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왓 어 컬러풀 월드
마음 이야기
‘큰 앎은 여유로워 보이고 작은 앎은 분별적이네. 큰 말은 담백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네.’
그것이 잠잘 때는 혼들과 교류하고, 그것이 깨어날 때는 몸이 열린다. 함께 접촉하는 것과 얽혀 날마다 마음은 다툰다. 느린 마음 깊은 마음, 내밀한 마음.
大知閑閑, 小知間間. 大言炎炎, 小言詹詹. 其寐也魂交, 其覺也形開. 與接爲搆, 日以心鬪. 縵者·窖者·密者.
‘작은 공포는 겁먹어 보이고, 큰 공포는 넋을 잃어 보이네.’
그것이 쇠뇌를 발사하듯 표현된다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름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맹세하듯 머문다는 것은 그것이 우월한 것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가을과 겨울처럼 쇠락해진다는 것은 그것이 나날이 쇠약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들면 더 이상 회복시킬 수 없다네.”
그것이 밀봉한 것처럼 막힌다는 것은 그것이 늙어 새어나간다는 것을 말한다.
小恐惴惴, 大恐縵縵. 其發若機括, 其司是非之謂也; 其留如詛盟, 其守勝之謂也; 其殺如秋冬, 以言其日消也; 其溺之所爲之, 不可使復之也; 其厭也如緘, 以言其老洫也;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은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없다네.”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한탄, 변덕과 고집, 성급함과 자만, 불손함과 가식 등등은, 음악이 빈 곳에서 나오고 이슬이 버섯에서 맺히는 것처럼, 밤낮으로 우리 앞에서 교차되지만 그것이 싹트는 곳을 알지 못하겠구나! 그만 되었다! 이제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이것들을 얻어서 살아가고 있구나!
近死之心, 莫使復陽也.
喜怒哀樂, 慮嘆變慹, 姚佚啓態, 樂出虛, 蒸成菌. 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 已乎, 已乎! 旦暮得此, 其所由以生乎! 「제물론」 2, 3
고통의 당의정과 중독 사태
뇌과학과 신경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자들이나 일부 인문학자들은 이제 인간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고, 혹은 곧 알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f-MRI(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장치로 살펴본 뇌의 전기적 신호와 마음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들이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며 지금도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제 감정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마음의 양태는 뇌와 신경의 작용으로 환원될 것만 같습니다.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다양한 색깔들이 전자파의 파장들로 설명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은 400나노미터 파장의 전자파와 같은 것일까요? 이런 질문은 뇌 과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은 뇌 우측 하단부 특정 표면의 전자기적 반응과 같은 것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취하고 있는 입장 혹은 관점입니다. 과학철학자 네이글(Thomas Nagel, 1937~)이 말했듯이 과학은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the view from nowhere)’에 서 있다고 자임합니다. 여기서 ‘어딘가에서 바라보는 관점(the view from somewhere)’은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일종의 미신이나 편견 같은 것이라는 인상이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내가 세상을 경험하는 풍요로운 방식이나 세계가 내게 나타나는 다채로운 방식들은 중시되기는커녕 폄하되기 십상입니다. 무지개를 보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보고 혀를 끌끌 차는 식으로 말입니다. 국가주의만큼이나 우리 삶을 위축시키고 어둡게 만드는 과학주의(scientism)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무지개를 보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무지개에서 전자파의 다양한 파장들만을 보는 냉담한 과학자보다 풍성하고 다채로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을요.
생각해보세요. 인간은 다양한 사물이나 풍경에서 보라색을 봅니다. 보라색에는 인간이 이미 개입되어 있습니다. 뱀이나 하루살이 혹은 장미는 그것을 전혀 다르게 보거나 느낄 겁니다. 과학은 인간도 아니고 뱀도 아니고 장미도 아닌 관점에서 보라색을 보려 하고, 그 결과 400나노미터 파장의 전자파가 보라색 자체라고 이야기하죠. 바로 이것이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색에 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그것을 사랑하려는 노력도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00나노미터 과장의 전자파가 보라색 자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이런 생각에는 이미 보라색에 대한 인간의 관심,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이야기죠. 보라색에 대한 인간의 지대한 관심이 없다면, 400 나노미터파의 전자파를 만들어 필요할 때마다 보라색을 생산하겠다는 발상도 없었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400나노미터 파장의 전자파도 사실 전자파를 조작해 언제든 필요할 때 보라색을 만들겠다는 인간의 특정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겠다는 지배자적 관심 혹은 색을 만들어내 돈을 벌겠다는 자본주의적 관심이지요. 보라색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비과학적이라고 폄하하면서도 전자파의 파장을 통제해 보라색을 상품화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한 데가 있습니다. 보라색에 대한 인간의 풍부한 감성을 부정한다면, 보라색 램프 등을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죠. 물론 빛과 전자파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자신은 그냥 순수하게 전자파의 파장만을 연구하고 있다고 역설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이 같은 발상이죠. 그런 연구를 위한 연구소와 연구비가 어떻게 지원되는지를 살펴보면, 이런 무책임하고 순진무구한 발상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금방 들통납니다.
인간의 풍요로운 보라색 경험, 그리고 400나노미터 파장의 전자파! 둘 사이의 관계는 구조적으로 마음과 뇌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양한 색깔이 전자파의 다양한 파장으로 환원되듯, 마음의 다양한 상태도 뇌의 신경생리학적 작용으로 환원되죠. 뇌과학이나 신경과학도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표방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지배자의 관점과 자본주의적 관점이 숨어 있습니다. 고통, 기쁨, 우울, 명랑, 불안, 안정 등 인간의 마음 상태는 뇌표면의 전자기적 현상, 즉 f-MRI로 관측 가능한 현상으로 환원됩니다. 여기서 사람마다 다른 고통과 기쁨의 문맥들이나 색채들은 가볍게 무시됩니다. 예를 들어 고 통을 느끼면 뇌 표면 중 A 영역에 반응이 일어나, 의료 장비나 약을 이용해 A 영역의 반응을 순간적이나마 약화시킨다고 해보죠. 고통에 빠진 사람은 분명 고통이 완화된다고 느낄 것입니다. 뇌에 가해진 신경생리학적 자극은 그에게 일순간 안정을 주지만, 그를 고통에 빠지게 만든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신경생리학적 자극의 효과가 떨어지면 그는 다시 의료 장비나 약을 찾을 겁니다. 일단 그는 고통을 피하려 할 테니까요. 여기서 일종의 중독 상태가 만들어집니다. 고통의 당의정을 파는 자본은 그를 통해 이익을 남깁니다. 만약 국가가 복지 차원에서 이 당의정을 거의 무료로 제공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은 국가에 그만큼 의존하게 될 겁니다. 고통이 아닌 평안의 감정을 무료로 제공하는 국가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이런 중독의 메커니즘이 반복되면, 고통을 만드는 다양한 상황을 극복하겠다는 노력,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고통과 공존하려는 노력이 사라지고 만다는 데 있습니다. 단지 나의 고통을 뇌의 표면현상으로 환원해, 필요한 신경생리학적 자극만 얻으려 하기 때문이죠. 절대적 관념론은 이렇게 절대적 뇌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의 다양한 양태
다양한 파장의 전자파 혹은 뇌의 신경생리학적 작용들로 우리의 풍요로운 경험과 다채로운 감정을 환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풍성한 색채들의 향연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 그 누구도 모노톤의 전자파들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양한 감정에 물들어 있지만 그 누구도 뇌 표면의 전자기장 현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게 풍성하고 다채로운 우리 삶을 왜소하고 보잘것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철학은 한편으로는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 폄하된 인간 삶의 풍요로움을 복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사실 특정 관점을 절대화한 신적 관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폭로합니다. 이 점에서 「제물론」 편의 ‘마음 이야기’ 만큼 장자가 얼마나 우리 마음과 감정의 풍성함을 긍정하는지 보여주는 일화도 없을 듯합니다. 이는 당시 제자백가 대부분이 인간의 복잡하고 다양한 마음 상태를 인성(人性) 혹은 심성(心性)으로 환원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입니다. 예를 들어 맹자 같은 사람은 윤리적 감정만을 인간의 본성이라 주장하고, 순자(荀子, BC 298~BC 238) 같은 철학자는 이기적 욕망을 본성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든 본성이라 인정된 마음의 상태나 특정 감정을 제외한 나머지 수많은 마음이나 감정은 폄하되거나 무시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인성론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다양한 모습을 띠는 우리의 마음을 긍정하지 않습니다. 결국 인성론적 사유도 일종의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이었던 겁니다. 다채로운 체험의 세계나 그만큼 풍요로운 마음과 감정의 세계가 위축되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마음 이야기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이 이야기만이 지니는 고유한 스타일 때문입니다. 마음 이야기는 가로줄과 세로줄로 직조된 직물처럼 짜여 있습니다. 가로줄은 다음 시의 다섯 행들을 네 개로 쪼개 만듭니다. “큰 삶은 여유로워 보이고 작은 앎은 분별적이네. 큰 말은 담백하고 작은 말은 수다스럽네. 작은 공포는 겁먹어 보이고 큰 공포는 넋을 잃어 보이네. 그것이 자신이 하는 일에 빠져들면 더 이상 회복시킬 수 없다네.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은 다시 활기차게 만들 수 없다네.” 마음 이야기의 가로줄이 되는 시는 아마도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게송의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장자는 게송처럼 이 시를 암송해 제자들이 각 상황마다 마음을 성찰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먼저 첫 번째 가로줄, 즉 시의 처음 두 연을 보죠.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앎과 말은 오히려 작아지고, 반면 더 훌륭하고 더 위대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삶과 말은 커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 가로줄은 큰 앎과 큰 말이 얼핏 보면 위대해 보이지 않은 이유를 공포를 비유로 설명합니다. 진짜로 공포에 빠져들면 우리는 멍한 상태에 빠져 마치 겁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섬세한 비유가 돋보입니다. 세 번째 가로줄에서부터 장자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마음이 활력이나 유동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마음은 네모난 그릇에서는 네모가 되고 원형 그릇에서는 원형이 되는 물처럼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네모 난 그릇에서 얼어버린 물처럼 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둥근 그릇에 담겨야 할 때 그릇을 부수거나 아니면 자신이 깨져버릴 테니까요. 네 번째 가로줄, 그러니까 시의 다섯 번째 행은 죽음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장자의 충고입니다. 죽음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우리는 현재의 살아 있음을 긍정할 수 없게 되죠. 심지어 ‘죽음을 가까이하는 마음’이 강해지면 우리는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도 있을 겁니다. 비에 젖는 것이 무서워 아예 미리 강물에 빠지려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마음의 다양한 양태들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구절들이 세로줄을 구성합니다. 마음 이야기는 이 세로줄이 네 개로 쪼개진 시의 행들, 즉 가로줄 사이에 삽입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세로줄을 구성하는 묘사들 중 “마음이 잠잘 때는 혼들과 교류하고, 그것이 깨어날 때는 몸이 열린다”는 구절도 의미심장하지만 “마음이 쇠뇌를 발사하듯 표현된다는 것은 그것이 옳고 그름을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구절이나 “마음이 맹세하듯 머문다는 것은 그것이 우월한 것[勝]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는 구절은 특히 시선을 끕니다. 마음이 타인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급하게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장자는 우리가 옳고 그름을 따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마치 검사처럼 타자를 용의자로 본다면, 우리는 그의 말을 다 듣지 않고 중간에 그의 말을 끊으려 할 겁니다. 방금 상대방이 한 말이 명료하지 않다고 느끼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죠. 상대방의 모든 말을 일종의 증언이라고 보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시비를 따지는 마음은 불행합니다. 이런 마음은 시를 읽을 수 없는 마음, 문맥을 읽을 수 없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예 돌부처처럼 타자의 말에 무덤덤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믿기 때문이죠.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열지 않습니다. 지적 오만이든 신분적 오만이든 자만은 타자와의 소통을 가로막는 원인입니다. 타자와 소통하거나 그로부터 조금이라도 배우려면 자신이 우월하다는 자만을 버려야 한다는 장자의 충고입니다.
싹틈을 긍정하라
마지막 네 번째 가로줄 밑에는 장자가 어떻게 마음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결론부가 배치되고, 이것으로 마음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핵심적인 것은 “음악이 빈 곳에서 나오고 이슬이 버섯에서 맺힌다”는 매력적인 비유입니다. 바람 소리를 생각해보세요. 바람과 구멍이 만나야 특정한 바람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면 이 바람 소리는 바람이 낸 걸까요, 아니면 구멍이 낸 걸까요? 바람이나 구멍 어느 하나라고 말한다면 틀린 대답일 겁니다. 구멍이 없다면 바람이 아무리 강력해도 바람 소리는 만들어질 수 없고, 바람이 없다면 구멍이 아무리 근사해도 바람 소리는 생길 수 없으니까요. 사실 바람 소리가 만들어진 다음 사후적으로 우리는 바람과 구멍을 짐작하게 됩니다. 만약 바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람이 든 구멍이든 생각조차 못할 것입니다. 버섯에 맺힌 이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이 맺혀야 우리는 공기 중에 떠돌던 수증기와 다른 식물과는 다른 버섯을 의식하게 될 테니까요. 장자 특유의 마주침의 존재론입니다. 장자는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한탄, 변덕과 고집, 성급함과 자만, 불손함과 가식 등등”을 바람 소리나 이슬과 같은 것으로 사유합니다. 이런 다양한 마음들은 타자와 우리가 마주쳐 생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원인을 타자에서만 찾아도 안 되고, 우리 자신에게서만 찾아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마주침을 너무 단순화하는 일이니까요. 이것이 장자가 “그것이 싹트는 곳을 알지 못하겠구나!”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다양한 마음들이 싹트게 하는 원인은 타자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 자신에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이것은 다양한 마음들의 싹틈 자체가 절대적 출발점이자 긍정의 대상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싹트는 곳을 찾지 말고 싹틈을 긍정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장자는 “그만 되었다! 이제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이것들을 얻어서 그것으로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말하며 마음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입니다. 싹틈의 컬러풀함을 원인을 찾느라 무채색으로 바꾸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바람 소리의 원인을 바람에서만 찾으려 해서도 안 되고, 구멍에서만 찾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람 소리의 원인을 바람에서만 찾든 구멍에서만 찾든, 아니면 동시에 바람이나 구멍에서 찾든,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바람 소리의 매력이나 그 풍성함을 쉽게 망각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일 겁니다. 보라색 꽃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풍성한 감정과 삶을 외부로는 400나노미터 파장의 전자파와 같은 것으로 환원하거나 안으로는 뇌의 신경생리학적 작용으로 환원하는 것도 동일한 문제를 낳습니다. 기쁨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강화를, 슬픔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경감을 행복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지속을 고통은 마주침의 자리에서 그 완화를 모색해야만 합니다. 핑크빛 무드 등은 우리에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은 오히려 결별의 쓸쓸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뇌의 특정 표면을 자극해서 생기는 행복도 늙고 병듦의 고통에 대한 최종 치료제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쓸쓸함이 싹트는 곳, 그 마주침의 장소에서 새로운 마주침을 꿈꾸며 따뜻함을 싹틔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이 싹튼 곳, 그 마주침의 장소에서 새로운 마주침을 통해 우리는 행복을 싹틔워야 하죠.
장자는 인간과 무관한 사물 자체와 마찬가지로 사물과 무관한 마음 자체도 일종의 ‘어디도 아닌 곳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철학자였습니다. 마음과 무관한 세계 자체도 문제지만, 세계와 무관한 마음 자체도 그만큼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바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멍도 아닌, 바람과 구멍이 마주쳐서 생긴 바람 소리에 서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장자는 7세기 불교 최고 이론가 다르마키르티(Dharmakīrti, 7세기)의 통찰을 선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마키르티는 보라색 꽃이라는 의식 대상과 꽃이 보라색이라는 의식은 필연적으로 함께 간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호파람바니야마(sahopalambhaniyama)라고 불리는 주장입니다. ‘동시’나 ‘함께’를 뜻하는 사하(saha), ‘지각’이나 ‘의식’을 뜻하는 우파람바(upalambha), 그리고 ‘필연성’이나 ‘제약’을 뜻하는 니야마(niyama)라는 산스크리트어로 구성된 말입니다. 이 주장이 중요한 것은 다르마키르티가 의식 대상을 떠난 마음 자체나 의식을 떠난 사물 자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집요하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객관주의나 절대적 주관주의를 모두 벗어나려는 그의 의지가 번뜩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적 객관주의나 절대적 주관주의라는 쉬운 길을 걷기 쉽습니다. 핑크빛 무드 등을 켜면 일순간적으로나마 따뜻함을 얻을 수 있고, 뇌의 신경을 약이나 의료 장치로 자극하면 고통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까요. 결별이 주는 쓸쓸함을 껴안고 따뜻함을 싹틔운다는 것, 병듦과 노쇠함이 주는 고통과 공존하며 행복을 싹틔운다는 것! 장자가 주저하며 우리에게 전하는 가르침입니다. 쓸쓸함에 무드 등을 켜거나 고통을 달래려 뇌를 자극하는 것보다 힘든 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니까요
인용
13. 선과 악을 넘어서 / 15. 여유와 당당함의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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