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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바람을 따를 것인가 피할 것인가 본문

책/철학(哲學)

장자수업, 1부 대지를 뛰어올라 - 4. 바람이 분다 그러니 살아야겠다, 바람을 따를 것인가 피할 것인가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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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을 따를 것인가, 피할 것인가

 

대붕 이야기는 자유를 말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붕의 자유에는 묘한 데가 있습니다. 아무 때나 날지 못하고 바람을 기다리는 대붕의 모습에 무언가 한계와 제약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신을 떠받치는 바람이 옅어지면 대붕은 언제고 추락할 수 있다는 느낌도 듭니다. 물론 이 경우 대붕은 비행고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대붕은 이전보다 더 힘차게 날갯짓을 해야 할 겁니다. 바람이 금방 두꺼워지지 않으면 대붕은 언제고 다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대붕이 날갯짓을 무한정 계속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렇게 대붕의 이미지는 뭐든 할 수 있고 거침이 없어야 자유로운 것이라는 통념과는 부합하지 않는 점이 많습니다. 대붕 이야기가 메추라기를 등장인물로 캐스팅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메추라기는 말합니다. “나는 위로 날아오르지만 얼마 오르지 않고 곧 다시 내려오며, 대부분 수풀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퍼덕거린다고 말이죠. 메추라기는 바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날갯깃에 의지하여 납니다. 세속적 통념에 따르면 메추라기야말로 자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날고 싶으면 날고 날기 싫으면 날지 않기 때문이고, 올라가고 싶으면 날아오르고 내려가고 싶으면 하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메추라기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당당히 선포합니다. 자신의 비행도 완전한 날기[飛之至]’, 즉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말입니다. 대붕이 자유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메추라기가 자유로운 것일까요? 대붕과 메추라기의 자유를 구별할 때, 곤이나 붕이 몇 천 리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컸다는 표현이 그 실마리가 됩니다. 여기서 수천 리의 크기는 상징적으로 독해해야 합니다. 내가 크다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협소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협소한 세계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작게 만들어 협소한 세계에 적응할 것인가. 전자가 곤이나 붕이 꿈꾸던 자유였다면, 후자는 메추라기가 선택한 자유였죠. 자신이 수천리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했다면 곤은 그냥 작은 물고기처럼 살았을 겁니다. 당연히 붕이 될 필요도 없죠. 이 경우 곤은 메추라기처럼 됩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온다네! 유유자적 한가로이 헤엄치는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주어진 세계가 삶을 더 옥죈다면, 그럴 수록 자신을 작게 만들면 됩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자유를 느꼈던 사람들도 그렇게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던 겁니다. “그래도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방귀를 뀌고 싶을 때 시원하게 뀐다. 이 또한 자유 아닌가!” 그래서 바람이 중요한 겁니다. 바람은 더 큰 세계가 있다는 상징, 협소한 세계 밖에는 타자가 있다는 상징이니까요. 곤은 바람을 통해 더 큰 세계를 꿈꾸었고, 붕은 바람을 타고 더 큰 세계로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큼에 어울리는 세계를 선택하려는 겁니다. 반면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면 메추라기는 자기 둥지로 돌아갈 겁니다. 물론 자기를 더 작게 만들면 둥지도 그리 작게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메추라기의 자유가 정신승리의 자유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메추라기는 바람을 타고 올라 자신이 어디까지 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바람을 타려는 대붕과 바람을 피하려는 메추라기! 대붕 이야기는 바로 이 두 캐릭터를 충돌시키면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바람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바람을 피할 것인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협소한 세계를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협소한 세계보다 더 작게 만들 것인가?

 

이제야 우리는 대붕 이야기의 진정한 신스틸러(scene stealer)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람입니다. 철학적으로 바람은 내 세계의 협소함을 폭로하는 타자를 상징합니다. 타자와 함께하면 나의 세계는 커지고 그만큼 나도 커질 겁니다. 사랑이 아니어도 타자나 타자적 사건과 마주친 사람이 얼마나 커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과거의 나나 협소했던 세계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죠. 아니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겁니다. 곤으로 있던 그 갑갑한 곳으로 대붕이 어떻게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바람을 느꼈고 바람을 탔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대붕 이야기가 사실 바람 이야기이고, 장자가 바람의 철학자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자는 바람의 이미지로 사유했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입니다. 그래서 아마 장자편집자는 장자를 여는 첫 번째 이야기로 대붕 이야기를 선정했을 겁니다. 반면 기존 체제와 기존 질서를 옹호했던 철학자들은 바람 이미지보다는 다른 안정적인 이미지를 선호합니다. 대표적으로 논어옹야(雍也)편에서 공자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고 이야기합니다. 산만큼 바람에 동요되지 않는 것도 없으니까요. 심지어 동양 의서(醫書) 황제내경(黃帝內經)마저도 (), 즉 바람을 모든 병의 시작이라고 저주합니다. 그래서 찬바람을 맞아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죠. 한마디로, 풍을 맞지 않으려면 집 밖으로 함부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의학이란 항상 보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장자라면 다르게 이야기하겠지요. 겨울에 따뜻한 방에만 머물면 몸은 약해질 거라고.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긍정하며 뛰어놀라는 거죠. 그럼 우리 몸은 더 강건해지리라는 겁니다. 물론 한두 번의 감기나 몸살은 각오해야만 하죠.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3. 소유하라 당신의 삶을 / 5. 소인의 힘 소인의 권위

은 어떻게 이 되었나

타자의 세계로 이끄는 바람

바람을 따를 것인가, 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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