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구의 시에 차운한 홍만종의 강서시풍 한시
『소화시평』 권하 72번엔 직접적으로 이민구의 시를 관어대에서 본 홍만종은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나 보다. 최근에 ‘어머! 저건! 사야 돼!’라고 풍자하듯이 홍만종도 이민구의 시를 보고 나선 ‘어머! 이건 차운해야 돼!’라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정감이 일었던 듯싶다. 이번 편엔 ‘왜 차운하게 됐는지?’, ‘누군가가 부탁해서 짓게 됐는지?’라는 정황들은 나오지 않지만, 자신도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는 건 확실히 알 수가 있다.
홍만종이 차운한 시도, 결코 이민구의 시에 뒤지지 않는 전고(典故) 파티를 보여준다. 아마도 자신이 잘 짓는 시풍으로 이민구 옹께서 먼저 시를 지었기에 홍만종도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배신감이 잔뜩 든다. 『소화시평』을 읽다 보면 송풍(宋風)이니 당풍(唐風)인지를 운운하며 당풍을 마치 더 좋은 것처럼 묘사하고 송풍이나 강서시풍을 나쁜 것처럼 묘사하는 걸 자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홍만종 자신은 당시를 최고로 치기에 당시풍의 시만을 짓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오는 시는 어딜 봐도 난삽한 느낌이 매우 강렬한 강서시풍의 시다. 왜 자신은 그런 시를 안 좋은 시인 것처럼 말하면서도 그런 시를 썼는지는, 좀 더 홍만종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高樓獨上意微茫 | 높은 누대에 홀로 오르니 뜻이 아득해지는데 |
鰲背冷風萬里長 | 자라가 진 신선산의 차가운 바람은 만 리 멀리 불어온다. |
臺壓千尋蛟窟險 | 누대는 천 길 절벽 교룡이 사는 굴의 험함을 눌렀고 |
山留太古劫灰忙 | 산엔 태고적 불벼락의 재가 남아 있다네. |
天淸遠嶼收雲氣 | 하늘이 맑은 건 먼 섬이 구름 기운을 거두어 들여서고, |
海赤層濤盪日光 | 바다가 붉은 건 높은 파도에 햇볕이 일렁여서지. |
便欲登仙從此去 | 문득 신선이 되어 이로부터 떠나고 싶어라. |
世間榮辱等亡羊 | 세간의 영욕은 양 잃은 것과 같이 허무한 것이니. |
우선 1구는 매우 평이하게 진행된데 반해 2구부터 전고가 등장한다. 이민구가 누대에 올라 보았던 망망한 바다를 표현한 1~2구와는 격을 달리한 것이다. 그는 바다이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게 아니라 신선산이 있기 때문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굳이 전고가 있는 ‘자라 등[鰲背]’을 쓴 것이다. 당연히 교수님이 이 구절의 해석을 시켰을 땐 그저 ‘자라 등에서 시원한 바람이 만리 길도록 부네.’라 해석한 것인데, 그건 단순히 자라 등은 아니었던 거다.
3~4구도 결코 쉽지가 않다. 글자만 따라가도 해석이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교묘하게 시구를 안배하여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 길 교룡이 사는 굴의 험함을 누대는 누르고 있고, 산엔 태곳적 세상 불벼락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표현했다. 이 표현을 통해 관어대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는 걸 알 수가 있고 그 산은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란 걸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풀어서 해석해보면 참 별 것 없지만 시를 맞닥뜨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더욱이 보통 4/3구로 띄어 읽으며 해석을 하는데 반해 여기선 아예 2/5구로 변화를 주었다.
이런 기조는 5~6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보통의 시들은 인과적인 표현을 쓸 때 ‘~했기 때문에 ~하다’라는 인과의 방식으로 써나가 보는 사람이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데 반해, 홍만종은 그걸 뒤집어 버린 것이다. 바로 인과(果因)의 구조로 표현하며 한참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정리하게 만든 것이다. ‘하늘이 맑다’라는 구절이 바로 결과이다. 그렇다면 하늘은 왜 맑은가? 그건 먼 섬들이 구름 기운을 거두어 들였기 때문이다. 금방 전까지는 구름이 가득 껴 있어 하늘은 흐리게 보였는데 누대에 올라서 보니 어느새 구름은 한점도 없이 사라졌고 맑은 하늘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구름을 모두 거두어간 먼 섬들이여 땡큐!’라고 말하는 듯한 심정이 절로 느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6구도 해석하면 된다. 붉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는데 그건 왜 그런 걸까? 그건 바로 높다란 파도에 햇빛이 일렁이기 때문이다.
7~8구에선 이민구의 7~8구에서 말한 ‘실론티의 꿈’ 같은 느낌을 새롭게 변주했다. 이민구도 망망대해에 돛배를 띄워 떠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그대로 이어 받아 홍만종도 포부를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떠나고 싶다고 표현한 게 아니라 신선이 되어 이 세상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을 7구에서 얘기했고 그 이유를 8구에서 풀어놨다. 그건 세상의 영욕이란 책을 읽다가 양을 잃은 경우나 도박을 하다가 양을 잃은 경우처럼 허무하니 신선이 되어 그런 것을 초월하고 싶다는 바람을 얘기한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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