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편지라고 하찮게 보지 마라, 이 안에도 정수가 담겨 있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학문을 토의한 편지의 가치
或曰: “聖經賢傳, 誰非實學? 又今集註諸說, 家傳而人誦者, 皆至敎也. 子獨拳拳於夫子之書札, 抑何所尙之偏而不弘耶?”
曰: “子之言似矣, 而猶未也. 夫人之爲學, 必有所發端興起之處, 乃可因是而進也. 且天下之英才, 不爲不多, 讀聖賢之書, 誦夫子之說, 不爲不勤, 而卒無有用力於此學者, 無他, 未有以發其端而作其心也.
今夫書札之言, 其一時師友之間, 講明旨訣, 責勉工程, 非同於泛論如彼, 何莫非發人意而作人心也. 昔聖人之敎, 詩書禮樂皆在, 而程朱稱述, 乃以『論語』爲最切於學問者, 其意亦猶是也.
嗚呼! 『論語』一書, 旣足以入道矣. 今人之於此, 亦但務誦說, 而不以求道爲心者, 爲利所誘奪也. 此書有『論語』之旨, 而無誘奪之害. 然則將使學者, 感發興起, 而從事於眞知實踐者, 舍是書何以哉.
이 책을 읽으면 정자를 지나 공자에 가닿을 수 있으리
夫子之言曰: ‘學者之不進, 由無入處而不知其味之可嗜. 其無入處, 由不肯虛心遜志, 耐煩理會.’
使今之讀是書者, 苟能虛心遜志, 耐煩理會, 如夫子之訓, 則自然知其入處, 得其入處, 然後知其味之可嗜. 不啻如芻豢之悅口, 而所謂大規模嚴心法者, 庶可以用力矣. 則泝伊洛而達洙泗, 無往而不可. 向之所云聖經賢傳, 果皆爲吾之學矣, 豈偏尙此一書云乎哉.
滉年薄桑楡, 抱病窮山, 悼前時之失學, 慨餘韻之難理. 然而區區發端, 實有賴於此書. 故不敢以人之指目而自隱, 樂以告同志, 且以俟後來於無窮.”云.
嘉靖戊午夏四月日, 後學眞城李滉, 謹序. 『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二
해석
하잘 것 없어 보이는 학문을 토의한 편지의 가치
或曰: “聖經賢傳, 誰非實學?
혹자가 말했다. “성인의 경과 현인의 전이 누가 실학이 아니라 하는가?
又今集註諸說, 家傳而人誦者,
또한 지금의 집주의 여러 말들은 집집마다 전하여 사람이 외는 것이니
皆至敎也.
모두 지극한 가르침이다.
子獨拳拳於夫子之書札,
그대는 유독 부자의 편지만을 안고 있으니
抑何所尙之偏而不弘耶?”
또한 어찌 숭상하는 것이 치우치고 넓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曰: “子之言似矣, 而猶未也.
대답했다. “그대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夫人之爲學, 必有所發端興起之處,
대체로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반드시 단서를 발설하고 흥기하는 곳이 있어야
乃可因是而進也.
곧 이로 인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且天下之英才, 不爲不多,
또한 천하의 영재가 많지 않은 건 아니고
讀聖賢之書, 誦夫子之說,
성현의 책을 읽고 부자의 말을 외는 것이
不爲不勤,
부지런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而卒無有用力於此學者, 無他,
마침내 이 학문에 힘을 쓰지 않는 것은 다른 게 없이,
未有以發其端而作其心也.
단서를 발설하고 마음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今夫書札之言, 其一時師友之間,
지금 대체로 편지의 말은 한때의 스승과 벗 사이에
講明旨訣, 責勉工程,
뜻과 가르침을 강의하고 밝히며 과정을 책임 지우고 권면하여
非同於泛論如彼
폭넓게 의론함에 동일하지 않음이 저와 같으니
何莫非發人意而作人心也.
어찌 사람의 뜻을 발설하고 사람의 마음을 연 것이 아님이 없다.
昔聖人之敎, 詩書禮樂皆在,
옛 성인의 가르침엔 시와 서와 예와 악이 모두 있었지만
而程朱稱述, 乃以『論語』爲最切於學問者,
정자와 주자가 말한 『논어』로 학문하는 데에 가장 간절한 것으로 삼았던 것은
其意亦猶是也.
그 뜻이 또한 이와 같았던 것이다.
嗚呼! 『論語』一書, 旣足以入道矣.
아! 『논어』 한 책은 이미 도에 들어가기에 넉넉한 것이다.
今人之於此, 亦但務誦說,
이제 사람들은 이에 또한 다만 말을 힘써 외우지만
而不以求道爲心者, 爲利所誘奪也.
도를 구하여 마음을 삼지 않는 것은 이익에 의해 유혹되어 빼앗김을 당하기 때문이다.
此書有『論語』之旨, 而無誘奪之害.
이 책은 『논어』의 뜻이 있지만 유혹하여 빼앗는 해로움은 없다.
然則將使學者, 感發興起,
그러니 장차 배우는 자에게 감발하고 흥기하게 하여
而從事於眞知實踐者, 舍是書何以哉.
참으로 알고 실천함에 종사하려 하는 것은 이 책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리오.
이 책을 읽으면 정자를 지나 공자에 가닿을 수 있으리
夫子之言曰: ‘學者之不進,
부자의 말에 다음과 같은 게 있다. ‘학자가 나아가지 못함은
由無入處而不知其味之可嗜.
들어갈 곳이 없어 그 맛이 즐길 만하다는 걸 몰라서다.
其無入處, 由不肯虛心遜志,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히 하며
耐煩理會.’
번거로움을 참고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使今之讀是書者, 苟能虛心遜志,
가령 이제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히 하며
耐煩理會, 如夫子之訓,
번거로움을 참고 이해함을 부자의 가르침과 같이 한다면
則自然知其入處, 得其入處,
자연히 들어갈 곳을 알 것이고 들어갈 곳을 얻은 후에
然後知其味之可嗜.
맛이 즐길 만하다는 걸 알 것이다.
不啻如芻豢之悅口,
그리하면 고기가 입을 즐겁게 하는 것 같을 뿐만 아니라
而所謂大規模嚴心法者, 庶可以用力矣.
이른바 규모를 크게 하고 심법을 엄하게 한 것이 거의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由是而旁通直上,
이로 말미암아 곁으로 통하고 곧장 오른다면
이락(程子)를 거슬러 수사(孔子)에 도달하여 어딜 가더라도 옳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向之所云聖經賢傳, 果皆爲吾之學矣,
그리하면 접때 말한 성인의 경과 현인의 전이 과연 모두 나의 학문이 되리니
豈偏尙此一書云乎哉.
어찌 이 한 글을 치우쳐 숭상하겠는가.
滉年薄桑楡, 抱病窮山,
나의 나이는 거의 만년【상유(桑楡): 노년을 뜻한다. 서쪽으로 지는 햇빛이 뽕나무와 느릅나무 가지 끝에 비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이고 궁벽한 산에 병을 안은 채
悼前時之失學, 慨餘韻之難理.
전날의 학문을 잃음을 슬퍼하고 여운의 다스리기 어려움을 개탄한다.
然而區區發端, 實有賴於此書.
그러나 구차하게라도 단서를 내는 것은 실제로 이 책에 힘입었던 것이다.
故不敢以人之指目而自隱,
그러므로 감히 남의 지목 때문에 스스로 숨기지 않고
樂以告同志,
즐겁게 동지에게 고했고
且以俟後來於無窮.”云.
또한 무궁한 데서 훗날에 올 이들을 기다리련다.”
嘉靖戊午夏四月日, 後學眞城李滉, 謹序. 『退溪先生文集』 卷之四十二
가정 무오(1558)년 여름 4일에, 후학 진성 이황이 삼가 쓴다.
인용
'산문놀이터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립 - 산수병서(山水屛序) (0) | 2020.07.31 |
---|---|
이황 -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 (0) | 2020.07.31 |
주자서절요서(朱子書節要序) - 1. 주자서의 가치와 편집하게 된 까닭 (0) | 2020.07.31 |
신광한 - 포전합환과설(圃田合歡瓜說) (0) | 2020.07.31 |
성현 - 문변(文變) (0) | 2020.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