오랑캐의 나라 이름인데 그 나라 왕은 스스로 제 나라가 가장 크다고 생각하였다. 남의 흉내 잘 내는 것만으로야 어찌 자신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야랑왕의 착각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들은 유행에 민감하고 시류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조금이라도 유행에 뒤떨어지면 어찌하나를 걱정할 뿐, 무엇을 노래하고 어떻게 노래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렇고 그런, 모두 고만고만한 시만 있을 뿐이다.
오늘에 시를 하는 자들이, 한위(漢魏)ㆍ육조(六朝)를 높이 보고, 당나라 개천(開天)ㆍ천력(大曆) 연간의 것을 그 다음으로 치며, 가장 낮은 것으로 소식(蘇軾)과 진사도(陳師道)를 일컫는다. 모두들 스스로 그 지위를 빼앗을 수 있다고 말들 하지만, 이는 망령된 말일 뿐이다. 그 말과 뜻을 주워 모아 답습하고 표절하면서 스스로 뽐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어찌 시도(詩道)를 말할 수 있겠는가?
今之詩者, 高則漢魏六朝, 次則開天大曆, 最下者乃稱蘇ㆍ陳, 咸自謂可奪其位也, 斯妄也已. 是不過掇拾其語意, 蹈襲剽盜以自衒者, 烏足語詩道也哉.
「시변(詩辨)」의 이 말도 같은 취지에서 나왔다. 한위(漢魏)ㆍ육조(六朝)는커녕 소식(蘇軾)과 진사도(陳師道)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할 위인들이, 성당(盛唐)의 시만을 으뜸이라 하면서 그 나머지는 우습게 본다. 그네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옛 사람의 말과 뜻을 주워 모아 흉내내고 표절하는 일뿐이다. 그러면서 어찌 그들보다 더 높은 경지를 이룰 수 있다 하는가? 이런 자들과는 결단코 더불어 시도(詩道)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옹(翁)께서는 저의 근체시가 순숙(純熟) 엄진(嚴縝)하여 성당(盛唐)의 시가 아니라 하며, 물리쳐 돌아보지 않으시면서, 유독 고시(古詩)만은 좋아 안연지(顔延之)와 사령운(謝靈運)의 풍격이 있다 하십니다. 이는 옹께서 얽매여 변화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려. 저의 고시(古詩)가 비록 옛스럽기는 해도, 이는 책상에 앉아 진짜처럼 흉내낸 것일 뿐이니, 남의 집 아래 집을 얽은 것이라, 어찌 족히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핍진하지는 않아도 절로 저 자신만의 조화가 있습니다. 저는 제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고 송나라 시와 비슷해짐을 염려합니다. 도리어 남들이 ‘허자(許子)의 시(詩)’라고 말하게 하고 싶답니다. 너무 외람된 것일까요?
翁以僕近體爲純熟嚴縝, 不涉盛唐, 斥而不御, 獨善古詩爲顏ㆍ謝風格, 是翁膠不知變也. 古詩雖古, 是臨榻逼眞而已, 屋下架屋, 何足貴乎. 近體雖不逼眞, 自有我造化, 吾則懼其似唐似宋, 而欲人曰: “許子之詩也.” 毋乃濫乎.
「여이손곡(與李蓀谷)」, 즉 이달에게 보낸 편지의 전문이다. 이에 앞서 이달은 허균(許筠)이 보낸 시고(詩稿)를 보고, 고시는 육조(六朝)의 풍격이 있어 좋은데 근체시에는 왜 성당(盛唐)과 핍진함이 없느냐고 나무란 편지를 보냈던 모양이다. 그러자 허균은 고시가 안연지나 사령운과 핍진한 것은 ‘옥하가옥(屋下架屋)’일 뿐이니 거짓 흉내에 지나지 않고, 근체시가 이백(李白)이나 두보(杜甫)와 같지 않은 것은 내 자신만의 조화(造化)를 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답장하였던 것이다.
허균(許筠)의 ‘허자지시(許子之詩)’의 선언은 우리 비평사에서 참으로 의미 있는 장면이다. 뒷날 정약용(丁若鏞)이 ‘아시조선인 감작조선시(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즉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고 한 ‘조선시 선언’도 그 선성(先聲)이 허균에 있었음을 본다. 인간의 감정이 아무리 보편적인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는 해도, 시대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사람이 다른데, 어찌 옛 사람과 똑같이 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진정으로 옛 사람과 똑같이 되려거든 옛 사람과 달라져야 한다.
뒷날에 지금의 글을 봄이 어찌 지금 우리가 앞의 몇 분의 글을 봄과 같지 않겠는가? 하물며 거침없고 아득하게 말하는 것은 크게 되고자 함이요, 옛 것을 본받지 않는 것은 또한 홀로 우뚝 서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말 많음이 되리요. 그대는 그 몇 분의 글을 자세히 보았는가? 좌씨는 절로 좌씨가 되고, 장자는 절로 장자가 되며, 사마천과 반고는 절로 사마천과 반고가 되고,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은 또한 절로 한유·유종원·구양수·소식이 되어, 서로 답습치 않고 각기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원하는 바는 이것을 배우자는 것이다. 남의 집 아래에다 집을 덧짓고서 도둑질해 끌어낸다는 나무람을 답습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後之視今文, 安知不如今之視數公文耶? 況滔滔莽莽, 正欲爲大, 而不銓古者, 亦欲其獨立, 奚飫爲? 子詳見之數公乎? 左氏自爲左氏; 莊子自爲莊子; 遷固自爲遷固; 愈․宗元․脩․軾亦自爲愈․宗元․脩․軾, 不相蹈襲, 各成一家. 僕之所願, 願學此焉, 恥向人屋下架屋, 蹈竊鉤之誚也.
「문설(文說)」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도 ‘옥하가옥(屋下架屋)’이란 표현이 나온다. 벌써 세 번째(明四家詩選序, 與李蓀谷)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명하다. 나는 옛 사람의 글에서 배운다. 그렇지만 내가 옛 글에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기승전결의 문장구성이나, 편장자구(篇章字句)의 표현방식이 아니다. 좌씨는 좌씨가 되고, 장자(莊子)는 장자가 되며, 한유(韓愈)가 구양수(歐陽修)와는 다르고, 유종원(柳宗元)이 소식이 될 수 없게 하는 정신, 서로 답습치 않고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일가를 이루는 길, 나는 그들의 글에서 이것을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나는 어떻게 해야만 할까?
허균(許筠)의 이 말은 한유(韓愈)의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의 정신을 환기시킨다. 옛 글을 본받되 그 정신을 본받아야지 그 표현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겉모습이 같다고 해서 내가 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정신의 실질, 그 속에 담겨진 삶의 진실을 읽어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지역에 따라 차이나며, 사람마다 같지 않은 것이니, 내가 두보(杜甫)가 아니고, 내가 소식이 아닐진대, 그의 흉내만으로 그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한유(韓愈)는 이를 달리 ‘동곡이곡(同工異曲)’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공교로움은 한 가지인데, 곡조는 다르다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면 그 표현하는 방법은 갖가지이지만, 그 원리는 한 가지이다. 고수(高手)는 결코 획일화되지 않는다. 상동구이(尙同求異), 그들과 같아지기를 추구하려거든 그들과 달라져야만 한다. 같아지려고만 해서는 결코 같아질 수가 없다.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앞선 시인들의 망령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여라. 그들의 울타리 아래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빈 들판 위에 네 기둥을 세워라.
인용
1. 조선의 문제아
5. 좌절된 꿈을 아로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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