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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21세기의 3대 과제 - 2.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21세기의 3대 과제 - 2.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

건방진방랑자 2021. 5. 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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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

 

 

수 년전의 일이다. 아프리카대륙과의 최초의 해후! 내가 탄 헬리콥타가 탕가니카 호수 북단의 호반의 푸른 초원에 내렸다. 내가 탄 헬리콥타가 검은 대륙에 착지하려고 접근을 시도할 때, 주변 동네의 어린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바스라질 듯 해맑은 대기, 바다보다도 더 큰 호수, 호수를 병풍 친 밋밋하면서도 웅장한 산맥의 준령, 이 모든 것이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문화충격이랄까, 삶의 환희라고 해야 할까, 생명의 약동이랄까,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 바글거리는 까만 아동들의 얼굴이었다. 김서린 새벽 호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강렬한 몸짓보다도 더 투명한 빛을 발하는 그들 까아만 얼굴의 질점 하나 하나가 모두 인간의 태고적 발랄함과 원초적 순결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미대륙에서 경험하는 아메리칸 블랙들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도저히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생명의 발출이었다. 쵸코렡트를 던져주는 덩치 큰 깜둥이 지아이 아저씨들 트럭꽁무니를 열심히 뛰어다녔던 나의 추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카사바 베이 대통령 별장을 방문한 국빈이 되어 짙은 초록색 풀밭배경과 앙상블을 이루는 흑인 아동들의 얼굴에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그들과 곧 친하게 되었다. 그리곤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바로 옆에 있는 흑인마을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마을이라고 해봤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운동장 만한 황토벌 위에, 여인들이 물동이를 이고 모여드는 샘 펌프가 하나한 가운데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초가지붕의 아주 단순한 원통 모양의 막사들이 한 열 대여섯개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황토 벽돌로 쌓아올린 원통모양의 담의 직경이래야 한 45메타될까? 그 지붕은 삿갓 모양으로 풀잎들이 이어져 있고, 그 위에는 호수에서 잡은 고기들을 건조하기 위해 척척 널려놓았다. 대문에 해당되는 네모난 구멍은 거적대기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 직경의 3분의 2정도 만큼으로 하나의 사람키만한 칸막이 담이 처져 있었고 그 담 안쪽으로 나무 평상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부엌시설은 따로 없고, 큰 깡통 안쪽을 진흙으로 이겨 만든 화덕같은 것 하나, 그것이 취사시설의 전부였다. 빵은 배급받고, 그 깡통에 숯불 피워 지붕에 있는 건어물을 기름에 볶아 빵에 찍어 먹는 모양이었다. 잠은 그 평상 위에서 한 식구가 모두 같이 담요 한장 덮고 자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나마 대통령관저 옆에서 보호를 받는, 그래도 제대로 된 한 모범적 마을의 모습이었다. 원시라든가, 빈곤이라든가, 미개라든가, 하는 말을 떠올리기 전에 나에게 충격을 준 사실은 인간의 삶의 양태의 단순성(Simplicity)이었다. 인간은 이렇게도 단순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문명의 어느 구석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발랄하게 약동치는 아동들의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이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 나 자신의 리얼한 삶의 모습을 회상해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대부분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저 동구밖 눈들에 있는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이 살고 있던 초가집 단칸방의 모습은 내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아프리카초원의 가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겨울이라는 풍토때문에 벽이 두껍고 부뚜막 부엌이 따로 있었을 뿐이다. 그때만 해도 세멘트는 구경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아낙들의 최고의 꿈은 솥이 걸린 황토 부뚜막이 먼지가 안 나는 세멘으로 덮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름 때를 묻혀 부뚜막의 흙을 굳혔지만, 그것도 몇년 지나면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고 해야만 했다. 수수깡 엮어 흙을 발라놓은 벽은 갈라져 구멍이 숭숭했고, 종이를 발랐어야 흙과 떠서 그 사이엔 검댕이가 끼어 있었다. 방바닥은 황토를 바른 위에 다시 바를 세멘트가 없으니까 장판을 해봤자 뜰 것이고, 아예 왕골자리나 삿자리를 깔았다. 겨울에 왕골자리 단칸방에 시커먼 광목 솜이불 하나 깔아놓으면, 요도 없이 그 밑으로 엄마ㆍ아버지ㆍ아기 ㆍ 메느리 할 것 없이 모두 부채살 모양으로 쑥쑥 들어가 잤다. 애기가 똥이라도 싸는 바엔 아무리 똥을 닦아내어 봤자 왕골 사이사이로 똥은 박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썩고 썩어 몇년을 지나게 되면 벽에 주렁주렁 매어놓은 메주냄새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매쾌한 내음새를 스물네시간 발했다. 기절초풍 할 가관은 애기가 똥을 싸면 뒷마당으로 나있는 방문을 열어 강아지이름이라도 부르면 졸랑졸랑 방으로 들어온 강아지는 열심히 애기똥을 핥아먹고 나갔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정말 우리시대에는 흔히 체험하는 상식적인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의 모습, 가끔 산토닌이라도 먹으면 똥구멍으로 삐질삐질 나오는 회충을 손으로 잡아 빼는 것은 물론, 가끔 아악 소리를 지르면 목구멍으로 지렁이같은 회가 한마리 요동을 치며 입안의 허공을 널름 거렸다. 저녁에 옷을 벗어 놓으면 엄마는 난닝구 이슴매 사이로 기어다니는 이를 잡느라 똑똑 거리고, 목양말은 매일 빵꾸가 나서 전기다마에 끼우고 기우느라 여인들은 손놀림을 쉴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고운 참빗으로 머리에 낀 서캐를 긁어내느라 정신이 없고, 머리맡 윗목에 놓은 걸레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삶 속에 전기라는 에너지가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냉장고가 우리 삶에 진입한 것은 겨우 70년대였다. 서민들은 등잔불 속에서 살거나, 전기가 들어온다 해도, ‘보통이니 특선이니 해서 하룻밤에도 전기가 수십번 나갔다. 왜 특선인데 이렇게 전기가 나가냐고 전기회사에 전화걸어 항상 호통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음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극장에 가도 영화를 한 번에 보는 예는 없었다. 꼭 전기가 나가기 때문에 영사기가 멈추었고 그럼 발전기를 돌려 다시 영사기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면 발전기를 껐다가, 또 다시 전기가 나가게 되면 또 블랙아웃! 너무도 멀리 사라진 듯한 우리의 삶의 모습 이건만 이것은 불과 수십년전 우리 삶의 상식적 풍경들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56학년 때 비로소 형광등이라는 신기한 작대기 전구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때쯤 전 읍내에 한 가구 정도 테레비라는 꿈같은 현실이 부잣집 안방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밤이면 온 동네사람들이 그곳으로 마실을 왔다.

 

간편한 볼펜도 중학교 때나 등장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선 아동들 사이에는 누가 어떻게 연필을 더 예쁘게 깎느냐는 경기대회가 매일 열리는 판이었다. 말만 듣던 수세식 변소의 존재는 온양 온천관광호텔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고, 슈악 맴도는 변기의 소용돌이가 도대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너무도 희한한 광경을 바라본 듯 감격스럽게 불알을 털럭이며 미소지어야 했다. 집안에서 항상 더운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이었다.

 

 

자아! 한번 생각해보자! 바로 몇년전의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한번 되돌아가 보자!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한 사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의 기본 양식이나 보편적 주거환경이, 고조선시대의 사람들의 주거 방식이나 삶의 양식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단칸방짜리 온돌방식의 가옥구조가 우리인간의 문명의 세기 사천년 동안 거의 변화없는 연속성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40년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은 4,000년 전의 이 땅의 사람들의 삶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목격한 중국문명의 찬란함은 당대의 서양의 문명에 비해 더 화려한 것이었다. 이미 청자개와를 해올린 신라의 고도 서라벌 경주(慶州), 불국사나 석굴암의 모습만 연상해도 그 웅장함과 단아한 문명의 아취는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명들은 결코 우리가 이 땅에서 한 40년 동안 자연을 착취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즉 대중적인 인간 삶의 기본적인 연속성이 크게 흩트러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 연속성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화해의 연속성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인류사를 특징 지우는 희대의 사건은 20세기를 통하여 기술(테크놀로지)과 과학(사이언스)이 본격적인 랑데부(Rendezvous)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기술과 과학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기술과학이니, ‘과학기술이니 하고 무분별하게 말을 뭉뚱그려 사용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개념적으로 확연한 구분이 있는 것이다.

 

기술이란 본시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기술이란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 즉 기예(테크네, Techne)를 말하는 것이다. 까치가 휘엉청거리는 나뭇가지 끝에 태풍에도 견디는 견고한 집을 짓는 것은 분명 까치의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치의 과학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과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특징 지우는 어떠한 측면이다. 과학이란 본시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이성(Speculative Reason)의 산물인 것이다. 과학의 특징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법칙적이라는 것은 대강 희랍인들에 의하여 연역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연역적인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깊게 이야기는 하지 않겠는데, 이 과학이라는 것은 기술의 전제 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사변이 고도화되면서 생겨난 하나의 철학체계요, 지식체계와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들이 토기를 굽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그들이 토기를 구울 때 과학이라는 연역적 전제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흙과 불에 대한 과학적 일반이론을 전혀 몰랐을지라도, 놀랍게 훌륭한 토기를 구워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과 기술은 따로 따로 발전한 것이다. 기술의 역사, 그 정밀성과 고도성을 운운한다면, 아마도 중국문명이나 우리 한국문명이 훨씬 더 서양문명을 앞질렀을 것이다. 몇백년 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 지구상에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은 우리 조선의 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수준은 기술적 측면에서 분명 송대나 명대의 자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 유럽은 1,300가까운 가마의 기술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의 최근의 희곡작품인 , (1999611~29,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 초연)의 내용이 말해주듯이, 일본의 아리타 야키라(규슈 사가현 이마리에서 탄생한 자기)든가 사쯔마 야키(薩摩燒, 가고시마에서 탄생한 자기)가 모두 정확하게 당대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고도의 불의 예술이 전수되어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활판인쇄술만 하더라도, 서양사람들이 아무리 구구한 이설을 내어도 소용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그 자체로서 당대의 최고ㆍ최초의 기술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려시대에 이미 성행했던 주자(鑄字) 인쇄는 차치하고서라도, 세종조의 갑인자(甲寅字) 같은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무지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정치하고 단초로운 품위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나라 조선조의 목공예품을 보아도 그것은 디자인적으로나 크래프트맨십(craftsmanship)의 정밀성으로나 가히 세계 최고의 가품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백히 세계최고의 기술의 대국인 조선의 후손들의 나라인 대한민국은 왜 이다지도 기술의 시대에 뒤진 모습을 하고 있는가? 왜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조차 일본의 꽁무니도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결정적 열쇠가, ‘과학과 기술의 랑데부라는 이 한마디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부하던 과거의 찬란한 기술은 곧 과학의 전제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방편으로 개발된 것이다. 그것은 삶의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위 개화를 통하여 경험해야만 했던 서양 콤플렉스는 바로, 과학과 기술이 본격적인 랑데뷰를 시작하여 구성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19세기초까지만 하더래도 동양과 서양은 소위 과학기술문명 전반에 있어서 그리 큰 차이를 보이는 문명의 양태들이 아니었다. 서양 역시 우리보다 앞선다 할 것이 별로 없는,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미신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그런 문명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래 서양의 문명의 모습은 완전히 그 이전과는 다른 단절의 양상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기술속으로 과학이 진입하고, 또 과학속으로 기술이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가끔 강냉이를 튀기는 아저씨가 오면 흥미진진하다. 쌀토락이나 강냉이나 누룽갱이 말린 것, 아무거나 갖다 주기만 하면 기다란 쇠통에 집어놓고 불위에 빙글빙글 돌리는 그 태연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한참을 지난 후 거대한 철망통을 씌우고, 으앗! 철통같이 닫힌 아구리를 지렛대로 후악 제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간이 콩알 만해져 가지고 고사리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옹크려야 했던가? 갑자기 구수한 냄새가 천지에 진동을 하고 망탱이 주변에 떨어진 강냉이라도 주어먹을 국물이 있을까 하고 몰려드는 어린아이들! 뻥튀겨진 변모된 쌀보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아기들의 눈은 경이와 호기심에 찬 그런 눈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 이것은 순식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뻥 튀겨 놓았다. 이미 예전의 쌀토락이 아니고 예전의 누룽갱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노름인 것이다. 과학의 성과는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가져 왔다. 기술의 진보는 놀라웁게 우리의 과학적 사유의 영역을 넓혀갔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개발의 영역이 아니던 것이 마구 개발될 수 있게 되고, 인간사유의 대상조차 아니었던 것들이 마구 인간 사유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 공상이 마구 현실로 변모해갔던 것이다. 꿈이 현실로 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것이다. 매우 기쁜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기쁨에 도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그들은 꿈 그 자체를 하나 둘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은 무한히 꿀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하나의 망상이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다. 꿈의 상실은 인간 그 자체의 도덕적 파멸인 것이다.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가 보자!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적 삶이 4,000년 전의 삶의 양태와 연속성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은 바로, 40년 동안의 변화가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근원적으로 단절시켜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000년 동안 유지해왔던 옥수수 알갱이가 불과 40년 동안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강냉이로 뻥튀겨져 버린 것이다. 그 뻥 튀김의 실체가 바로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라는 사건이다. 과학은 물론 우리 조선민족의 창안이 아니다. 그것은 희랍인들의 놀라운 사변 이성이 이룩한 인류의 쾌거의 씨앗이 르네쌍스( Renaissance) 이래 발아한 것이다.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단지 그것을 정확하게 배울려고 힘썼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서구라파문명이 두세기 동안 달성한 것을 곧 사오십년 안에 달성하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달성된 것인지 안된 것인지는 지금 내가 단안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외면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는 최소한 그 과학문명을 이룩한 주축의 문명의 삶의 양태의 변화보다도 더 철저하고 근원적이고 더 그 변화의 폭이 큰 것이다.

 

4,000년 동안 인간이 건드릴 수 없었던 성역이 40년 동안에 무너졌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의 에너지를 문명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식이 여태까지의 인류의 문명사의 어떠한 방식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에너지의 전환이 바로 모든 에너지의 근원을 고갈시키고 파괴시키고 있다는 가공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란 천지의 에너지며, 이 천지의 에너지란 곧 생명의 에너지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의 고갈이나 파괴는 곧 생명의 고갈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 사막에 우뚝 서 있는 스핑크스나 피라밋은 한없이 신비롭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지구상의 문명의 소치라고 말한다면 지금도 풀 수 없을 정도의 어떤 문명에너지의 비약적 형태를 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일의 사막 위에 아무리 피라밋이 수백개 들어섰다 할지라도 지구 전체의 기상상태를 파괴시킬 만한 환경의 오염이나 생태의 변화를 초래한 바는 없다. 피라밋이나 만리장성은 인간의 인위적 장난의 극치라 말해도, 그것은 지금도 묵묵히 관광객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고요한 자연의 돌더미일 뿐이다. 그러나 63빌딩 하나가 저지르고 있는 하천의 오염은 결코 묵묵한 한강의 석양의 아름다운 반사로 가리워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밥을 급작스레 먹으면 체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리고 조금씩 먹지 않고 과식을 해도 반드시 부작용은 뒤따른다. 소식(少食)을 하거나 적당히 먹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가련한 인간은 그것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 맛있으면 과식하게 마련이고, 과식하면 설사나 배탈의 부작용이나, 장기적으로는 비만ㆍ고혈압ㆍ당뇨 등의 지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4,000년 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성역들을 40년에 다 건드려 버렸다면, 4억 만년 동안 순결한 처녀의 살결처럼 인간의 때가 묻지 않았던 도봉의 만장봉이 불과 몇십년 사이에 알피니스트(Alpinist)들의 핫켄이나 볼트, 온갖 인공확보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면, 해방 후 불과 450년 동안에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로 인한 산업사회의 진보가 우리 문명의 모습을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뻥튀겨놓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역사의 과식ㆍ과속ㆍ과욕이 여러 가지 병적 부작용을 초래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다.

 

 

요즈음 사방에서 지진이 터지고 있다. 일본에서 L.A.에서, 중국에서 터키에서, 파키스탄에서, 그리스, 대만에서…… 어마어마한 인간세의 불행을 초래하는 규모로 여기저기서 지진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진의 발생은 역시 지각의 이동이라는 지질학적 법칙의 사실에서, 그 개연성을 지배하는 일반론에서 그 원인을 논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천지(天地)를 하나의 신명체(神明體, 가이아, Gaia)로 본다면, 거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화적 상상력을 여기 도입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지구(地球) 상에 건설한 문명이 오죽이나 형편없는 것이었으면 저렇게 지신(地神)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을까? 얼마나 지신(地神)을 화나게 만들었길래 자신의 몸뚱이를 더럽힌 저 문명의 장난을 저렇게 털어버리실까? 물론 지각의 판들(Plates) 간의 충돌은(요번 대만지진은 북쪽의 두꺼운 유라시안 판[Eurasian Plate]이 필리핀해 판[Philippine Sea Plate]을 밀어덮쳐 생겨난 것이다) 예측불가능한 개연적 사태이며 지구내적 조건과 더 인과적으로 밀착되어 있는 사태일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조차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일산ㆍ분당지구에 단 정도의 지진이라도 발생한다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면 우리나라 또한 지진이 잦은 나라로서 작고 큰 주기적인 지진의 사례가 계속 등재(登載) 되어 있는데? 과연 안전할까? 지신(地神)의 진노? 우리는 지장보살님께 무어라 해야 할까? 지신의 진노?

 

진노에 필요한 것은 화해의 요청이다. 여기 인간과 天地와의 화해,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 인간과 그의 환경과의 화해라는 21세기의 제1주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ㆍ지()ㆍ인()을 일컬어 삼재(三才)라고 한다면, ()이라는 일재(一才)는 천()ㆍ지()의 이재(二才)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천지(天地)의 멸망은 곧 인()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우리 한민족이 불과 40년 동안에 불연속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21세기 우리문명의 과제는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이제 우리는 그 40년의 죄업, 그 과욕과 과속과 과식과 과용의 부작용을 해소시켜야 하는 과제상황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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