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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18. 신과 영혼에 대한 애달픈 갈망(진재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18. 신과 영혼에 대한 애달픈 갈망(진재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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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과 영혼에 대한 애달픈 갈망

진재 이야기

 

 

타자가 아니라면 나도 없고, 내가 아니라면 취할 것도 없다.’

其所由以生乎! 非彼無我, 非我無所取.

 

이것도 근사한 말이지만 그렇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만일 참된 주재자가 있다 해도 그 징후를 알 수 없다. 작용한다는 것은 이미 믿을 수 있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고, 실정 은 있지만 그 형체가 없다. 백 개의 관절,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가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나는 어느 것과 더 가까울까?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좋아하는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들은 신하나 첩이 되는 것일까? 혹은 신하나 첩들은 서로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혹 은 그것들은 차례로 서로 군주와 신하가 되는 것일까? 혹은 거기에 참된 군주가 있는 것일까? 실정을 파악하든 파악할 수 없든, 그 참됨에 대해 보태거나 덜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是亦近矣, 而不知其所爲使. 若有眞宰, 而特不得其眹. 可行己信, 而不見其形, 有情而無形. 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 吾誰與爲親? 汝皆說之乎? 其有私焉? 如是皆有爲臣妾乎? 其臣妾不足以相治乎? 其遞相爲君臣乎? 其有眞君存焉! 如求得其情與不得, 無益損乎其眞. 제물론3

 

 

운명적인 마주침이란 없다

 

제물론편은 장자33편 중 가장 난해한 편입니다. 여기에 속한 이야기들은 섬세한 문학적 감수성뿐만 아니라 냉철한 철학적 지성도 요구하기 때문이죠. 아니나 다를까, 역대 주요 주석가들이나 현대 연구자들이 제물론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편차가 상당히 심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진재(眞宰)’진군(眞君)’을 다루고 있는 진재 이야기일 겁니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과 그들 사이의 사건들을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진재이고, 장기 등 수많은 부분들로 구성된 우리 몸을 통제하는 초월적 마음이 진군입니다. 문제는 진재 혹은 진군이 존재하느냐의 여부입니다. 서양 사유 전통에 따르면 세계와 무관하게 영원히 존재한다는 신, 혹은 신체와 무관하게 사후에도 존재한다는 영혼의 문제인 것입니다. 장자는 진재나 진군 같은 초월적 존재를 인정했을까요, 아니면 부정했을까요? 진재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구절, 만일 참된 주재자가 있다 해도 그 징후를 알 수 없다[若有眞宰, 而特不得其眹]”는 문장이 관건입니다. 참된 주재자, 즉 진재가 있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없다는 것일까요? 장자를 읽을 때 우리는 보통 곽경번(郭慶藩)장자집석(莊子集釋)이나 왕선겸(王先謙)장자집해(莊子集解)를 손에 잡습니다. 그런데 두 권의 이 장자주석서에 실린 원문을 보면 주목해야 할 차이가 보입니다. 장자집석에는 약유진재(若有眞宰)’라고 기록되어 있고, 장자집해에는 필유진재(必有眞宰)’라고 되어 있으니까요. ‘만약 진재가 있다면이라는 의미와 반드시 진재가 있다는 의미는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차이를 보입니다. ‘만약이나 설령을 뜻하는 ()’반드시필연적으로를 뜻하는 ()’이라는 글자의 차이입니다.

 

이라는 한자와 이라는 한자는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붓으로 빠르게 쓰면 두 글자의 형태적 차이는 그만큼 더 줄어들 겁니다. 결국 장자의 필사본이 계속 전달되면서 이라는 한자가 혼용되었던 겁니다. 진재가 존재한다고 이해한 사람은 이라는 한자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고, 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해한 사람이나 혹은 진재의 존재 여부에 판단을 유보한 사람은 이라는 한자가 보였을 겁니다. 물론 이라는 한자를 썼다고 해도 진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을 견지할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이나 이라는 글자와 관련된 해석학적 상황에 너무 빠져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장자가 진재나 진군 등 초월적 존재를 긍정했느냐 의 여부이니까요. 물론 우리는 장자가 초월적 존재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바람 소리로 비유되는 그의 마주침의 존재론을 떠올려보세요. 바람 소리는 바람과 구멍의 마주침으로 생깁니다. 이런 사유에서 바람, 구멍 그리고 마주침이라는 사건! 이 세 가지 계기 외에 진재와 같은 초월적 계기는 개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왜 진재나 진군 등을 언급했을까요? 분명 마주침의 존재론은 일체의 초월성(transcendence)을 부정하고 철저하게 내재성(immanence)을 따르는 사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주침의 이야기를 들어도 초월성을 향한 갈망을 포기하기 힘듭니다. 장자가 진재 이야기를 만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주침의 존재론이 지향하는 내재성이 초월성에 포획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었던 겁니다.

 

신이나 영혼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인간은 삶에서 일종의 초월성을 모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런 자연적인 경향이 어쩌면 신과 영혼과 같은 초월적인 실재를 만든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남녀가 마주칩니다. 그리고 남녀는 다행히도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랍니다. 남녀는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을 다녔을 뿐만 아니라 집도 가까웠으며, 심지어 각기 다니던 회사도 같은 빌딩에 있었으니까요. 수차례 아니 수백 차례 마주칠 수 있었지만, 남녀는 두 평행선처럼 만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 사랑으로 이어진 마주침이 발생한 겁니다.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남녀는 행복합니다. 아마도 두 사람이 거부하고 싶은 말은 회자정리(會者定離)’일 겁니다. 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근사한 고사성어입니다. 바람과 구멍의 마주침으로 근사한 바람 소리가 만들어졌지만, 바람이 멈추거나 구멍이 막히면 그 바람 소리는 바로 사라집니다. 그러나 남녀는 자신들의 만남이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운명이니 전생이니 아니면 영원과 같은 발상이 생깁니다. 지금도 들리는 대중가요 <만남>에는 마주침의 진실을 부정하고 싶은 남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닐거라는 말 속에는 자신들의 만남이 우연이라는, 다시 말해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주침이 언제가 끝나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국가가 종교를 비호하는 이유

 

행복한 마주침을 일회적이라고 치부하기보다 영원한 것으로 박제하고 싶은 의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지나쳐 정말로 운명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믿으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숙명을 믿느라 마주침을 유지하려는 주체적 노력에 게을러질 수 있으니까요. 흥미로운 것은, 슬픔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만남에 대해서 인간은 숙명, 운명, 전생 혹은 영원을 떠올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불화로 이혼하려는 남녀가 자신들의 만남을 우연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동차와의 마주침, 즉 교통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우리는 교통사고를 사고, 즉 우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생에서부터 교통사고의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간 무서운 일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행복한 마주침이나 불행한 마주침 모두 숙명이나 운명으로 믿으려고 합니다. 숙명이나 운명을 믿는 순간, 우리는 운명을 이미 예정한 신이나 혹은 그 운명이 새겨진 불변하는 영혼으로 가는 데 한 걸음이면 족합니다. 모든 숙명을 주재하는 신이나 숙명의 코드가 새겨진 영혼 중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섭리나 불교의 윤회 관념은 바로 이런 숙명론에 기생하지요. 불행을 불행한 마주침의 결과가 아니라 신적인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국가체제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겁니다. 수탈과 억압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은 그것을 바로잡거나 사회를 개조할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유사 이래 국가가 항상 종교를 비호하거나 묵인해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마주침이라는 내재적 사건,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행복과 불행을 초월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킨 일급의 철학자가 바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입니다. 그는 1716년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에게 보낸 서신에 이렇게 씁니다. “모든 진리들이 자신들이 진리인 이유, 혹은 선험적인(a priori) 증거를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어떤 것도 원인(cause)이 없이는 발생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이유(reason)가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흔히 말할 때의 의미다.” 바로 충분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유나 원인 혹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만남만큼 이별도, 행복만큼 불행도 이제 이유가 있는 것이 되는 셈이죠. 비유를 하자면, 구멍도 이유가 있어 존재하고, 바람도 이유가 있어 존재하고, 심지어 바람 소리마저 이유가 있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도 이유가 있어 존재하고 여자도 이유가 있어 존재하듯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 소리가 바람이나 구멍과 무관한 자기만의 이유가 있고, 사랑도 두 사람과는 무관한 자기만의 이유가 있다는 발상이죠. 이런 식으로 마주침이라는 사건은 마주침의 두 항과는 다른 것이 되고 맙니다. 이에 따라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 소리도 사라지고, 한 사람의 마음이 식으면 사랑도 식는다는 역동적이고 내재적인 지평은 증발하게 됩니다. 바람이나 구멍 입장이나 두 남녀의 입장에서 마주침은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람 소리나 사랑과 같은 마주침도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죠. 이를 통해 라이프니츠는 모든 원인의 주재자로 신을 정당화하게 됩니다. 사랑도, 결별도, 교통사고도, 로또 당첨도 우리 입장에서는 우연으로 보이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모두 필연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마주침이 주는 새로움과 창조성은 우리 인간의 착각으로 치부되고 맙니다. 이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흥분할 필요도 없고, 근사한 바람 소리에 행복할 필요도 없습니다.

 

드디어 진재 이야기를 읽을 준비가 다 된 것 같습니다. “타자가 아니라면 나도 없고, 내가 아니라면 취할 것도 없다는 근사한 표현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바람 소리가 들렸다고 해보죠. 바람이 아니라면 구멍은 자기가 구멍인지도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구멍이 없었다면 구멍 안에서 바람 소리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바로 마주침의 존재론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람 소리의 원인을 전적으로 바람에서만 찾아서도 안 되고, 전적으로 구멍에서만 찾아서도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바람과 구멍 이외의 것에서 혹은 바람과 구멍을 초월한 것에서 바람 소리의 원인을 찾아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장자는 그렇게 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바람이나 구멍 혼자서는 혹은 바람과 구멍을 초월한 무엇도 바람 소리를 만들지 못합니다. 바람 소리가 생겼다는 것, 마주침 이 발생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출발점이자 긍정해야만 할 사태입니다. 마주침이라는 사건 자체가 작용한다는 것은 이미 믿을 수 있지만 그 형체를 볼 수 없습니다.” 혹은 마주침이라는 사건의 실정은 있지만 그 형체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겁니다. 상황은 반대입니다. 구멍과 무관한 바람을 생각하거나 바람과 무관한 구멍을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바람 소리를 내는 초월적인 존재를 생각하게 되는 것도 모두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죠. 바람과 무관한 구멍 혹은 구멍과 무관한 바람에 대한 사변도 위험하다고 보는 장자입니다. 구멍과 바람의 마주침마저 초월한 존재에 대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장자는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만일 참된 주재자가 있다고 해도 그 징후를 알 수 없다고 진재를 맹신하는 사람을 거부반응 없이 깨우치겠다는 장자의 마음입니다. 당신 생각처럼 진재가 있다고 해도 마주침이라는 사건에는 그가 개입했다는 징후를 전혀 찾을 수 없으니, 바람과 구멍의 마주침만으로 바람 소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떠냐고 장자는 제안합니다.

 

 

 

대등한 위상의 마주침들

 

장자는 친절합니다. 바람과 구멍의 마주침에서 어떻게 우리가 이 마주침을 초월한 진재를 상상하는지 보여주려 합니다. 몸과 무관하지만 몸을 통제한다는 초월적 마음, 즉 진군을 비유로 들면서 말입니다. 진군이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메커니즘은 진재를 상상하는 메커니즘과 같다는 장자의 통찰입니다. 진재 이야기는 이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합니다. 먼저 장자는 우리의 살아 있는 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백 개의 관절, 아홉 개의 구멍, 여섯 개의 장기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여기서 아홉 개의 구멍이란 눈 둘, 콧구멍 둘, 귓구멍 둘, 입 하나, 소변 보는 구멍, 그리고 항문을 말합니다. 아홉 개의 구멍은 우리 몸과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전통적으로 동양의학에서는 오장육부(五臟六腑)라고 해서 장기를 심장[], 허파[], 지라[], (), 콩팥[] 다섯 가지로 들고 있지만, 장자는 심장을 둘러싼 바깥막인 심포(心包)를 더해 육장(六臟)이라 표현합니다. 아마도 위장[], 쓸개[], 방광, 소장, 대장, 삼초(三焦) 등 육부와 짝을 맞춘 것 같습니다. 오장육부 혹은 육장육부는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흡수해 혈액[]이나 기운[]의 형식으로 몸 구석구석 나르고, 동시에 배설마저 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아울러 동양의학에서는 현대의학에서 뇌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정신 작용을 오장육부에 배속합니다. 예를 들어 간이 판단력을, 심장이 지각이나 기억 그리고 사유를 허파나 콩팥이 의지 작용, 지라나 위가 감정을, 간이나 담이 용기를 주관한다는 식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비위가 약하다라든가 간이 크다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런 전통이 이어져왔기 때문이죠. 여기서 현대의학과 동양의학 사이의 공통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과 정신이, 그것이 오장육부는 뇌든 몸과 관련된다는 것, 다시 말해 몸과 무관한 마음, 몸을 초월한 정신은 부정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어느 것과 더 가까울까? 당신은 그것들 모두를 좋아하는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 여기서 당신은 무언가 몸을 관조하는 초월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기들 중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동양의학에 따르면 비위(脾胃), 즉 지라와 위장과 관련되고 서양의학에서는 뇌 중층 부위와 관련됩니다. 판단하고 사유하는 일은 동양의학에서는 간이나 심장과 관련되고 서양의학에서는 뇌 표면부위와 관련됩니다. 결국 몸을 관조하면서 무엇을 선호하는지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초월적 주체가 아니라 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특정 장기나 모든 장기를 선호할 때 우리는 자신이 몸과 무관한 초월적 자리에 있다는 환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멋진 이성을 만나 가슴이 뛴다고 해보죠. 이 경우 내 가슴은 뛰지만, 그걸 느끼는 나 자신은 뛰는 가슴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세요. 내 가슴은 뛰고, 바로 그 상태가 나입니다. 몸의 구성 요소들과 그것을 관조하는 초월적 주체! 이런 허구적 분열에 빠져드는 순간, 다양한 장기들은 주인의 자리가 아니라 신하나 첩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우리의 사유는 뻔하게 진행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들은 신하나 첩이 되는 것일까? 혹은 신하나 첩들은 서로 다스리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혹은 그것들은 차례로 서로 군주와 신하가 되는 것일까? 혹은 거기에 참된 군주가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장기 등 몸의 구성 성분들의 작용을 비하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주목해야 합니다. 피지배자들은 스스로 통치할 수 없다는 지배자의 의식과 같습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몸 안에서 몸과 무관한 참된 군주, 즉 진군을 찾게 됩니다. 물론 이 진군은 몸을 관조하는 우리 자신의 초월적 자세가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몸을 대상화해서 관조할 때나 다른 정신 활동을 할 때,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우리 몸은 진실로 제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몸의 구성성분들이 신하나 첩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이 옳은지, 혹은 교대로 군주나 신하의 역할을 맡는다는 생각이 옳은지, 아니면 몸을 초월한 진군이 몸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옳은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합니다. “실정을 파악하든 파악할 수 없든, 그 참됨에 대해 보태거나 덜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참됨은 바로 몸의 구성 성분들이 참되게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몸에 대한 우리의 관조나 우리의 초월적 자세, 혹은 몸에 대한 우리의 사변과 무관하게 생생하게 작용하는 몸에 대한 장자의 긍정입니다. 바람과 구멍은 신하나 첩도 아니고, 혹은 교대로 신하나 군주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 소리는 대등한 위상의 바람과 구멍의 마주침일 뿐입니다. 남녀도 열등한 존재가 아니고 두 사람 중 어느 누가 마주침을 일방적으로 끌고 갈 수도 없습니다. 마주침의 행복을 지속하는 것도 마주침의 불행을 종결하는 것도 두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여기에는 진재나 신 혹은 숙명이나 운명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어쩌면 지뢰나 천뢰가 아니라 인뢰에 사로잡힐 때 진재나 신이 추론되는지 모를 일입니다. 인뢰, 피리의 경우 사람이 피리를 만들고 사람이 피리를 붑니다. 피리를 만드는 인간과 피리에 바람을 불어넣는 인간, 한 마디로 피리와 바람을 초월하고 지배하는 인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피리를 부는 인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인간을 지뢰나 천뢰에 투사할 때 진재나 신이 상상될 수 있죠.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환상입니다. 이런 환상에도 불구하고 마주침의 기적은 여전히 진재나 신을 조롱하듯 발생합니다. 마주침은 무언가 보태거나 덜어낼 수 없이 일어납니다. 구멍과 바람의 바람 소리처럼, 두 사람의 사랑처럼.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17. 자유를 품고 사는 삶 / 19. 광막지야에서 장자가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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