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단으로서의 글 읽기와 본질로서의 글 읽기 | |
글이란 한 사람이 지닌 문사철(文史哲)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정제된 양식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을 읽으면 지은이가 살았던 사회상을 엿볼 수 있고, 그에게 영향을 준 사상을 맛볼 수 있으며, 현실을 살아내며 구성된 그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글을 읽는다는 게 단순히 글자를 읽어나가는 행위가 아닌 지은이의 생각과 철학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기에, 조선시대 학자들은 자세를 바로 잡고 정신의 뼈대를 하얗게 세워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글을 읽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 읽기’ |
하지만 인쇄문화가 발달하여 무수히 많은 책이 쏟아지게 되면서 글을 대하는 진중한 자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글이나 책에 대해 신성시하여 교조적이며 일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런 현상을 좋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가볍게 보게 되면서 성심성의껏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이 사라졌다는 점에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젠 하나의 글을 여러 번 보고 깨달음에 이르러 손이 절로 춤추고 발이 절로 리듬을 밟는 흥분[手之舞之足之蹈之]을 느끼긴 쉽지 않다. 현대인에게 글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져 있었고, 책은 시험을 보기 위해서 당연히 봐야만 하는 것으로 가치와 의미가 급격하게 하락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단어는 ‘당연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는 그에 대해 고민해볼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어진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기에만 급급할 뿐, 새롭게 정의를 내리거나 깨달음에 이를 수 없게 된다. 즉,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書自書 我自我]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뉘어져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됐다. 그러니 공부는 했고 책은 읽었지만, 실질적으로 나의 존재는 작아지고 인식의 지평은 협소해지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글 읽기’의 한계라 할 수 있다.
▲ 민들레 단행본 모임에 간헐적으로 참여했지만 이 모임이 재밌는 이유는 책과 마주친 사람들과 만난다는 점이다.
맛난 마주침을 위한 ‘본질로서 글 읽기’ |
이런 식으로 한계에 이르렀을 때가 어찌 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금껏 고수해왔던 것들이 더 이상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집하던 것을 내려놓게 되고, 그렇게 텅텅 비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것이 채워질 수 있게 된다. 뉴턴이 사과나무를 보며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우치던 순간이 바로 이러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고집하려는 마음과 안다는 허영이 허물어져 근본이 흔들리는 순간에야 지금껏 보아왔지만 지나쳤던 것들이 새삼스레 느껴지니 말이다.
이처럼 하나의 관념이 무너진 순간에 마음의 여유가 생기며, 마음이 텅텅 비니 마음 한 자락 부여잡고자 글을 읽게 되고, 글을 읽으니 저자의 이야기가 쏙쏙 들어와 마음밭에 아로새겨진다. 글은 채우기 위해서 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다독했다는 위안은 얻을지언정, 글을 통한 만남이 빚어낸 깊은 여운은 남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한계와 직면하기 위해 읽어야 하며, 나를 비우기 위해 보아야 한다. 글을 통해 저자가 펼쳐낸 거대한 인식의 흐름에 동참하여 나의 연약함을 깨달아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흐름에 동참하는) 본질로서 글 읽기’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 우치다, 하루키, 칸트. 반복을 통해 창의성을 길렀다. 반복과 창의의 아이러니, 바로 그 속에 본질로서의 독서가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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