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학자(理學者)의 여기(餘技)
16세기에 들어와서 서경덕(徐敬德)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ㆍ조식(曺植) 등 성리학자들이 도학파(道學派)의 시세계를 열어준 이후 이들보다 한 세대 가량 뒤에 등장한 이이(李珥)ㆍ성혼(成渾)ㆍ송익필(宋翼弼)ㆍ정구(鄭逑) 등은 성리학 방면에서 보다 진전된 학문 성과를 보여준 이외에도 문학이론이나 실제 시의 창작 방면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이(李珥, 1536 중종31 ~1584 선조17, 자 叔獻, 호 栗谷ㆍ義菴ㆍ石潭ㆍ愚齋)는 선배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리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근본사상으로 리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며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창시한 학자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문책(文策)」에서 후세의 학자들이 실리(實理)를 구하지 아니하고 부조(浮藻)만 숭상하고 있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쳐 최경창(崔慶昌)ㆍ송익필(宋翼弼)ㆍ최립(崔岦) 등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의 호칭을 받기도 하였다[未弱冠, 與栗谷李先生, 龜峯宋翼弼, 東皐崔岦諸才子,脩禊唱洲于武夷洞, 世號八文章 -朴世采, 「孤竹詩集朽序)」].
그와 한때 이름을 나란히 한 최립(崔岦)은 율곡(栗谷)이 젊어서부터 글에 힘을 쏟지는 않았지만 천연(天然)에서 나와 평정명쾌(平正明快)하여 이른바 의식(衣食)과 같은 문장이라 평하였다[栗谷自少爲文不甚著力, 而文章出於天然, 平正明快, 眞所謂布帛菽粟之文也].
그가 남긴 시의 경향은 다양하여 도학의 성취를 보여주는 설리시(說理詩)도 있지만, 여반(館伴)으로 있을 때의 수창시(酬唱詩)와 개인의 정감을 노래한 서정시, 경물의 흥취를 읊은 서경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정언묘선서(精言妙選序)」에서 성정(性情)을 음영(吟詠)함으로써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 존성(存性)에 도움이 된다하여 시의 가치를 인정하였거니와[詩雖非學者能事, 亦所以吟詠性情, 宣暢淸和, 以滌胸中之滓穢, 則存性之一助], 직접 시선집(詩選集)을 편찬하고 시품(詩品)을 ‘충담소산(沖淡蕭散)’, ‘한미청적(閑美淸適)’, ‘청신쇄락(淸新灑落)’, ‘용의정심(用意精深)’, ‘격조청건(格調淸健)’, ‘정공묘려(精工妙麗)’ 등으로 나누어 놓기도 하였다.
대표작 「산중(山中)」을 보인다.
採藥忽迷路 千峰秋葉裏 | 약을 캐다 갑자기 길을 잃었더니 왼 산 봉우리 가을잎 속에 있네. |
山僧汲水歸 林末茶烟起 | 산승(山僧)은 물을 길러 돌아가는데 숲가에는 차 끓이는 연기 피어오르네. |
사경(寫景)이 적실(的實)하여 원경(遠景)을 담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송익필(宋翼弼, 1534 중종29~1599 선조32, 자 雲長, 호 龜峯ㆍ玄繩)은 신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이(李珥)와 친교를 맺은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을 받은 학자이다. 학문과 문장을 겸비하여 팔문장(八文章)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으며, 시(詩)는 성당(盛唐)의 풍격을 지녔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宋龜峯以擊壤之理學, 兼盛唐之風韻, 誠不可當. -『호곡시화(壺谷詩話)』 13 / 宋儒理窟唐詩調, 屈指東方有此翁. -黃玹, 「讀國朝諸家詩」].
「남계모범(南溪暮泛)」을 보인다.
迷花歸棹晩 待月下灘遲 | 꽃에 미혹하여 돌아가는 배 저물고 달뜨기 기다리다 여울 내려가기 더디네. |
醉睡猶垂釣 舟移夢不移 | 취중에도 오히려 낚시 드리우니 배는 가는데도 꿈은 움직이지 않네. |
학자의 시작(詩作)에서는 정감(情感)의 유로(流露)가 최대한으로 억제되거나 여과(濾過)되어 표출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전편에 시인으로서의 서정과 취흥(醉興)이 넘치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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