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자유를 품고 사는 삶
지리소 이야기
지리소라는 사람은 턱이 배꼽 아래로 내려와 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으며 목덜미의 뼈가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의 경혈이 위로 향했으며 두 넓적다리의 뼈가 갈비뼈에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자기 밥벌이를 충분히 했고, 산 가지를 흔들고 쌀을 뿌리며 점을 쳐서 열 사람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다.
支離䟽者, 頤隱於齊, 肩高於頂, 會撮指天, 五管在上, 兩髀爲脇. 挫鍼治繲, 足以餬口; 鼓筴播精, 足以食十人.
국가가 징병하려 할 때도 이 불구자는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징집관들 사이에서 노닐 수 있었다. 국가가 부역을 강제할 때에도 그는 만성질환으로 부역을 면했다. 심지어 국가가 병든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줄 때도 그는 세 포대의 쌀과 열 묶음의 땔나무를 받았다. 무릇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사람’조차 충분히 자신의 몸을 기르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덕을 불구로 만든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上征武士, 則支離攘臂於其間; 上有大役, 則支離以有常疾不受功; 上與病者粟, 則受三鍾與十束薪. 夫支離者其形者, 猶足以養其身, 終其天年, 又况支離其德者乎! 「인간세」 15
어떻게 하면 가축화의 그늘을 피할 수 있을까
인재가 되지 않겠다는 격렬한 의지! 무용에 대한 절절한 예찬! 장자 사유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행복한 삶이 가능하리라는 주문이 아직도 통용되는 지금, 우리의 뒤통수를 제대로 가격하는 장자입니다. 쓸모의 논리는 기원전 13000년 이후 시작된 동물 가축화에서 탄생합니다. 소, 양, 닭, 말 등 인간에게 쓸모가 있는 동물만이 가축이 됩니다. 물론 가축이 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만도 없습니다. 일을 할 수 없거나 번식을 할 수 없거나 털이 잘 자라지 않거나 달릴 수 없다면 가축들은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미 축사에서 가축으로 태어난 동물들도 쓸모가 있 음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쓸모가 있어야 길들여지고, 쓸모가 있어야 그나마 알량한 생명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바로 가축입니다. 기원전 3000년 인간은 가축화의 논리를 동료 인간에게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축화된 인간이 피지배계급이 되고 가축화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인간이 지배계급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과 국가의 기원이죠. 장자는 인간 가축화의 논리가 확대되고 심화하는 과정을 안타깝고 씁쓸하게 목도했던 철학자였습니다. 전국시대의 부국강병은 인간 가축을 누가 더 많이 확보하고 효율적으로 기르느냐 혹은 다른 국가의 인간 가축을 얼마나 빼앗느냐로 결정되는 게임이었습니다. 『관자(管子)』에 ‘목민(牧民)’이 편명을 넘어서 지배자의 능력으로 표방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당시 장자만이 목민의 논리에서 지상 최대의 야만성을 직감합니다. 무용에 대한 장자의 예찬은 바로 이 대목에서 등장하게 됩니다.
동물 가축화에 적용되는 쓸모의 논리는 인간 가축화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가축화되기 이전에 무용(無用)은 축복이지만, 가축화 이후 무용은 비극의 씨앗이기 때문이죠. 결국 쓸모가 있으려는 의지와 경쟁은 완전히 가축화된 인간의 서글픈 생존 본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장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인간 가축화로부터 벗어난 삶의 공간들이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국가 바깥에서도 심지어 국가 내부에서도 동료를 가축으로 부리지 않는 자유로운 작은 사회가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자유인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실례로 전국시대 패권을 다투던 일곱 국가들의 영역은 고작해야 한반도의 두세 배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국가주의는 강렬했지만, 그 영역은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하지만 인간 가축화를 꿈꾸던 국가로부터 자유인들의 삶은 위태롭기만 하죠. 국가는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다고 판단하면 자유인들을 가축화하려고 시도할 테니까요. 그러니 국가의 입장에서 쓸모가 없어야 합니다. 아니, 최소한 쓸모가 없는 듯 보여야 합니다. 인간 가축화를 괴멸시킬 수 없더라도, 최소한 가축화라는 당면한 소나기라도 피하려면 말입니다. 이것이 『장자』 도처에 무용을 강조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진 이유입니다. 너무나 쓸모가 없어서 인간에 의해 베이지 않고 거대하게 자란 나무를 다룬 거목 이야기가 그 대표일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무용을 예찬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압권은 ‘지리소’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하면 가축화의 그물을 바람처럼 피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테니까요. 나무에게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선택할 여지가 없지만, 인간은 가축화의 다양한 쓸모 논리에 맞서 무용의 다양한 전략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리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거목에게서 배울 수 없는 무용의 디테일을 지리소라는 인간에게서 배울 수 있으니까요.
지리소 이야기는 반전이 있어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충격적인 반전을 맛보기 전에 먼저 지리소라는 사람이 누린 무용의 삶을 묘사하는 전반부를 살펴보죠. ‘지리소(支離疏)’는 글자 그대로 ‘지리한 소’라는 뜻입니다. 지리라는 말은 뒤에 지리멸렬(支離滅裂)이라는 성어로 더 구체화되죠. ‘가지’나 ‘지엽적인 것’을 뜻하는 ‘지(支)’, ‘분리’나 ‘분열’을 뜻하는 ‘리(離)’, ‘파괴’나 ‘소멸’을 뜻하는 ‘멸(滅)’, 그리고 ‘찢어짐’이나 ‘해짐’을 뜻 하는 ‘렬(裂)’로 구성된 지리멸렬은 그야말로 인간이 원하지 않는 모든 상태의 집결판입니다. 인간이라면, 특히 권력욕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가 아니라 몸통을 분열이 아니라 통일을, 파멸이 아니라 번성을, 해짐이 아니라 신선함을 원할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지리한 소는 지리멸렬해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 아니 정확히 말해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지리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불구자였습니다. “턱이 배꼽 아래로 내려와 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으며 목덜미의 뼈가 하늘을 가리키고 오장의 경혈이 위로 향했으며 두 넓적다리의 뼈가 갈비뼈에 이어져 있었다.” 지리소는 위고(Victor Marie Hugo, 1802~1885)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에 등장하는 콰지모도, 그 괴물 취급을 받던 꼽추와 흡사한 불구자였습니다. 지리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보면 너무나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누구든 그를 만난 것마저 서둘러 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누구도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지리소는 쓸모가 없는 정도를 넘어 그 존재 자체가 쉽게 망각되었던 겁니다. 지리소는 표정이나 윤편과는 격을 달리합니다. 표정이나 윤편이 육체노동을 하는 소인이었다면, 지리소는 소인이라는 신분보다 더 열등한, 정확히 말해 천-천자-대인-소인이라는 국가질서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꼽추 지리소의 삶의 지혜
일단 지리소가 혐오감을 줄 정도로 심각한 불구자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의 몸은 그의 이름처럼 그냥 지리멸렬했기 때문입니다. 거목 이야기의 나무처럼 그는 쓸모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국가는 당연히 지리소를 군인으로 징집할 수도 없고 강제 노역에 동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국가가 징병하려 할 때도 이 불구자는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징집관들 사이에서 노닐 수 있었다. 국가가 부역을 강제할 때에도 그는 만성질환으로 부역을 면했다.” 전국시대에는 국가가 지금처럼 완전한 영토국가가 아니었고, 당연히 오늘날처럼 호적도 정리하지 못했죠. 지금처럼 징집 명령 문서나 노역 명령 문서를 집으로 보내 징집이나 부역 명령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료들이 군인들을 대동하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서 있다가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식으로 인력을 충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노트르담의 꼽추 같은 지리소를 거들떠보는 관료나 군인은 없었습니다. 지리소는 전쟁이나 노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될 것이 뻔했으니까요. 더군다나 지리소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복지정책의 수혜자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국가가 병든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줄 때도 그는 세 포대의 쌀과 열 묶음의 땔나무를 받았다.” 다수 피지배자들을 지배할 때 소수 지배자는 채찍만으로 그 뜻을 관철할 수 없습니다. 잘못했다가는 다수 피지배자들이 연대해 폭동이나 혁명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형식의 국가든 당근 정책을 필요로 하는 법이죠. 지리소의 몸은 병든 사람보다 더 병들어 보였기에, 그는 정부가 건넨 당근을 깔끔하게 수령했던 겁니다.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지리소가 지배자를 수탈하는 모습이 이채롭기까지 합니다. 물론 지배자가 건넨 당근은 다수 피지배자로부터 수탈한 것이지만요.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다면 지리소 이야기는 거목 이야기와 차이가 없습니다. 나무는 잘리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크게 자랄 수도 있습니다. 극심한 기후 변동이 아니라면 나무는 대지로부터 물과 양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은 식물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돌아다니면서 식량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국가의 당근에 의존하지 않고 생존할 수 없다면, 지리소는 사실 가축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리소 이야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그가 생계를 유지할 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가축화를 시도하는 국가의 시선에서 지리소는 무용해 보일 뿐입니다. 지리소 그 자신은 무능하지도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는 바느질과 빨래를 해서 자기 밥벌이를 충분히 했고, 산가지를 흔들고 쌀을 뿌리며 점을 쳐서 열 사람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정이나 윤편은 사실 일정 정도 가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지배자 입장에서는 쓸모 있는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나이가 들어 소를 잡지 못하거나 수레바퀴를 깎지 못하면 버려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포정이나 윤편은 버려져도 자신의 기술로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소인이 가진 힘입니다. 하지만 지리는 누군가로부터 버려질 일도 없고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이미 버려져 있는 상태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충분히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지리소라는 캐릭터가 가진 특이성입니다. 누군가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쓸모를 사용하는 삶! 바로 이것이 지리소의 삶입니다. 체제에 쓰이지 않으면 못 사는 삶이 아니라, 체제가 없어도 자신의 삶뿐 아니라 타인의 삶도 돌볼 수 있는 힘! 지리소의 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리소가 가진 긍정의 정신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그가 불구라고, 다른 사람에 비해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전국시대 때는 노역이나 전쟁으로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팔이나 다리가 있던 때와 현재 상태를 비교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극에 절망하며 살아갔을 겁니다. 배우자와 포옹하기도 힘들고 아이와 산책을 가기도 힘듭니다. 심지어 불구라는 쑥덕거림과 동정이 싫어 대인 기피증에 빠지거나 술로 나날을 지새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지리소는 자기 몸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꼽추처럼 허리가 굽었으니 그는 허리 굽혀 하는 일이 편합니다. 바느질과 빨래의 고수가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허리가 곧은 정상인들은 지리소만큼 오랜 시간 허리를 굽혀 일하기 힘들 겁니다. 혐오감을 줄 만큼 기이한 외모는 지리소에게 종교적 아우라를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다른 외모는 종교적 아우라만 얻으면 일상적 삶을 넘어가는 영역, 즉 성스러운 영역에 맞닿아 있는 느낌을 줍니다. 지리소가 주역(周易) 점을 쳐서 복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지리소는 진정한 삶의 요리사였습니다. 진짜 요리사는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대한 근사한 요리를 만듭니다. 반면 미숙한 요리사는 말합니다. 당근이 없어서, 소고기가 없어서 요리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절망합니다.
자신의 덕을 불구로 만들다
지리소는 ‘나는 불구자야’ ‘나는 누가 부축해줘야 움직일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로 자신의 최고 역량을 발휘하죠. 그렇기에 징집관에게 징집당하지 않았을 때도 ‘나는 나라에서도 버려졌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다시 말해 바느질을 하고, 빨래를 하고, 점을 칩니다. 지리소는 챙길 것은 다 챙긴다는 겁니다. 국가에서 병든 이들에게 곡식을 나눠 줄 때 세 포대의 쌀과 열 묶음의 땔나무를 냉큼 챙기죠. “저번에는 줬으면서 이번에는 왜 안 줘?”하며 따지지도 않습니다. 받을 게 있다면 다 받습니다. 주어진 조건이 그러니까요. 주어져 있는 것들이 지리에게는 최고인 것이죠.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헤엄쳐 나아갑니다. 더군다나 자기 밥벌이는 물론 열 사람을 부양하기까지 하죠. 강력한 생활력입니다. 열 사람은 아마도 제2의 지리소, 제3의 지리소 등일 겁니다. 중요한 것은 지리소가 전혀 이기적이지 않다는 사실, 누군가를 먹여 살린다는 사실입니다. 지리소는 열 사람을 지배하거나 수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업고 있죠.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피지배자에 기생하는 억압구조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는 대목입니다. 상명하복에서 벗어난 작은 사회,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가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지리소에게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의식, 혹은 조금 더 추상적으로 말해 현재 상태를 다른 상태와 비교하는 의식,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비교하는 의식이 없습니다. 바느질과 빨래를 못 하게 되어도 혹은 종교 상행위를 못하게 되어도, 지리소가 자신의 삶을 근사하게 영위하리라 믿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심지어 우리는 그가 국가질서가 소멸해도 자신의 삶을 당당히 아니 더 멋지게 살아내리라 확신하게 됩니다. 그는 주어져 있는 조건에서 삶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끌고 가는 사람이니까요.
지리소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장자는 말합니다. “무릇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사람조차 충분히 자신의 몸을 기르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덕을 불구로 만든 사람’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덕(德)이라는 한자를 나누어보세요. ‘얻다’를 뜻하는 ‘득(得)’이라는 한자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이라는 한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덕’이란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덕’을 매력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리소 이야기에서 마음은 가축화의 의지를 가진 국가나 지배자의 마음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가축으로 만들고 싶은 개체의 측면이 바로 ‘덕’입니다. 전쟁이나 노역에 동원해야지 하고 판단하는 측면이 바로 건강한 몸, 아니 최소한 겉보기에 정상적인 몸입니다. 지리소는 바로 이 매력, 즉 말이나 소에서 국가가 기대하는 측면을 무력화시킨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상적인 몸만이 국가가 사용하려고 군침을 흘리는 것은 아니지요. 아름다움[美]도, 지혜[知]도, 부유함[富]도, 젊음[靑春]도, 성실[誠]도 모두 국가가 이용하고 싶어 하는 매력일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모든 매력, 다시 말해 매력 일반 자체도 철저하게 불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덕을 불구로 만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물론 그 대가는 치명적인 데가 있습니다.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병역이나 노역에서 자유를 얻지만 몸의 가능성을 스스로 위축시키게 되니까요. 우리는 지리소처럼 앉아서 하는 일만 하면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장자는 말합니다. 그 몸을 불구로 만들더라도 가축화를 꿈꾸는 지배자의 야망을 무력화시켜야 한다고 말입니다. 폭풍우와 같은 질주 능력 때문에 포획되는 야생마보다는 다리를 저는 야생마가 낫다는 장자의 서글픈 권고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궁금해집니다. 지리소 이야기의 반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분명 지리소는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와 같이 묘사됩니다. 지리소는 선천적인 불구라는 인상이 강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소는 자신의 불구를 결여나 부족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주어진 재료로 최선의 요리를 만드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늙음을 젊음의 부족으로 비관하거나 가을을 봄의 번성함의 부족이라고 우울해하는 어리석은 일반 사람과는 다릅니다. 지리소는 젊음이든 늙음이든, 혹은 봄이든 가을이든 충만한 것으로 향유하는 강건함의 상징이니까요. 그런데 장자는 지리소 이야기 결론부에 ‘지리소를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다시 말해 지리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불구가 된 사람이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여기서 ‘불구로 만든다’로 번역한 동사 ‘지리(支離)’는 목적어를 가진 타동사입니다. 불구로 만들 수도 있고,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지리소는 가축화의 의지에 맞서기 위해,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든 겁니다. 이제 궁금해지지 않나요?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들었을 때 지리소는 자신의 몸을 회복 불가능하게 훼손했을까요? 국가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망가뜨리면서 자신의 삶마저 위축시키고 불편하게 만든 것일까요? 이 대목에서 말을 사로잡으려는 인간들이 떠나자 다리 절기를 멈추고 질주하기 시작하는 야생마의 모습을 연상해보세요. 가축화의 논리가 괴멸될 때까지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사람, 가축화에 맞서 온갖 불편함을 감당하는 사람, 바로 그가 지리소였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6월의 태풍을 기다리며 물에 처박혀 있던 곤, 대붕을 꿈꾸며 그 불편했던 곳을 견뎌냈던 곤처럼 말이지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꼽추를 연기했던 지리소가 몸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비록 내일 다시 콰지모도를 연기할 테지만 말입니다.
인용
16. 인과율을 가로지르며 / 18. 신과 영혼에 대한 애달픈 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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