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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13. 선과 악을 넘어서(위악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13. 선과 악을 넘어서(위악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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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물결을 거스르며

 

 

13. 선과 악을 넘어서

위악 이야기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앎에는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것으로 한계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이다. 그런데 도 계속 앎을 추구하려는 자는 더더욱 위태로워질 뿐이다.

吾生也有涯, 而知也無涯. 以有涯隨無涯, 殆已!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督脈)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그러면 몸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고, 삶을 온전하게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기를 수 있고,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다.

爲善無近名, 爲惡無近刑,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양생주1, 2

 

 

바로 이곳, 이 순간, 이 삶

 

장자의 사유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타자문맥일 겁니다. 물론 장자가 이 키워드를 개념화해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두 키워드가 개념으로 주제화된 것은 20세 후반기 이후부터입니다. 이것이 장자라는 이야기책이 아직도 낡아 보이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이미 2,500여 년 전에 장자는 현대 서양철학자들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타자와 문맥을 숙고하니까요. 구체적으로 말해 개나 새, 물고기뿐만 아니라 같은 종()에 속한 동료 인간도 장자에게는 모두 타자입니다. 나와는 다른 생각이나 감정 혹은 욕망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또한 장자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한 문맥들로 구성된다고, 한마디로 세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타자의 타자성과 문맥의 복수성! 이 두 가지는 장자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읽을 때 나침반이 됩니다. 당연히 장자는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시간에 적용되는 삶을 부정합니다. 신조어를 만들어본다면 장자는 모든 주의(all-ism)’에 날을 곤두세웠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죠. 앎이 함축하는 모든 주의의 핵심은 일반명사로 상징되는 언어의 추상성과 개체의 질적 차이를 사장하는 숫자의 양화 가능성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은 합리적이다” “여자에게는 모성이 존재한다” “유목민은 야만적이다” “장미 열송이를 꺾어 와!” “소 열 마리를 동원하라” “회비는 만 원씩 내세요등등. 여기서 개체의 질적 고유성, 즉 단독성은 사장되고 맙니다. 각각의 인간 각각의 여자, 각각의 유목민, 각각의 장미, 각각의 소들이 자기만의 특성이 있고, 자기만의 상황이 있다는 것이 무시되니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추상적 사유나 양화된 사유가 지배자의 사유 혹은 지배에 도움을 주는 사유라는 사실입니다. 상명하복의 지배체제가 유지되고 성장하려면, 이 체제의 혈관에는 문자와 숫자라는 피가 돌아야만 합니다.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 정확히 말해 국가라는 지배와 복종의 체제가 문자와 숫자의 발명과 함께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문자와 숫자가 없는 법률, 세금, 예산, 군사, 행정 등등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일반명사가 없다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분류할 수 없고, 숫자가 없다면 일반명사에 속하는 것들을 양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죠. 문자와 숫자로 작동하는 삶은 타자의 고유성이나 문맥의 복수성을 무시하고, 그래서 본질적으로 지배 지향적이고 제국주의적입니다. 문자와 숫자를 다루는 노동, 즉 정신 노동은 상명하복 체제에서는 육체노동에 비해 우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생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또는 사회적 인정을 얻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노동, 즉 앎을 지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묘한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타인이나 사물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데 유용한 앎이 삶의 주체마저도 지배하고 통제하기 때문이죠. 다시 말해 앎의 주체는 자신의 단독성을 망각하거나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없어도 된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여기서 나옵니다. 내가 없어도 다른 것이 나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요.

 

앎이 우리 삶을 위태롭게 한다고 경고하면서 장자가 위악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배와 억압의 칼날을 타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휘두르는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납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우리 삶에는 한계가 있지만, 삶에는 한계가 없다고 여기서 한계로 풀이한 한자 ()’가 중요합니다. 땅과 물 사이의 경계, 즉 물가라는 뜻입니다. 땅과 물의 차이 혹은 물의 타자성이나 외부성을 부정하면, 우리는 물에 빠져 죽을 수 있습니다. 땅을 걷듯 물 위를 걸으려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삶에 한계가 있다는 장자의 이야기를 부정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장자는 인간 삶이 한계가 있다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유한성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장자는 한계가 없는 삶, 영원한 삶, 신과 같은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비유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장자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플라스틱 조화(造花)가 아니라 피었다 지는 생화(生花)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 조화가 되려는 생화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예를 들어 밀봉해서 유리 안에 넣거나 냉동해서 진공 속에 두는 겁니다. 그러면 불행히도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사라지고 미라나 박제로 남는 셈입니다. 그래서 장자에게 있어 무한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은 자살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바로 이곳, 바로 이 순간, 바로 이 삶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꽃이 필 수 있고 질 수도 있고, 행복도 있을 수 있고 불행도 있을 수 있습니다. 풍요로운 색채들의 삶과 세계는 이런 긍정에서 가능해집니다. 인간, , 꽃 등등 일반명사가 무한한 삶을 상징한다면, 바로 나,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반려견,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화분의 바로 그 꽃은 유한한 삶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바로 나, 바로 너, 내 반려견, 당신이 준 꽃 등은 죽을 수 있지만, 인간 일반, 개 일반, 꽃 일반은 죽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요. 영원, 그건 저주받은 박제의 상태, 조화처럼 세상에 반응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상태, 단조로운 무채색의 상태와 다름없습니다.

 

 

 

 

 

나는 나의 욕망을 욕망할 수 있어야 한다

 

위악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유한한 삶과 무한한 삶의 대조가 너무 추상적일 수 있다는 장자의 노파심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내립니다. 장자의 충고를 제대로 음미하려면 먼저 앎의 주체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앎의 주체가 되려는 욕망의 바닥에는 지배자가 쓸모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되려는, 어느 면에서는 생존을 향한 너무도 서글픈 욕망이 깔려 있습니다. 달리 말해, 쓸모가 없다면 자신이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어린아이와 같은 욕망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미숙아로 태어납니다. 야생마와 비교해보세요. 새끼 망아지는 어미 자궁에서 태반과 함께 나온 뒤 곧 태반을 찢고 스스로 일어섭니다. 10여 분이 지난 뒤 망아지는 걸을 수 있습니다. 사실 태어난 곳에서 빨리 떠나야만 합니다. 어미가 업어주지 못하니 스스로 걸어야 합니다.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피 냄새를 맡은 육식동물들이 곧 몰려올 테니까요. 반면 인간 아이는 스스로 서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니 혼자 힘으로 생존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 아이는 어머니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어머니가 반드시 생물학적 어머니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버지나 고아원 원장일 수도 있고,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아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주어야 한다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 바로 그가 어머니입니다.

 

집 안 정리를 하는 것도, 개다리춤을 추는 것도, 혹은 유치원에서 상장을 받으려는 것도 모두 부모의 사랑을 받으려는 행동입니다. 깨끗한 방을 좋아해서도 개다리춤을 추면 행복해서도, 혹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야 그 사람의 사랑과 돌봄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본능적인 판단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캉의 격언은 바로 이 대목에서 의미를 갖습니다. “나는 부모가 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동생이라도 생기면 아이의 부모의 사랑에 대한 갈망은 더 절박해지고 강해집니다. 부모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경쟁자가 생긴 셈이니까요. 바로 이 순간 동생과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이어서 동생보다 우위에 서려는 경쟁심이 생깁니다. 보통 최초의 타자는 어머니이고, 그 다음은 유치원이나 학교의 선생님일 겁니다. 유치원이나 학교에서의 생활이 안정적이려면 선생님의 애정과 관심을 받아야 하니까요. 불행히도 유치원이나 학교에는 경쟁자가 더 많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생면부지의 남이기에 경쟁은 잔인한 성격마저 띠곤 합니다. 결국 인간은 두 종류의 타자와 만나게 됩니다. 부모-타자와 동생-타자, 혹은 선생님-타자와 급우-타자입니다.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고 믿는 타자와 그 타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타자, 아니면 절대적 타자와 비교 대상으로서의 타자라고 해도 좋습니다. 언젠가 집을 떠나게 되므로 더 이상 부모가 원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또한 언젠가 졸업을 하게 되니 더 이상 선생님이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물론 사랑받아야 한다는 갈망과 사랑을 차지하려는 경쟁은 우리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구조적 상처를 남깁니다.

 

집과 학교를 떠나면 원칙적으로 우리는 타자와 무관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미성숙한 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나는 나의 욕망을 욕망할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히도 국가로 상징되는 억압체제가 탄생한 뒤로 어른으로 가는 길은 무한히 멀어지고, 심지어 막히게 됩니다. 강력한 상명하복체제와 경쟁체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으니까요. 집이나 학교보다 더 냉혹한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마치 공기처럼 우리의 폐까지 스며들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고 맙니다. 인류학적 차원의 구조적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이제 골수에까지 새겨지는 형국이죠. 오히려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이 그리워질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단순합니다. 집이나 학교를 떠나듯 국가나 자본주의를 떠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고 믿는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나 자본의 질서를 강화하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마보이나 마마걸보다 무서운 국가보이나 국가걸 혹은 자본보이나 자본걸이라는 괴물이 되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희망은 있습니다. 유년 시절이나 학창 시절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은 반항함으로써 부모나 선생님의 관심을 받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지 않지만 자신이 원해서 몰래 무언가를 하는 행동도 가능합니다. 부모나 선생님이 원하는 것과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팽팽하게 맞서던 경험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게 됩니다. 부모의 왕국이나 선생님의 왕국이 아닌 나만의 왕국은 이렇게 자라게 됩니다.

 

 

 

 

 

독맥적인 것을 따르기

 

체제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삶을 사는 것,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것, 동료들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어른의 길입니다. 문제는 어른이 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하다는 아니 정확히 말해 나약하도록 훈육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어른이면서도 어른이기를 포기한 자신의 비겁함을 숨기려면, 우리는 상명하복의 사회나 경쟁을 강요하는 사회를 바꿀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면 우리 삶은 무거워지고 우울해집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무거움과 우울함이 반복되면 우리 삶은 죽음보다 더 불행해질 겁니다. 그래서 당장 억압사회를 떠나거나 극복할 수 없어도 잠시 숨이라도 쉬려면, 우리는 삶의 경쾌함과 시원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 미약하나마 자기 삶과 자기 욕망이 조금씩 자라나게 될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장자는 완전한 어른이 되는 길에 하나의 디딤돌을 놓습니다. 한달음에 어른이 되기 힘들다면 잠시 쉬면서 도약을 준비할 수 있는 중간 단계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것이 바로 억압사회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실천강령입니다. “선을 행해도 명성에 가까워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더라도 형벌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

 

실천 강령에 등장한 선과 악은 억압체제가 규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체들이 하기를 체제가 원하는 것이 선이라면, 반대로 개체들이 하지 않기를 체제가 원하는 것이 악이라는 겁니다. 아이가 말을 잘 들으면 안아주고 말을 잘 듣지 않으면 화를 내는 부모처럼, 체제는 개체가 말을 잘 들으면 명성을 높여주고 반대로 말을 안 들으면 형벌을 가합니다. 억압체제에 완전히 포획된 사람은 명성을 얻고 형벌을 피하기 위해 체제가 정한 선을 시행하고 악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사이에 그는 자신만의 욕망과 삶을 망각하고 말지요. 그렇지만 자신만의 왕국을 꿈꾸는 사람은 가급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체제가 선이라고 한 것을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가 선이라고 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선이라고 느껴서 행한 겁니다. 그렇기에 그는 체제의 칭찬을 멀리하려고 하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칭찬은 치명적인 데가 있습니다. 아이가 무언가를 하도록 유도할 때 부모도 칭찬을 앞세우니까요. 칭찬에 노출되면 자신도 모르게 체제가 원하는 선을 행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른이 되려는 사람은 체제가 싫어하는 악을 행하려고 합니다. 체제가 싫어한다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하겠다는 의지입니다. 물론 막을 향할 때는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체제는 악을 저지른 개체에게 형벌을 가하기 때문이죠, 형벌로 풀이한 형()은 성기를 자르는 궁형(宮刑),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월형(刖刑), 목을 자르는 참형(斬刑) 등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형벌에 처해지면 개체의 삶은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되고 말죠.

 

체제가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면 은밀히 행하라는 장자의 충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나 살인마들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이코패스나 살인마들에게는 체제가 원하는 것과 자신이 원하는 것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라고는 없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상명하복과 경쟁을 강요하는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들로, 동료 인간들보다 우위에 서서 체제의 인정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공정한 경쟁으로는 타인들 위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낮은 위치에 있는 자신을 너무나 증오합니다. 그들이 약자를 찾아 감금하거나 죽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피해자가 낮은 위치에 있고 자신은 높은 위치에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정말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억압체제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다 그 논리를 어긴 셈이니까요. 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은밀하게라도 관철하려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자신만의 욕망, 자신만의 삶을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독맥적인 것 따르기를 기준으로 삼아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황제내경(黃帝內經)등 동양의학 전통에 따르면, 독맥(督脈)은 생식기에서 등 뒤로 척추를 거쳐 뇌까지 흐르는 맥으로 양기(陽氣) 를 관장합니다. 그래서 독맥적인 것을 따른다는 것은 척추로 상징되는 당당함과 양기로 상징되는 경쾌함을 기준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당당하고 경쾌한 삶!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하지 못해도, 아니 억압체제를 떠나거나 극복할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가치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12. 보편적인 것은 없다 / 14. 왓 어 컬러풀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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