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태(洪世泰, 1653 효종4~1725 영조1, 자 道長, 호 柳下)는 역관출신으로 그 시명이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알려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위항시인이다.
홍세태(洪世泰)는 스스로 『유하집(柳下集)』 권6 「추회시(秋懷詩)」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骨相判爲當世棄 | 뼈의 생김새야 판이하여 당세를 위해 버려졌지만 |
文章留與後人知 | 문장만은 남아 후배들에게 알려지리. |
이처럼 문학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정립코자 하였다. 이에 그는 역관이라는 자신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독서지사(讀書之士)’ 또는 ‘소유(小儒)’로 인식하면서 평생을 가난 속에서 여행과 시업(詩業)으로 일관하였다.
또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위항인 48인의 작품을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편찬하여, 이 다음의 『소대풍요(昭代風謠)』ㆍ『풍요속선(風謠續選)』ㆍ『풍요삼선(風謠三選)』 등 본격적인 위항시집(委巷詩集) 간행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홍세태(洪世泰)는 임준원(林俊元)ㆍ최승태(崔承太)ㆍ유계홍(庾繼弘)ㆍ김충렬(金忠烈)ㆍ김부현(金富賢)ㆍ최대립(崔大立) 등과 어울려 낙사(洛社)를 결성하여 시작활동을 하는 한편,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으로부터 시(詩)를 인정받아 김시민(金時敏), 신정하(申靖夏)ㆍ이병연(李秉淵) 등의 사대부 문인들과도 교유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김창흡(金昌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김창흡(金昌翕)이 자신의 시집 편집을 홍세태(洪世泰)에게 맡기도록 유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학적 교유를 통해 홍세태(洪世泰)는 김창협(金昌協)ㆍ김창흡(金昌翕)을 이어 천기(天機), 진시(眞詩)의 문학론을 전개하여 이를 정래교(鄭來僑) 등의 위항시인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홍세태(洪世泰)는 「해동유주서(海東遺珠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경(寫景)이 청원(淸圓)한 것은 봄 새와 같고 서정(抒情)이 비절(悲切)한 것은 가을 벌레 같도다. 느낀 바가 있어서 울리는 것은 천기(天機) 중에 자연(自然)스럽게 유출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진시(眞詩)이다.
若夫寫景之淸圓者其春鳥乎, 而抒情之悲切者其秋虫乎. 惟其所以爲感而鳴之者, 無非天機中自然流出, 則此所謂眞詩也
이처럼 홍세태(洪世泰)는 자신들의 새로운 시를 진시라 명명하며, 이를 작시의 원리로 적극적으로 차용하기에 이른다. 홍세태(洪世泰)는 진시(眞詩)란 어떤 것인가를 말하기 위하여 그의 「정남린(呈南隣)」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始輟咨文草 身閑趣可知 | 서류뭉치 비로소 처리하고 나니 몸 한가로워 흥취를 알겠도다. |
烟生溪上屋 雀聚雨中枝 | 연기는 시냇가 지붕에 피어 오르고 참새는 비오는 가지 밑에 모여 드네. |
末路看棊累 浮名覺黍炊 | 말로에 인생살이 바둑알 쌓은 듯 기우뚱하고 허명(虛名)은 한갓 일장춘몽이라네. |
隨緣有憂樂 寫出卽眞詩 | 인연 따라 즐겁기도 슬프기도 하니 그려내면 곧 진시(眞詩)라네. 『柳下集』, 권11. |
이 시에서 보인 대로 위항인 홍세태(洪世泰)는 일상적 생활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이 곧 신시(新詩)요, 진시(眞詩)임을 말하고 있다. 애써 꾸미려하지 않는 진솔함이야말로 홍세태(洪世泰)로 하여금 좋은 시를 쓰게 한 권능(權能)이 되었는지 모른다. 농암(農巖)ㆍ삼연(三淵) 등으로부터 시재(詩才)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 하겠다.
한편 홍세태(洪世泰)는 위항(委巷)에서 나온 시야말로 시경(詩經)의 정신을 이은 것이라 하여 자신들의 시에 한층 자부심을 가졌다. 이러한 자부심이 호기롭게 표출되고 있는 시가 「등선천의검정억김장군응하(登宣川倚劍亭憶金將軍應河)」이다.
當日宣川守 深河戰不歸 | 그 날 선천태수는 심하에서 싸우다 돌아오지 않았네. |
大東臣獨有 中國事全非 | 이 나라에는 신하가 있는데 중국은 일이 온전히 틀려졌네. |
尺劍餘秋色 孤城半落暉 | 한 자의 칼에는 가을빛이 남았고 외로운 성에는 저녁빛이 떨어지네. |
悲歌塞天闊 倚馬看雲飛 | 슬픈 노래는 넓은 하늘에서 막히어 말에 기대어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네. 『소대풍요(昭代風謠)』권4. |
이 시는 홍세태(洪世泰)가 선천의 의검정에 올라 중인 출신의 김응하(金應河) 장군을 기린 것이다. 김응하는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칠 때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천명의 휘하 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대패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홍세태(洪世泰)는 자신과 같은 중인 출신의 무장 김응하의 의기를 기리면서 자신들의 위상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홍세태(洪世泰)와 더불어 이 시기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위항시인으로 정래교(鄭來僑)ㆍ정민교(鄭敏僑) 형제를 꼽을 수 있다. 역시 김창흡(金昌翕)을 정신적 지주로 삼은 정래교(鄭來僑)는 당시의 여러 위항시인 및 가객들과 교유하면서 천기(天機)의 유출을 실감케 하는 시작 경향을 보여주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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