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광막지야에서 장자가 본 것
성심 이야기
대저 ‘이루어진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만이 스승이 있겠는가? 우매한 자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승을 가지고 있다.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無師乎? 奚必知代而自取者有之? 愚者與有焉!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이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어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면 설령 신비한 우임금이라도 알 수 없는 일일 텐데, 나 또한 어찌하겠는가!
未成乎心而有是非, 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爲有. 無有爲有, 雖有神禹且不能知, 吾獨且奈何哉! 「제물론」 5
장자가 바라본 유목민의 삶
야크, 바람, 거목, 초원, 정글, 원숭이, 악어 등등, 『장자』를 읽으면 우리는 장자가 여행의 귀재임을 알게 됩니다. 남쪽으로는 아열대 지역부터 북쪽으로는 유라시아 초원까지 장자의 여행 스케일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 아열대보다는 북쪽 유라시아 초원과 고원지대가 장자가 선호했던 여행지임이 분명합니다. 「소요유」 편에 들어 있는 네 선생 이야기에서 요임금이 간 곳이 ‘분수의 북쪽[汾水之陽]’이라는 방향성도 그렇지만, 같은 편에 등장하는 ‘광막지야(廣莫之野)’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초원지대에서 국가가 있는지도 모른 채 가축과 함께 사는 사람들,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더군다나 「소요유」 편에는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마시며 이슬을 마시고 구름의 기운을 타며 비룡을 부리며 네 바다의 바깥에서 노닌다[不食五穀, 吸風飮露, 乘雲氣, 御飛龍, 而遊乎四海之外]”는 근사한 표현도 등장합니다. 여기서 비룡은 하늘로 치솟아 초원을 가로지르는 소용돌이 바람을 연상시키고, 네 바다 바깥은 밀 이나 콩 혹은 쌀을 키우던 농경 정착생활과 천-천자-대인-소인이라는 국가주의적 정치질서 그 바깥을 의미합니다. 장자가 중국 대륙 남쪽으로 여정을 잡기보다 북쪽 초원지대나 고산지대를 선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앙유라시아의 길은 횡으로 전개됩니다. 천산산맥 북쪽의 초원길이든 천산산맥 남쪽의 사막길이든 간에 길들은 웬만하면 남북이 아니라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춥거나 건조한 것은 견딜 만합니다. 그러나 위도가 낮아져 남쪽 아열대로 접어드는 순간 모기 등 해충의 공격은 치명적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도 불편하지만 풍토병 등도 위험하죠.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중해부터 남아프리카까지 문명 교류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이런 급격한 위도 차이를 인간이 건너가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요? 비록 동물 가축화를 완성했지만, 그들은 동료 인간에게는 가축화의 논리를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수렵생활보다 가축화가 다른 동물을 다루는 간교한 방법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어쨌든 동물을 사냥하는 것보다 가축을 가르는 것이 동물 단백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법이니까요. 필요에 따라 거세를 하거나 도살을 하니, 다른 동물을 존중하는 모습은 분명 아닙니다. 유목민의 삶! 다른 동물에 대한 사냥과 인간 가축화 사이, 그 어딘가에 있습니다. 실제로 중앙유라시아에서는 스키타이(Scythia, BC 8세기~BC 3세기, 유라시아 최초의 기마 유목 민족)나 흉노(匈奴, Xingnu, BC 3세기~AD 1세기) 같은 유목국가들, 동료 인간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국가 형식들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인간 가축화로 가는 데에는 한 걸음이면 족합니다. 분명 유목국가나 유목제국의 탄생은 가축을 돌보고 이동하는 데 사용했던 말의 기수를 인간에게 돌린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목국가들은 인간을 가축화하는 야만은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국가가 대부분 무문자 사회였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겁니다. 대부분의 유목민들은 낙타나 양, 염소, 소를 키우며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가축으로부터 젖과 털 그리고 고기를 얻었습니다. 어차피 유목민도 자연을 수탈하는 것 아니냐는 노골적으로 말해, 기르던 가축을 잡아먹는 것은 유목민이나 정착민이나 차이가 없지 않느냐는 반문도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기르던 가축 한 마리를 도살하는 날, 유목민들은 가축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하는 예식을 행하고 가족 모두가 가축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도록 합니다. 가축에 대한 연민을 유지하려는 감각이고,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던 가축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지요. 이는 푸주한 등 전문가가 부위별로 해체한 고기를 사 와서 별다른 안타까움 없이 먹는 우리와는 다릅니다. 유목민들은 가축에게 최소한의 폭력만을 행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그 고기를 먹습니다. 심지어 독수리를 길들여 사냥을 하는 유목민들은 7년이 지나면 그 독수리를 풀어주기까지 합니다.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말입니다.
유목민의 삶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웃과 시비가 붙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웃이 마음에 안 들면 천막을 걷은 다음 가축을 몰고 다른 곳으로 떠나면 그만이니까요. 이웃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련 없이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마치 계절이 변해 가축들이 먹을 풀이 사라지면 신선한 풀을 찾아 떠나고, 하천이 마르거나 지하수 물길이 바뀌면 천막을 거두고 떠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유목민들은 너무 휑한 곳에서 살고 있기에 찾아오는 사람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귀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 대륙의 정착민들, 나아가 현대 우리들은 항상 이웃과 시비가 붙습니다. 우리 가 살고 있는 곳에서 떠나기 힘들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주거 공간만 생각해보세요. 정착생활이기에 가재도구가 너무 많습니다. 가볍게 그리고 자주 거처를 옮기는 유목민들에게 가재도구가 많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작지나 일터 등도 특정 공간에 고정되어 있으니 떠나기가 더 힘듭니다. 이웃 때문에 짜증 난다고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결국 모든 시비는 가볍게 떠나지 못해서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가를 떠나지 못하니 같은 국적의 사람들과 시비가 벌어집니다. 학교를 떠나지 못하니 급우들과 시비가 벌어집니다. 회사를 떠나지 못하니 동료들과 시비가 생깁니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결혼을 했기에 남녀가 갈등에 빠진다는 겁니다. 연애할 때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상대를 떠나버리면 그만일 겁니다. 떠나면 살 수 없거나 사는 것이 힘들어질 때, 그리고 내가 머무는 곳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함께 있을 때 시비는 불가피합니다.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 그르다는 것을 스스로나 타자 혹은 제삼자에게 입증해 상대방을 쫓아내려는 정착민의 무의식적 의지입니다.
정착민의 삶과 ‘성심’의 탄생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영토국가로 상징되는 정착생활이 확장되고 심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시기에 중국 대륙은 극렬한 시비 문제에 빠져들고 맙니다. 부국강병의 패권 다툼이 정착생활의 안정성을 위기 상태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성심 이야기’에 등장하는 ‘성심(成心)’ 개념은 이런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사실 성심은 『장자』에서도 제일 유명한 말 중 하나입니다. “성심을 버려라”라는 말을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선입견을 버려라” 혹은 “편견을 버려라”와 같은 뜻으로 쓰이죠. 불행히도 성심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성심은 ‘이루어진 마음’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어떤 삶의 조건에서 이루어졌는지가 중요합니다. 인간 가축화, 영토국가 그리고 신분 질서의 확립으로 완성되는 정착 생활이 문제입니다. 기원전 2000년 전후 무력으로 농경지를 점령하면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이미 기원전 6000년 전후 농경생활을 하던 농경인들은 이제 점령자들에게 토지 사용료를 내게 됩니다. 토지를 떠나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농경인들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죠. 이렇게 노동을 안 해도 먹고사는 아니 더 많이 먹고사는 지배자가 탄생하면서 중국 대륙에 국가가 탄생한 겁니다. 『시경(詩經)』 「북산(北山)」편은 당시 상황을 노래합니다.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것 없고, 모든 땅 바닷가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이 없네[溥天之下莫非王土, 率土之濱莫非王臣]” 바로 이것이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가축화의 전말입니다. 농경인들은 왕의 신하, 즉 왕신(王臣)이라는 이름으로 토지 사용료는 물론 병역과 부역의 의무도 감당하게 된 겁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떠나는 유목민과 달리 농경인들은 토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기에 벌어진 비극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자들도 농경인과 마찬가지로 정착민이 됩니다. 토지와 농경인을 떠나서는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죠. 지배자는 피지배자는 정착민은 최소한 자신이 점유한 공간에 머물려고 하거나 기회가 되면 영역을 넓히려고 합니다. 정착한 공간이 국가든 지역이든 회사든 가정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정착 공간에서 이웃과 갈등이 벌어질 때 정착민의 사유는 자신의 정착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성심!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착생활에서 만들어진 마음입니다. 자신의 집, 자신의 땅, 자신의 가족, 자신의 가축, 자신의 지위, 자신의 신분. 자신의 국가 등 정착지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에 편안해하는 마음입니다. 성심을 정착민이 갖게 되는 마음 혹은 정착민적 마음이라고 구체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농민의 성심, 장인 의성심, 귀족의 성심, 군주의 성심 등의 표현이 모두 가능합니다. 나아가 송나라 사람의 성심이나 조(趙)나라(BC 403~BC 228) 사람의 성심, 혹은 월나라 사람의 성심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착민의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은 국가나 문화, 지역, 회사, 지위, 신분 등등 그의 다층적인 정착성에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차원에서든 정착성에 위기가 닥칠 때 벌어집니다. 정착민은 자신의 정착성을 의식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대저 ‘이루어진 마음’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그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번역한 ‘사(師)’라는 글자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정착성을 보편적 진리로 삼겠다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자기 정착지를 위험에 빠뜨리는 불편한 이웃 혹은 타자적 사건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이기도 하고, 자기 정착지를 지키겠다는 결코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인 셈이죠.
특히나 자기 정착지가 넓거나 그곳에서 자신이 가진 것이 많을수록 성심을 스승으로 삼으려는 의지는 통제할 수 없이 강해질 겁니다. 유목민에게는 찾기 힘든 특성입니다. 유목민에게는 정착민적 마음이 미미하니, 성심을 스승으로 삼는 경향도 그만큼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목민에게도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성심, 즉 정착민적 마음과 무관합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자연이나 도래하는 동료 유목민을 긍정합니다. 계절이 변하거나 동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이나 낙타에 가재도구를 싣고 떠나면 그뿐입니다. 유목민의 자유가 본질적으로 떠날 수 있는 자유에서 구체화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성심 개념은 이제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떠날 수 없기에 정착지를 놓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 혹은 정착성을 유지하거나 강화하려는 정착민의 경향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착성의 강화가 역사성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이 커지고 견고해지는 것. 토지 외곽의 돌담이 두꺼워지고 높아지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그것이 궁궐이 되고 성곽이 됩니다. 중국 고대사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이행합니다. 철기가 청동기를 대신하면서 정착민들의 생산력은 그야말로 폭발합니다. 그에 따라 지배자들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부와 권력을 손에 넣게 됩니다. 당연히 춘추시대의 정착성 양상은 심각하게 요동치게 됩니다. 춘추시대 때의 전쟁만해도 지배층 중심으로 전거(戰車)를 이용해 이루어졌지만, 전국시대 때의 전쟁은 피지배층도 참여하는 총력전으로 기병(騎兵)이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춘추시대적 정착성을 유지하려 는 측과 전국시대에 맞는 정착성을 모색하는 측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합니다. 새로운 정착성은 철기, 기병, 총력전이라는 키워드와 관련되고, 바로 변법(變法)으로 구체화됩니다. 아마 그 상징적인 인물은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 BC 340~BC 295) 일 겁니다. 기원전 306년에 유목국가 전사들의 궁술과 기병 전략을 수용하고 그에 맞는 유목민의 복장을 몸소 입은 군주죠. 춘추시대의 복은 활을 쏘거나 말을 타기에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호복기사(胡服騎射)’, 즉 “유목민 옷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쏜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무령왕에 대한 불만이 녹아 있는 고사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와 힘
성심 이야기에는 변법과 관련된 전국시대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어찌 반드시 변화를 알아 마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만이 스승이 있겠는가? 우매한 자도 이런 사람과 마찬가지로 스승을 가지고 있다.” ‘변화를 알아 마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는 철기 사용으로 시작된 변화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그에 맞는 사회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정착 질서로서 변법을 옹호하는 사람이죠. 분명 실현하려는 이상이 있으니 자기만의 스승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정착사회에 몰아치는 변화의 바람에 무감각한 사람도 자기만의 스승을 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의 스승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정착 질서입니다. 장자의 날카로운 통찰입니다. 부국강병의 열풍에 휘말린 피지배자들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들마저 정착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폭로하니까요. 오래된 도시에 신도시가 들어서는 경우, 수도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경우, 마을에 기찻길이나 고속도로가 새로 뚫리는 경우, 도시에 공업단지가 새로 만들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이 모든 정착 성의 변동은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정착성을 유지하거나 확장하려는 지배자의 의지인 셈이죠. 부국강병에 실패하면 국가가 쇠퇴하고 나아가 국가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일단은 자신의 궁궐, 자신의 창고, 자신의 영토만은 지키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피지배자들의 정착성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하긴 농경국가가 농경민들을 가축화하는 폭력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피지배자를 배려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일 겁니다. 피지배자들은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변화에 맞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억압에 맞서는 자유의 투쟁이 아니라 익숙한 정착성을 지키려는 정착민적 의지일 뿐입니다. 내 집, 내 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웃을 추방하려는 의지가 다시 드러난 셈이죠.
정착사회, 구체적으로 영토국가는 지배자는 피지배자는 정착성의 양식을 놓고 격렬히 대립하게 됩니다. 양자 모두 정착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정착사회가 역사를 갖는 이유입니다. 대부분 지배계급은 자신의 정성을 유지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착성 양식을 고안하고 변신을 도모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변화의 기차를 갈아타지 못한 소수 지배계급도 존재합니다. 반면 피지배계급의 경우 소수만이 새로운 정착성 양식에 적응하고 다수의 삶은 피폐해지기 쉽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공간이 축소되거나 무가치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정착성 양식의 변화는 지배계급 내부에서나 피지배계급 내부에서나 격렬한 갈등을 유발하게 됩니다. 시비는 이렇게 발생합니다. 성심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서 장자는 말합니다.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다는 것은 마치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궤변과 같이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시비가 벌어질 일 없는 유목민의 삶을 고려하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시 머물러 있는 곳을 떠날 수 있었던 유목민들의 자유를 생각하면, 장자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그들은 궁궐을 지을 필요도, 수로를 인위적으로 만들 필요도, 대지에 거대한 울타리를 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잘 녹지 않으면 물길이 변하고 오아시스도 장소를 옮기기 때문이죠. 그에 따라 초 지도 자리를 옮깁니다. 결국 정착은 중앙유라시아에서는 어리석은 고집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도 사막의 모래 속에 잠자고 있는 성곽들의 잔해가 침묵 속에서 웅변하는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스키타이나 흉노처럼 국가나 제국을 꿈꾸었던 불행한 유목민들이 어떻게 모래폭풍 속에서 소멸되어갔는지, 21세기 현재 아직도 유목생활을 하는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떠날 수 있는 자유와 힘, 그들이 정착생활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일 겁니다.
정착민적 마음, 즉 성심은 내 집, 내 땅, 나아가 내 것이라는 강력한 소유욕과 함께합니다. 반면 유목민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을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들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중심이고 그 바깥은 주변이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모든 곳이 중심이자 동시에 모든 곳이 주변입니다. 그래서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부유합니다. 수십, 수백 킬로미터 반경이 자기 삶의 영역이니까요. 동시에 유목민은 정착민보다 가난합니다. 어떤 곳도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죠. 내외, 빈부, 생사 등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마음, 바로 이것이 유목민의 마음입니다. 시비가 유목민에게 낯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그래서 장자는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던 겁니다. 성심이 없다면 시비도 없다는 통찰, 혹은 정착 생활이 시비를 낳는다는 통찰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장자가 우(禹)임금을 언급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여기면 설령 신비한 우임금이라도 알 수 없는 일일 텐데, 나 또한 어찌하겠는가!” 중국 대륙을 거대한 인간농장으로 만든 하(夏)왕조의 창시자가 바로 치수(治水)로 유명한 우(禹)입니다. 동시에 그는 세습 왕조의 전통을 중국 대륙에서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내 국가라는 의식, 혹은 내 자식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세습 왕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모두 기원전 2000년 전후에 중국대륙에서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비극입니다. 농업경제, 정착생활, 지배와 피지배자, 소유 관계 등을 만든 우는 성심, 즉 정착민적 마음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장자는 “아직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없는데도 시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들으면 우임금도 당혹했으리라고 조크를 던진 겁니다. 광막지야에 서서 장자는 미소로 말합니다. 삶의 문제는 답을 찾아 푸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식의 삶을 살아내야 해소되는 것이라고요.
인용
18. 신과 영혼에 대한 애달픈 갈망 / 20. 몸과 마음이 교차하는 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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