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은 살아 있습니까?”
‘오서리티(authority)’라는 영어 단어가 있습니다. 주로 ‘권위’라고 번역되죠. 그런데 이 단어를 들여다보면 ‘권위’, 즉 ‘authority’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단어가 하나 들어 있습니다. 바로 ‘author’, ‘작가’를 의미하는 말이죠. 작가는 기본적으로 남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떠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나아가 그를 존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표절은 윤리적 문제나 법적 문제가 아니라 작가의 본질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죠. 결국 ‘오서리티’는 권위라는 뜻 이전에 ‘작가임’으로, 그리고 ‘작가임’은 ‘앵무새가 아님’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왜 윤편의 말이 권위 혹은 힘을 갖는지 알게 됩니다. 윤편은 작가였던 겁니다. 최소한 끌질과 관련된 모든 것, 구체적으로 말해 그가 만든 근사한 수레바퀴, 그의 끌질 퍼포먼스, 아들에게 끌질에 대해 했던 말 등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니까요. 윤편의 아들은 아버지가 만든 수레바퀴, 아버지의 끌질, 나아가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을 언제쯤 이해하게 될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아버지 윤편의 모든 것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버지가 그랬듯 윤편의 아들도 직접 끌을 잡고 수레바퀴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버지처럼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 아들은 아버지 윤편의 모든 작품을 이해할 겁니다.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된 아들이 왜 과거 아버지가 자전거 타는 법을 그렇게 설명했는지 깨닫는 것처럼 말입니다.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윤편의 가르침은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그의 아들 또한 배울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아들에게 그나마 도움이 되려면, 윤편이 아들과 함께 수레바퀴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마 아들이 수레바퀴를 깎은 모습을 본다면, 윤편은 이와 다른 가르침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갑자기 끌이 부드럽게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 끌 잡은 손에 힘을 풀고, 끌이 겉도는 느낌이 들면 약간 끌을 비틀어라”라는 식으로 말이죠. 윤편의 몸과 아들의 몸이 다르고, 아울러 모든 목재가 같지 않으니, 가르침은 그야말로 수천 가지로 변주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끌질이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된다”는 하나의 가르침은 윤편에게는 그야말로 다른 것으로 대체해도 좋을 찌꺼기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윤편이 몸소 아들과 함께 수레바퀴를 깎으며 아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 수레바퀴 깎는 법을 글로 남겨 아들에게 전했다면 어떨까요. 아버지의 비법이 담긴 책을 달달 외운다고 해서 아들이 수레바퀴를 잘 만드는 장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건 그냥 참고 자료일 뿐이죠. 어차피 아들은 자기만의 시행착오를 거쳐 목재를 “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얻어야 하니까요. 사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비책은 외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많을 겁니다. 최종적으로 아버지 윤편의 손이나 마음이 아닌, 자기만의 마음과 손이 중요한 순간이 올 테니까요.
수레바퀴 깎는 방법만 그럴까요. 사랑하는 방법, 수영하는 방법, 요리하는 방법, 사회생활 하는 방법 등등 삶과 관련된 모든 방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니 윤편의 눈에는 경전을 읽고 그 지침대로 살면 성인처럼 되리라는 환공의 믿음이 우스워 보였겠지요. 오히려 성인을 앵무새처럼 흉내 낸다면, 환공이 자기가 처한 정치적 상황을 온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죠. 물론 경전이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인이 살아서 시범을 보이고 아울러 환공이 정치하는 것을 보고 있다면 말이죠. 물론 이 경우 경전의 내용은 지금 환공이 읽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게 표현되겠지요. 그래서 윤편은 환공에게 물었던 겁니다. 경전을 만든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던 이유를 윤편은 변론 마지막 질문으로 다시 강조하죠. “옛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게 아닙니까!” 자, 이제 변론은 끝났습니다. 환공은 윤편을 살려두었을까요, 아니면 죽였을까요? 환공은 경전을 던져버렸을까요, 아니면 계속 읽었을까요? 어쨌든 환공의 권력에 맞섰던 작가 윤편의 권위와 당당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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