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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15. 여유와 당당함의 비법(사생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15. 여유와 당당함의 비법(사생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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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여유와 당당함의 비법

사생 이야기

 

 

설결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하니, 지극한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齧缺曰: “子不利害, 則至人固不知利害乎?”

 

왕예가 대답했다. “지극한 사람은 신비스럽지! 넓은 습지가 불타올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고, 벼락이 산을 쪼개고 폭풍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네. 이와 같은 사람은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을 몰고 사면의 바다 밖에서 노닌다네. 죽고 사는 일도 그에게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익과 손해라는 작은 실마리에 대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王倪曰: “至人神矣! 大澤焚而不能熱, 河漢沍而不能寒, 疾雷破山·飄風振海而不能驚. 若然者, 乘云氣, 騎日月, 而游乎四海之外, 死生無變於己, 而况利害之端乎!” 제물론19

 

 

가축화 메커니즘의 핵심, 당근과 채찍

 

지배와 통제의 기술은 동서양이 마찬가지입니다. 한비자(韓非子, BC 280? ~ BC 233)는 군주가 상과 벌을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도 패권의 비법으로 사랑의 방법과 힘의 방법을 이야기하지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개인이 수행하면 체제는 그에게 이득을 제공하고, 반대로 자신이 금지한 것을 개인이 행하면 체제는 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겁니다. 슬프게도 인간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할 때 사용했던 방법을 동료 인간에게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기원전 4000년경 인간은 말을 마지막으로 가축화한 이후로 더 이상 다른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동료 인간을 가축화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인간 가축은 동물 가축과는 달리 말이 통하고 더 섬세한 작업에 투입할 수도 있으니까요. 거대 건축물로 상징되는 국가 체제는 인간 가축화 과정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죠. 20세기 전반에 민주주의를 자임했던 국가에서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유행처럼 사용했던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당근과 채찍(carrot & stick)’입니다. 다른 국가들이나 혹은 자국민들을 길들여 지배하려 할 때 반드시 병행해야만 하는 두 가지 방법을 비유한 거죠.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근과 채찍은 가축화 메커니즘의 핵심에 있습니다. 당근과 채찍이 동료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 바로 상과 벌 혹은 사랑의 방법과 폭력의 방법이니까요. 비유로 사용했던 당근과 채찍이 사실 상과 벌의 본질을 폭로해버린 셈이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간혹 우리를 개돼지로 보지 말라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을 보면 당혹스럽기만 합니다. 상벌 체계를 받아들였다면 인간은 그냥 개돼지와 같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축화 메커니즘의 핵심, 당근과 채찍의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당근과 채찍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채찍이 당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폭력이 먼저라는 이야기입니다. 야생마가 말이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쉽죠. 먼저 폭력을 사용해 야생마를 잡고 이어 그 목에 밧줄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굶겨야 할 겁니다. 그래야 말이 목초지에 방목될 때 자유를 느끼고 풀을 맛나게 먹을 테니까요. 말에게 목초지의 풀 혹은 목초지에서의 한가로운 산보가 바로 당근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야생마에게 초원의 자유로운 삶은 자연스러운 향유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자연스러운 것이 매혹적인 당근이 되도록 마법을 부린 것은 목줄, 채찍, 감금 등 원초적 박탈과 폭력입니다. 먹을 것을 빼앗은 뒤 복종하면 그걸 조금 줍니다. 초원의 자유를 빼앗은 뒤 복종하면 그걸 조금 누리게 해줍니다. 주인이 제공하는 모든 것은 사실 야생마로부터 빼앗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어쨌든 상벌 전략에 길들여지면 말은 주인을 떠나서는 목초지에서 얻는 풀이나 여유를 얻을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주인을 태우거나 수레를 끄는 일이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고 믿으니까요. 한마디로, 주인을 위해 자신이 소비한 힘의 양과 그 대가로 목초지에서 얻는 이익은 등가라는 겁니다. 이렇게 자신의 풀과 자유를 뺏은 주인에게 오히려 의존하는, 혹은 그 주인이 자기 삶에 필요하다고 느끼는 서글픈 풍경, 심지어 주인에게 버림받는 경우에도 주인을 그리워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기 싫을 때 가지 않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자유는 이제 말에게 너무나 먼 일이 되고 만 것입니다.

 

상과 벌에 의한 인간 가축화는 당근과 채찍으로 이루어지는 동물 가축화의 모든 논리를 그대로 반복합니다. 생계와 자유의 박탈이라는 원초적 폭력 과정이 먼저 이루어지니까요. 이런 조건에서 주인은 상과 벌을 내겁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면 주인은 그로부터 빼앗은 생계와 자유를 그에게 일부 허락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의 생계와 자유를 더 압박합니다. 자유를 빼앗긴 이 불행한 사람이 생존을 위해 주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상벌을 휘두르는 사람과 상벌을 따르는 사람, 즉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탄생합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 살 수 있고, 그러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태로워집니다. 주인의 의 지에 복종하는 것이 이익이고 그에 반하는 것은 손해라는 이해 감각은 이렇게 발생합니다. 이제 당근을 얻고 채찍을 피하려고 주인을 태우거나 수레를 끄는 말처럼, 인간도 상을 받고 벌을 면하기 위해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됩니다. 이해와 손해를 따지느라 이제 자신이 원하는 것은 주인이 원하는 것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맙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하는 것이 자유라면, 이제 그는 자유가 무엇인지도 헛갈리게 됩니다. 심지어 주인이 원하는 걸 하는 것도 내 자유 아니냐는 궤변을 늘어놓기까지 합니다. 이익과 손해의 감각이 강화되면 자유에 대한 감각만이 퇴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감각도 함께 시들어버리니까요. 마침내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상태에 이른 겁니다. 자기 동료를 가축으로 만들거나 자기 동료를 주인으로 받드는 동물은 없습니다. 사자도 독수리도 사슴도 그런 일은 벌이지 않습니다. 강한 동료가 생겨 자신이 밀려난다면 표연히 무리를 떠날 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리의 강자는 약자를 강한 연민을 갖고 돌봅니다. 무리에 속한 아기 사슴이나 늙은 사슴이 육식 동물의 공격을 받으면 장성한 사슴들은 그에 분연히 맞서기까지 하지요.

 

 

 

 

 

가축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

 

동료 인간에 대한 가축화! 이런 희비극은 20만 년 전부터 기원전 3000년 전후 국가가 탄생할 때까지 인간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소수 인간이 동료 인간을 가축으로 만드는 것이 개나 양 혹은 말을 가축으로 만드는 것보다 자기에게 더 큰 이익이라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인간을 동물보다 못 한 종으로 만든 그들 범죄자들은 마침내 동종을 가축화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 결과 피라미드 같은 압도적인 건축물로 상징되는 거대한 억압체제가 지상에 출현한 겁니다. 파라오 한 사람을 위해 돌을 나르는 수십만 명의 노예들을 떠올려보세요. 노예들이 일을 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파라오의 말을 거부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노예들은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이익이라고 판단했기에 돌을 날랐던 겁니다. 노예들의 꿈은 무엇일까요. 소극적으로는 파라오로부터 탈출하는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자신이 파라오가 되는 겁니다. 어느 경우든 이익과 손해에 대한 판단이 작동합니다. 피라미드 공사 현장에 있는 것과 그곳을 탈출하는 것 중 어느 쪽이 이익일까? 파라오의 명령을 듣는 것과 혁명을 일으켜 자신이 파라오가 되는 것 중 어느 쪽이 이득일까? 억압체제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점(開店)한 그 소수 범죄자들이 모든 인간들에게 이해 관념을 주입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니 누군가를 지배하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니 누군가에 복종합니다. 이제 인간 종은 이익을 꿈꾸고 이익을 다투는 개인주의자나 이기주의자로 산산이 분열되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완전히 개화하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기다려야 할 테지만요.

 

전국시대에 중국 대륙에서도 문명으로 치장한 야만이 거부할 수 없는 추세로 심화하고 팽창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는 철학자가 탄생합니다. 바로 장자였습니다. 제물론편의 사생 이야기는 그의 고독한 투쟁의 흔적입니다. 장자는 짧지만 강렬한 사생 이야기를 통해 가축화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 상벌로 길들여지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인간, 야생마나 늑대만큼 자유를 향유하는 인간을 꿈꾸었습니다. 사생 이야기는 설결이라는 제자의 의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스승 왕예는 이익과 손해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이익이라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 권력이나 부, 지식 등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지위나 황금을 보면 그것을 거머쥐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그런 것들에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반대로 스승은 남들이 손해라고 생각하는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합니다. 예를 들어, 유력 인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부모를 잃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식이었죠. 그러니 제자의 눈에 스승의 행동은 그의 이름답게 어린아이와 같아 보였던 겁니다. ‘군주라는 뜻의 ()’어린이라는 뜻의 ()’로 이루어진 왕예는 왕과 같은 아이절정의 천진난만이라는 의미입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놀고 싶으면 놀고, 먹고 싶으면 먹고, 똥을 누고 싶으면 시원하게 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함께 있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냥 떠나버립니다. 제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하기 싫으면 그냥 침묵합니다. 책을 좋아하다 어느 순간 책을 멀리합니다. 정말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스승입니다. 영민한 제자 설결은 스승의 모습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그는 물어본 겁니다. “선생께서는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하니, 지극한 사람은 이익과 손해를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제자가 던져야만 하는 질문을 던졌기에, 왕예는 행복했을 겁니다. 스승은 친절하게 지극한 사람, 즉 지인(至人)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먼저 스승은 이해 관념에 지배된 사람의 눈에 지인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스럽게 보일 것이라며 말을 시작합니다. 이어서 그는 가축이 되기 전 인간의 삶을 문학적으로 묘사합니다. 사실 장자 당시 인간농장이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었지만, 중국 대륙의 인간농장 사이사이나 혹은 중국 대륙 바깥에는 지배에의 욕망이나 복종에의 욕망이 싹트지 않은 인간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문()과 대조적으로 야()라고 불리던 공간,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라 불리던 공간이 바로 그곳입니다. 여행의 귀재인 장자가 이곳을 가보지 않았을 리 없죠. 억압체제가 없으니 거대한 규모의 궁궐이나 사치 시설도 찾아보기 힘든 곳입니다. 자연환경에 어우러져 자유로운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이 서로 도우며 살고 있을 뿐이었죠. 거대 문명에 적응한 사람들 눈에 그들의 삶은 불편하고 미개해 보였을 겁니다. 그렇지만 장자의 눈에는 가축화되지 않은 그들의 자유로운 삶은 그야말로 오래된 미래로 보입니다. “넓은 습지가 불타올라도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황하와 한수가 얼어붙어도 그를 춥게 할 수 없고, 벼락이 산을 쪼개고 폭풍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다네. 이와 같은 사람은 구름의 기운을 타고 해와 달을 몰고 사면의 바다 밖에서 노닌다네.” 산불이 발생해도, 추위가 몰려와도,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동요하지 않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멋진 구름을 보며 바람을 맞고 낮과 밤을 향유하는 사람들, 천하 혹은 국가질서 밖에서 유유자적한 사람들! 가축화되기 전, 자유로운 공동체에 살고 있던 야생마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불이익 vs 삶이라는 이익

 

장자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상벌 체계, 즉 법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 동료를 가축으로 만들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적 경향이 약화된다는 인류학적 연구 성과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 대상이 동물이든 인간이든 가축화 과정은 결국 개체를 자신의 이해와 손해만을 따지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채찍을 맞는 동물이나 인간이 어떻게 동료를 돌아볼 여유가 있겠습니까? 상과 벌이 개체의 생존을 결정할 정도로 강력할 때, 인간은 그만큼 더 자기 자신에 매몰되고 자기 이해에 몰두하게 됩니다. 간혹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를 인간의 동물적 본성으로 규정하고 사회나 국가가 그 이기주의를 바로잡는 강제력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개인주의나 이기주의가 억압체제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은폐하고, 오히려 억압체제의 가축화 논리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자본론(Das Kapital)에서 자본주의를 조롱하면서 벤담을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이루어지는 유통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진정한 낙원이다. 이곳을 지배하는 것은 자유(freedom), 평등(equality), 소유(property) 그리고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이다. 자유! 왜냐하면 상품(예를 들어 노동력) 교환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오로지 그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구매자와 판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자유롭고 대등한 인간으로 계약을 맺는다. () 평등! 왜냐하면 이들은 오로지 상품 소유자로서만 서로 관계하며 등가물을 서로 교환하기 때문이다. 소유! 왜냐하면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의 것만을 처분하기 때문이다. 벤담! 왜냐하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의 관계로 묶어주는 유일한 힘은 각자의 이기심, 이득, 그리고 사적인 이익이다.”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노동자와 노동력을 구매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자본가 사이의 교환은 자유, 평등, 소유의 이념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특히 몸뚱이만 갖고 있는 것도 소유라고 이야기하니 말문이 막힐 일입니다. 마르크스가 억압체제가 억압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자유, 평등 그리고 소유라는 이데올로기와 어울리지 않게 벤담이라는 고유명사를 병기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벌을 휘두르는 지배자의 이기심과 상을 얻고 벌을 피하려는 피지배자의 이기심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예리한 통찰이 자, 피지배자의 이기심에 대한 서글픈 풍자입니다. 피지배자의 이기심, 즉 노동자의 이기심은 탐욕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것이기에 서글픕니다. 강자에게 굽신거리는 것은 불쾌하지만,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면 기꺼이 감당합니다. 마치 자신이 지배자라도 되는 양 나보다 약한 사람을 부리는 것은 무언가 찜찜하지만,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되면 눈을 질끈 감고 자행합니다. 여기서 자유와 사랑의 감각은 숨도 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지 않는 것이 자유입니다. 뛰고 싶으면 뛰고 걷고 싶으면 걷는 야생마처럼 말입니다. 이익이 되니 뛰거나 이익이 되니 걷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경우도 생각해보세요. 나에게 기쁨을 주는 대상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도 나를 통해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 기뻐야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으려 할 테니까요. 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나는 기꺼이 온갖 손해도 감당합니다. 돈도 써야 하고 시간도 들여야 하고, 심지어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면서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죠. 사랑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 자유가 구체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 자신이나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합니다. 사랑하는 대상 곁에 있을 수 없을 때 우리는 부자유를 느낍니다. 반대로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나 혹은 내가 무서워서 내 곁에 있는 것을 우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상대방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 곁에 있는 것이니까요.

 

이익과 손해를 모른다는 것, 그것은 상을 얻으려 하거나 벌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즉 복종에의 본능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유와 사랑의 감각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만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사생 이야기는 상과 벌로는, 혹은 당근과 채찍으로는 행동을 유도할 수 없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가 지인(至人)입니다. 당근과 채찍으로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배자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동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의 목을 조르며 협박하는 겁니다. “너 죽고 싶니!!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그렇습니다. 이익과 손해의 최종 심급에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불이익이나 손해는 바로 자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익과 손해를 모르는 것만으로는 지극한 사람을 규정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위태롭지 않은 한 우리는 손해를 나름 감수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승 왕예는 지인은 사생, 즉 죽음이라는 불이익과 삶이라는 이익마저 넘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죽고 사는 일도 그에게 어떤 변화도 줄 수 없는데, 하물며 이익과 손해라는 작은 실마리에 대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야생마가 처음 포획되었을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 혹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처음 잡혔을 때 느끼는 죽음의 공포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생계와 자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박탈과 폭력, 혹은 포획된 상태에서 가해지는 최초의 채찍이나 최초의 벌! 바로 여기서 가축화에 맞서 야생마는 그리고 인간은 씨익하고 웃었어야 했다는 겁니다. “그래, 차라리 죽여라! 나는 자유로 살았고 자유로 죽을 테니.” 너무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신의 삶을 향유하고 사랑하는 것 옆에 있으려면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장자가 사생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니까요.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14. 왓 어 컬러풀 월드 / 16. 인과율을 가로지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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