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인과율을 가로지르며
그림자 이야기
반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그대는 걷다가 지금은 그대는 멈추었소. 조금 전 그대는 앉았다가 지금은 일어났소. 어찌 그대는 이렇게 무언가를 잡지 못하고 있는 거요?”
罔兩問景曰: “曩子行, 今子止; 曩子坐, 今子起. 何其無特操與?”
그림자가 말했다. “내가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또 내가 의존하는 것 또한 다른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뱀의 비늘과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일까?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景曰: “吾有待而然者耶? 吾所待又有待而然者耶? 吾待蛇蚹蜩翼耶? 惡識所以然? 惡識所以不然? 「제물론」 25
반그림자의 불평불만
대학에서는 경제학, 경영학, 법학, 사학, 사회학, 전자공학, 건축학, 영문학, 음악학 등 다양한 전공 학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전공에 ‘학’이라는 용어가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루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원인과 결과에 입각해 사유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경제학만 보더라도, 물가 상승의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조작해 물가안정을 도모하려 하죠. 사회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찾아 자살률을 낮추려고 시도합니다. 자연과학이나 공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발광현상의 원인을 찾아 그 현상을 통제하려 하죠. 영문학도 인과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어떤 작품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원인을 해명하지 않으면 영문학 논문은 쓰일 수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근사한 현악기를 연주하는 원리를 해명하려 해야 음악학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인과율(causality)은 인간의 학문이나 지적 활동의 중추에 해당합니다. 한마디로 지성인은 ‘왜(why)?’라는 질문에 머뭇거리지 않고 가능한 한 많은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인 셈입니다. 지성인이 아닌 일반 사람들도 인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온다는 생각, 신에게 기도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아이를 A학원에 보내면 성적이 오를 것이라는 생각, 집 안 분위기를 바꾸면 부부 관계가 새로워질 것이라는 생각 등등에도 인과율이 깊게 스며들어 있죠. 인간 사유의 자기반성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사유가 인과율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과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자신의 삶, 사회의 운명, 나아가 자연의 흐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장자가 탁월한 이유들 중 하나도 그가 인과 관념의 보편적 한계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가급적 삶과 세계의 흐름에 부합하는 새로운 인과율을 제안했기 때문이죠. 이것이 장자가 단순한 해체론자나 회의주의자가 아닌 일급 철학자인 이유입니다. 바람 이야기에서 바람 소리로 비유되는 마주침의 존재론에 인과에 대한 장자의 사유가 응축되어 있죠. 바람 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바람이 내는 소리일까요? 장자는 나무나 땅에 만들어진 구멍이 없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을 거라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바람 소리는 구멍의 소리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바람과 구멍이 마주쳐서 내는 소리가 바람 소리라는 이야기죠. 바람 소리라는 결과가 하나라면 그 원인은 둘입니다. 원인의 복수성(plurality)! 장자의 인과 관념의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특정 결과보다 원인은 더 많다는 발상입니다. 장자의 영민함은 그가 자신이 제안한 인과율도 기존의 모든 인과 관념이 가지는 위험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자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제물론」 편 거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그림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림자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쉬워 보입니다. 반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그림자 이야기에서 ‘반그림자’로 번역된 ‘망양(罔兩)’은 ‘그림자의 그림자’를 의미합니다. 뜨거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날, 나무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옵니다. 그 짙은 그림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 테두리에 살짝 옅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림자의 그림자, 망양이자 반그림자입니다. 전기 스탠드나 촛불의 그림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반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그림자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조금 전에 그대는 걷다가 지금은 멈추었소. 조금 전 그대는 앉았다가 지금은 일어났소. 어찌 그대는 이렇게 무언가를 잡지 못하고 있는 거요?” 반그림자는 고요하고 평화롭게 있고 싶었나 봅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정신없이 분주한 원인을 찾아봅니다. 우리는 원하지 않은 상황에 처하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경향이 있지요. 그림자의 그림자인 망양은 그림자 때문에 자신이 너무 바쁘게 움직인다고 단정한 겁니다. 그림자는 반그림자의 불평불만에 대응해 말합니다. “내가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또 내가 의존하는 것도 또한 다른 무언가에 의존해서 그런 것일까? 나는 뱀의 비늘과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일까?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고 말합니다. 그림자도 형체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그림자는 반그림자가 자신을 탓하듯 형체를 탓하면 되죠. “반그림자야. 네가 싫어하는 분주함에 대해 나를 탓하면 안 돼. 내가 분주한 것도 형체 때문이니 형제한테 따져!” 형체에게 책임을 미루면 끝날 이야기입니다. 뱀의 비늘이든 매미의 날개이든 형체가 그림자의 원인이고, 그림자가 반그림자의 원인이라고 끝날 이야기는 묘하게 비틀어집니다. 반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이어서 그림자에서 형체로, 이어서 형체에서 다른 무엇으로 최종 원인을 찾아가는 사유를 그림자는 주저합니다.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가 분주히 움직여 자신이 분주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그림자는 말하니까요. 그림자 이야기는 우리의 사유를 자극합니다. 왜 그림자는 원인을 추적하는 사유에 주저했을까요?
인과 관념의 세 가지 한계와 특성
최종 원인을 찾으려는 반그림자의 사유와 그에 대해 회의적인 그림자의 사유! 두 가지 사유 사이의 미묘한 엇갈림을 포착하기 위해 우리는 인과 관념 일반이 가지는 한계나 특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석도 그에 어울리는 깔판에 올려놔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는 법이니까요.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결론에서 타당한 원인을 추론할 수는 있지만, 원인에서 타당한 결론을 추론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결과로부터의 원인 추론의 타당성’이라 부를 수 있는 인과율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수 있는 특징입니다. 예를 하나 생각해보죠. 우리는 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봅니다. 이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산에 불이 났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연기라는 결과로부터 불이라는 원인을 추론한 셈입니다. 그러나 불이라는 원인에서 우리는 연기라는 결과를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불에서 연기라는 결과를 떠올리는 추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불이 완전히 연소되면 연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 완전한 연소가 힘들기에 불이 있다면 연기가 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죠.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아이가 결과이고 남녀가 원인이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아이를 보면서 아이를 낳은 두 남녀가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거 중인 남녀를 보고 아이가 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됩니다. 남녀는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와 관련된 다른 경우도 결과로부터의 원인 추론의 타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태어난 아이의 특징을 보고 남녀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이 아이가 두 사람의 아이구나 하고 쉽게 납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남녀의 모습을 살펴 그 특징들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태어날 아이의 특징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인과율과 관련해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인과율의 마음 의존성’입니다. 인과율은 인간과 무관한 세계의 법칙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과율은 반은 마음 밖의 세계와 관련되고 나머지 반은 우리 마음과 관련되기 때문이죠. 먼저 결과로부터 원인을 타당하게 추론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산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봅니다. 이 연기를 결과로 해서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불이라는 원인을 추론합니다. 어떤 모양의 불을 떠올린다고 해서 그 마음속의 불이 저 산의 보이지 않는 불과 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 직접 산에 들어가 불을 보면 아마 실제 불의 모양이나 색감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를 겁니다. 다음은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부당하게 추론하는 경우입니다. 우리 앞에는 나무더미에 붙이려는 불이 보입니다. 그러고는 특정한 연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연기가 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대대로 연기가 난다 해도 분명 그 기대한 연기는 모닥불이 실제로 피워내는 연기의 모습과는 다를 겁니다. 결국 원인이 경험되는 것이면 결과는 우리 마음의 기대(anticipation) 속에 있고, 결과가 경험되는 것이라면 원인은 우리 마음의 기억(memory) 속에 있는 것입니다. 원인이 실제적이면 결과는 관념적이고, 결과가 실제 적이면 원인은 관념적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인과율의 마음 의존성이 무엇인지 대략 이해가 될 겁니다. 사실 인과율의 이런 특징 때문에 인과율이 인간과 무관한 객관적 법칙이라는 극단적 주장이나, 아니면 인과율은 세계와 무관한 관념적 법칙이라는 또 다른 극단적 주장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은 전통적인 인과론이 기본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선형적으로 사유한다는 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선형성’이나 ‘결과에 대한 원인의 단수성’이라고 할 만합니다. 연기의 원인은 오직 불 하나에 있다는 발상, 혹은 불 하나에 연기 하나가 대응한다는 발상입니다. 일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적인 사람들도 빠지기 쉬운 오류일 겁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인과의 선형성 혹은 원인의 단수성은 사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특정한 연기는 불 뿐 아니라 바람과 습도, 온도, 나아가 가연성 물질 등이 마주쳐야 나올 수 있습니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달라진다면, 내가 보고 있는 연기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었을 겁니다. 결국 바람 소리를 비유로 들자면 전통적 인과론은 바람 소리의 원인을 바람에서만 혹은 구멍에서만 찾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특정한 구멍도 특정한 바람 소리를 내는 데 결정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사실 특정한 바람 자체도 대기상태, 습도 혹은 지형 등의 마주침으로, 그리고 특정한 구멍도 나무나 땅의 상태나 구멍을 만든 외부 충격 등 다양한 조건들의 마주침으로 사유될 수 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 이제 그림자 이야기의 찬란한 색채를 보여줄 근사한 깔개가 마련된 것 같습니다. ‘결과로부터의 원인 추론의 타당성’을 가로줄로 하고 ‘인과율의 마음 의존성’을 세로줄로 해서 직조한 깔개입니다. 여기에 ‘원인의 복수성’이 멋진 조명등이 될 겁니다.
하나의 반그림자가 태어나기까지
그림자 이야기에 등장하는 반그림자의 입장을 먼저 살펴보죠. 반그림자는 인과의 선형성 혹은 원인의 단수성에 입각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반그림자 → 그림자 → 형체……’라는 식으로 직선을 따라가듯 원인을 찾아나가니까요. 반그림자의 생각에 따르면 반그림자의 원인은 그림자 하나이고, 그림자의 원인은 형체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반그림자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그림자뿐만 아니라 햇빛도 필요합니다. 그림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체만 있으면 그림자가 생길 리가 없죠. 햇빛이 없다면 어떻게 그림자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이제야 장자의 페르소나인 그림자가 왜 자기 이야기에 주저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림자는 원인들의 마주침 혹은 원인의 복수성 입장에서 사유했던 것입니다. 그림자는 자신이 특정 형체, 즉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의 그림자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분명 그런 형체가 없다면 자신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그림자는 태양 등 다른 조건도 형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뱀의 비늘과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일까?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림자는 자신이 형체에 의존하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림자의 주저함은 이런 식으로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만약 마주침의 존재론으로 모든 것이 해명된다면 그림자는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말을 끝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냥 직접적으로 그림자는 “내가 이렇게 존재하려면 형체뿐만 아니라 햇빛 등 다른 원인들도 필요하다네”라고 말하면 되니까요.
그림자의 주저함을 완전히 이해하는 데 마주침의 존재론을 숙고했던 철학자들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도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도 혹은 알 튀세르(Louise Pierre Althusser, 1918~1990)도 있지만,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의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를 읽어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다자(many)’라는 술어는 ‘이접적 다양성(disjunctive diversity)’의 관념을 전달한다. 이 관념은 존재라는 개념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다. 다수의 존재자들이 이접적인 다양성 속에 존재한다. (…) 창조성(creativity)은 이접적 방식인 다자를 연접적인(conjunctive) 방식의 우주인 하나의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로 만드는 궁극적인 원리다. 다자가 복잡한 통일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한다. ‘창조성’은 ‘새로움(novelty)’의 원리다.” 바람 소리는 바람과 구멍이라는 두 원인들이 마주친 결과입니다. 이 마주친 상태를 화이트헤드는 ‘-와(and)-’로 표시되는 연접적인 결합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바람 소리는 ‘바람과 구멍(wind and hole)’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마주치기 전 서로 무관한 바람이나 구멍의 상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화이트헤드가 이접적 다양성이라고 말하고 ‘바람 혹은 구멍(wind or hole)’으로도 표현될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바람은 구멍과 마주치지 않은 채 불고 있고, 구멍은 바람과 마주치지 않은 채 텅 빈 구멍으로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설명은 단순합니다. ‘바람 혹은 구멍’의 상태에서 바람과 구멍이 마주쳐 하나의 바람 소리, 즉 ‘바람과 구멍’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존재들, 즉 다자가 마주쳐 연접적 관계가 만들어진 새로운 하나의 존재, 이것이 바로 화이트헤드가 말한 ‘현실적 계기’입니다. 바람 소리는 바로 이 현실적 계기의 하나의 사례였던 것입니다. 다자가 마주쳐 현실적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창조성이자 새로움의 의미라고 그는 덧붙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바람소리에서 우리는 그 창조성이나 새로움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제야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림자가 자신은 형체와 햇빛 등의 마주침에서 탄생했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은 이유를 말입니다. 결론에서 원인을 추론하다 보면 우리는 원인을 중시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복수적 원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림자로부터 ‘형체와 햇빛’을, 이어서 ‘형체 혹은 햇빛’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 그림자가 가진 창조성과 새로움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심하면 해체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렇게 추론된, 서로 마주치지 않은 형체 혹은 햇빛이라는 원인은 아무리 잘해야 우리 관념에 속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생생한 그림자의 창조성과 새로움은 더 희미해지게 되죠. 그림자는 반그림자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런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왜 그렇지 않은지 내가 어찌 알겠는가!”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나는 나야. 나는 형체도 아니고 햇빛도 아니야. 나는 형체나 햇빛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존재야! 설령 형체가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고 햇빛이 비추지 않으면 나도 없어질 테지만 말이지. 그러나 반그림자 친구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형체도 못 하고 햇빛도 못 한다네. 나는 바로 완전히 새로운 그림자라네.” 그렇습니다. 그림자는 인과율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하나의 기적이었던 겁니다. 궁금해집니다. 반그림자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결과이기 전에 하나의 축복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인용
15. 여유와 당당함의 비법 / 17. 자유를 품고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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