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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당쟁의 사상적 뿌리(사단칠정논쟁, 기축옥사, 정여립, 정철)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2장 병든 조선, 당쟁의 사상적 뿌리(사단칠정논쟁, 기축옥사, 정여립, 정철)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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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의 사상적 뿌리

 

 

심의겸과 김효원의 인물됨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치졸한 당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그들이 치졸한 인물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심의겸은 내내 검소하게 생활했고, 특별히 권세를 부리지도 않았으며, 공명정대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또한 김효원 역시 나중에는 당쟁의 발생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 자중하여 지방관으로 일하다 죽었다. 따라서 당쟁의 책임을 그들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당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것은 사실 조선이 사대부(士大夫) 국가로 접어든 데 따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같은 시기 명나라에서도 역시 사대부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중종(中宗) 대에 이르러 국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고, 명종(明宗)선조(宣祖) 대를 거치면서 그 상징성마저도 더욱 격하되었다. 권력의 중추가 사라졌으니 사실상 왕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이 공화국인 건 더더욱 아니며, 실권 사대부들은 왕국이라는 정체(政體)를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지배 집단 간에 권력 독점을 위한 경쟁이 일어날 것은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게 하필이면 당쟁이라는 치졸한 형태를 취한 이유는 성리학이라는 황폐한 지배 이념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왕국인 이상 국왕은 형식상으로 절대권력자이며, 따라서 사대부들이 입안하고 집행하는 모든 명령은 왕명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속된 말로 모든 일에 왕의 이름을 팔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국정을 사대부(士大夫)들이 처리한다는 점에서 보면 국왕은 사대부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렇듯 국왕이 상징적 절대자이자 꼭두각시라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대부들은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에서 무엇보다 명분’(더 고상한 표현을 쓴다면 상징조작이라고 할까?)을 최우선으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생리적으로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정치 이념이 더해지면서 조선의 사대부 정치는 거의 명분 다툼으로만 전개된다. 말만의 역모와 허울만의 반역자가 양산되고 각종 사화(士禍)와 옥사가 빚어지는 조선 특유의 정치문화는 바로 그런 권력구조의 메커니즘과 성리학의 이념이 결합되어 생겨난 결과다. 그런데 명분의 정당성이란 원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사대부들은 자신의 명분이 다수 의견으로 채택되도록 하기 위해 자파의 세력을 늘리는 데 부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당쟁이다. 결국 당쟁은 조선의 정치 역학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선조(宣祖) 때 정치적인 당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미 명종(明宗) 때부터 사상적인 당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법 철학적인 양상을 띠며 진행되었는데, 대표적인 게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1527~72)이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쟁이다. 사단이란 인(), (), (), ()로 대표되는 유교적 인간 본성의 네 가지 단서, 즉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를 뜻하며, 칠정이란 인간 본성이 사물을 접했을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 (), (), (), (), (), ()을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꾼다면 사단은 주로 이성적 측면이고 칠정은 감정적 측면인 데, 중요한 것은 양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는 문제다.

 

이에 관해 이황은 처음에 사단은 이()의 발현이고 칠정은 기()의 발현이라고 도식화했다()와 기()의 관계도 독자적인 쟁점이 되지만, 쉽게 봐서 이는 형이상학적인 본질이고 기는 형이하학적인 현상이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이가 원리이고 존재라면, 기는 그 원리의 양태이며 그 존재의 생성이다. 이가 없으면 당연히 기가 발현될 수 없지만 이는 또한 기의 발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게 되므로 양자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렇듯 인간과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둘이므로 둘 중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학자들 간에 의견이 대립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강조하면 주리론(主理論)이 되고 기를 강조하면 주기론(主氣論)이 된다(흔히 동양 철학은 일원론이라고 보기 쉬운데, 실은 이원론적 경향이 강하다). 서양 철학에 비유하자면 전자는 플라톤 철학에 가깝고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후배인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그렇듯 확연히 분리하는 게 옳으냐고 공박한다(인간에게서 이성과 감정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을 연상하면 쉽다). 그러자 이황은 사단과 칠정, 이와 기를 온통 뒤섞어 놓으면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기대승은 그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이황에게 명확한 개념 정립을 요구하면서 사단과 칠정은 둘 다 기에서 발현된다는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그가 죽자 이번에는 이이가 대타로 나선다. 이황의 중심이 실은 기보다 이에 있음을 간파한 이이는 이가 아니라 기를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기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면서 사단을 칠정에 포함시킨다. 여기에 대해서 다시 이황의 제자인 성혼(成渾, 1535~98)이 나서 주리론적 입장에서 사단을 이에, 칠정을 기에 귀속시키며 이이와 2차 논쟁을 전개한다.

 

언뜻 복잡해 보이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인간의 이성과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며, 이와 기의 배분을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다. 양측의 논쟁은 치열했으나 그래도 철학 논쟁답게 서신을 매개체로 할 만큼 점잖았으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는 식으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철학 논쟁치고는 쟁점이 지나치게 소박하고 조악해진 이유는, 성리학이 그 생리상 심성론과 연관된 철학으로서 출발한 게 아니라 유교 이념에 입각한 사회ㆍ정치 질서를 구축한다는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출발했던 탓에 추후에 철학적 옷을 입혀 체계화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주희성리학을 창시한 본래 목적은 금나라 오랑캐의 지배를 받게 된 중국의 상황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단칠정에 관한 논쟁은 이후 18세기까지도 무릇 학자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거드는 주제가 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며 성리학은 어느 정도 철학적 체계화를 이루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의 본바탕은 사라지지 않는다(현대의 동양 철학이 철학적으로 서양 철학에 비해 크게 뒤진 이유는 그런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사상적 당쟁이 정치적 당쟁으로 이어지는 접점에 해당하는 인물은 이이와 성혼이다. 비록 학문적 견해는 달랐어도 두 사람은 이황으로 대표되는 영남학파(지방색을 떼어 버리려면 이황의 호를 딴 퇴계학파退溪學派라고 불러도 된다)에 맞서 기호학파(畿湖學派), 즉 경기와 호서(충청도)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파를 구성했다. 어디까지나 학파였던 만큼 정치적 당파는 아니었으나 이렇게 학문의 영역에서조차 무리를 이루어 대립하는 양태는 당쟁의 시대가 본 궤도에 올랐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원래 학문의 발전이란 주로 학자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학문을 문화의 한 부문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학문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주목할 만한 학문적 성과는 학자 개인의 관심과 연구를 통해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집단적인 학파가 형성된 이유는 유학의 근저에 놓인 정치 이데올로기적 속성 때문이다(그래서 사대부를 학자-관료라고 부른 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 학술 문헌들이 대부분 집단 창작물인 것도 개인의 연구 작업이 중시되지 않은 데서 나온 전통이다. 개인 연구든 집단 창작이든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런 전통 때문에 오늘날에도 학맥이 판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사상적 당쟁과 정치적 당쟁이 함께 어우러지면 뭔가 사건이 터져나올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1589년 드디어 서인과 동인은 한 차례 크게 맞부딪쳐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라는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

 

학문적으로는 라이벌이지만 학파로는 동지였던 이이와 성혼은 정파로도 서인에 속하는 동지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의 주목과 관심 속에서 성장하던 정여립(鄭汝立, 1546~89)이라는 제자가 묘한 행적을 보인다. 스승인 이이를 배반하고 동인 편으로 붙는가 싶더니 이이가 죽자 서인의 단독 거두가 된 성혼을 거세게 비판한 것이다(그가 이이를 배신한 것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한 탓이었으니, 이래저래 이조전랑은 골치아픈 자리다). 그러나 당시는 서인이 득세하고 있었으므로 정여립은 곧 서인들에게 밀려 중앙 관직을 얻지 못하고 고향인 전주로 낙향한다. 물론 서인의 촉망 받는 신인이었다가 편을 바꾸었으니 동인들에겐 혜성같이 나타난 슈퍼스타다. 스타가 된 덕분에 고향에서 관직도 없이 지내는 그에게 동인에 속한 지방관들이 줄줄이 꼬여든다.

 

자신의 신세를 처량히 여기던 정여립이 그것을 반전의 기회로 여긴 것은 당연하다. 그는 주변 인물들로 대동계(大同契)라는 일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매달 한 차례씩 활쏘기 대회를 여는 등 지역의 유지라는 신분을 넘어선 정치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게다가 승려와 규합해서 전주에서 장차 왕이 탄생할 것이라는 등,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흥할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민간에 퍼뜨린다(‘木子이고 奠邑이란 이니 —— 과 같다 —— 말할 것도 없이 이씨가 망하고 정씨인 자신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이야기다). 심지어 그들이 기축년(1589) 말에 한양에까지 진격할 것이며, 구체적인 책임 부서까지 정해놓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이와 관련해서 조선 초기부터 나돌던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이 있다. 정도전이 지었다는 설이 있는 이 책은, 도참설과 풍수지리 등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깔고 은유와 파자(破字)를 많이 써가면서 장차 정씨 성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이씨 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구하리라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정여립의 사건을 비롯해서 이후에 일어난 민란들 중 상당수가 정감록과 정신적인 연관을 가지게 된다(물론 모두 이씨 조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탓인데, 이를 바꿔 말하면 사대부(士大夫) 국가가 아닌 진정한 왕국을 꿈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문을 들은 서인이 가만 있을 리 없고, 이성을 가진 선조(宣祖)가 그냥 놔둘 리 없다. 서인 세력과 선조는 즉각 동인과 정여립 일당에 대해 일망타진에 나선다. 한양에서 선전관(宣傳官, 왕명을 집행하는 무관)과 의금부(義禁府, 반역ㆍ모반 같은 중죄를 담당한 수사기관) 도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정여립은 그간의 기세에 어울리지 않게 금세 꼬리를 내리고 자살했으나, 파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동인이 여당이었던 시절에 동인의 탄핵을 받아 죽어지낼 동안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같은 노래나 지으며 신세를 한탄했던 정철(鄭澈, 1536~93)은 이 사건을 특별히 담당하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어, 동인의 보스인 이발(李潑, 1544~89)을 비롯해서 수십 명의 동인 측 사대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고 유배보내며 오랜만에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정여립이 실제로 역모를 꾀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지만, 역모가 사건으로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대규모 옥사가 빚어졌으니, 역시 말만의 역모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정여립 모반 사건은 앞서의 사화(士禍)들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사화의 경우와 다른 점은 이제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아니라 사대부들 간의 사적인 친분 관계(당파)조차 쉽게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왕실 외척들끼리 세력다툼을 벌인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제외하면, 그동안 말만의 역모는 국왕 대 사대부(士大夫)의 대결(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결(기묘사화)을 거쳐 당파 간의 무한 대결로까지 발전(?)했다. 이제 사대부 정치는 올 데까지 왔고 타락할 데까지 타락했다. 그 다음은 뭘까?

 

 

구름 속의 논쟁 이황과 기대승의 논쟁은 그때까지 성리학에 철학적 뿌리가 없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그러나 뒤늦게 학자들이 성리학을 포장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무렵 일반 사회에서는 이미 체제의 모순이 폭발하고 있었다. 홍길동과 임꺽정이 바로 이 시기에 활약했다. 왼쪽은 17세기에 소설화된 홍길동전의 표지이고, 오른쪽은 20세기에 신문 연재된 임꺽정전의 삽화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양아치 세상

윗물이 흐리면

동북아 질서의 근본구조

사대부들의 집안 싸움

당쟁의 사상적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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