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쓸모 있는 길을 갈 것인가
나무든 사람이든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개체는 재목으로 부적절합니다. 그러나 나무가 목재가 되는 것과 인간이 인재가 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나무가 목재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나무가 동물에 비해 운동성이 적기 때문이지만, 가축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재로 쓰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동물 특유의 운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운동성이 없다면, 말이 힘이 없다면, 우리는 말을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무거운 것을 끄는 수단으로 쓰지 않을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성과 힘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적용되는 인재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 1831)의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에 등장하는 주인과 노예 개념이 도움이 됩니다. 주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고, 노예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노예를 제대로 쓰려면 노예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하나는 육체적으로 강건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무를 죽여야 만들어지는 목재와는 달리, 사람을 죽여야 인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이 노예에게서 착취하려는 것은 그의 노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쓸모가 없는 것이 노예인데, 죽은 사람은 노예를 만들 수조차 없는 법이죠.
목재와 인재의 공통성을 생사 여부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수동성과 부자유에서 찾아야 하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만이 그 타인에게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강제로 잡혀서 노예가 되었는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었는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예든 현재의 임금노동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나 돈을 주는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물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하게 되는 메커니즘은 다릅니다. 강제로 잡혀 와 주인이 원하는 재능을 강제로 익히는 노예화의 과정은 주인 후보자들이 원하는 재능을 자발적으로 익혀 스스로 자신을 파는 과정과는 구별되니까요. 그렇다고 임금노동자가 노예보다 더 낫지 않냐고 속단하지 마세요. 타율적 복종이든 자율적 복종이든 복종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요.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먹고살 길이 있기에 주인의 감시를 피해 탈출하려는 노예가 그나마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는 자본가로부터 도망가지 않습니다. 물론 특정 자본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임금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반드시 제 발로 다른 자본가를 찾아가야 합니다. 임금 노동자는 새로운 자본가에게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어필할 겁니다. 먹이를 얻으려고 “저는 튼튼하고 일을 잘하니 부려 주세요”하며 찾아온 기묘한 말이 바로 임금노동자인 셈입니다. 과거의 노예나 말에게 임금노동자는 미친 노예나 혹은 미친 말로 보일 겁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특정 회사는 떠날 수 있다고, 그래서 자신은 자유롭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책과 교재, 즉 북(book)과 텍스트(text)의 차이를 생각하면 인재의 논리가 우리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내가 읽고 싶어서 읽는 것이 책이라면, 남이 읽어야 한다고 강요해서 읽는 것이 바로 교재입니다. 책은 하품을 유발하지 않지만 교재는 하품을 넘어 졸음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책은 읽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반면 교재는 읽기 싫어도 봐야 합니다. 시험도 봐야 하고, 그 결과가 진학이나 취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니까요. 교재는 나의 재능을 입증하는 관문인 셈이죠. 그러니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가깝게는 성적과 스펙, 최종적으로는 취업을 위한 수단입니다.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읽는 책과 자신을 통제하는 혹은 통제할 타인을 위해 읽는 교재는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거리만큼 다릅니다. 책이 사라지고 교재만 남았다면, 이제 정말 주인의 삶은 꿈꾸기 어렵게 된 겁니다. 남에게 쓸모 있는 길을 가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돌볼 여력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과거 중국의 전국시대도 현재 자본주의 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재가 되지 않으면 굶어 죽고, 인재가 되면 살아도 죽은 것과 진 배가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고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해도 죽은 것이라면, 같은 말이지만 쓸모가 없어도 베이고 쓸모가 있어도 베인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체제를 떠나서도 살 여지가 있었던 시절, 아니 그럴 용기가 있었던 장자의 시절, 신인(神人)이 아직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한 날입니다. 쓸모없어 좋은 날, 그날은 언제쯤 올까요?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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