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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20. 몸과 마음이 교차하는 신명(취객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2부 물결을 거스르며 - 20. 몸과 마음이 교차하는 신명(취객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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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몸과 마음이 교차하는 신명

취객 이야기

 

 

대개 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질 때, 설령 부상을 입을지라도 죽는 경우는 없다. 뼈와 관절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해로운 일을 당한 결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그의 신()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수레를 탈 때도 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수레에서 떨어져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죽음과 삶 그리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에, 외부 사물과 마주쳐도 위축되지 않는다.

夫醉者之墜車, 雖疾不死. 骨節與人同而犯害與人異, 其神全也. 乘亦不知也, 墜亦不知也, 死生驚懼不入乎其胸中, 是故遻物而不慴.

 

술에서 온전함을 얻은 저 사람도 이와 같은데,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는 경우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성인(聖人)은 자연에 품어져 있기에, 그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없다.

彼得全於酒而猶若是, 而况得全於天乎? 聖人藏於天, 故莫之能傷也. 달생2

 

 

육체노동 vs 정신노동

 

맹자(孟子)고자(告子()편을 보면, “대체(大體)를 따르면 대인(大人)이 되고 소체()를 따르면 소인(小人)이 된다[從其大體爲大人, 從其小體爲小人]”맹자의 말이 나옵니다. 마음을 커다란 몸이라고 보고 몸을 작은 몸이라고 보는 발상이 이채롭습니다. 육체노동에 대한 정신노동의 우월성을 토대로 맹자는 지배계급을 커다란 사람, 즉 대인으로 그리고 피지배계급을 작은 사람, 즉 소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 소인은 대인보다 육체적으로 월등한 경우가 많습니다. 육체노동은 소인을 강건하게 만드니까요. 제자백가 중 장자만이 거의 유일하게 대인이 작고 오히려 소인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인 사유나 인식에 대해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문자와 숫자를 다루면서 직접적 생산 활동을 하지 않았던 지배계급에 대한 그의 반감과 함께합니다. 목축이든 농경이든 아니면 수공예든 피지배 계급, 즉 소인(小人)의 노동이 없다면, 대인(大人)이라 불리던 통치자나 지배계급은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대인이 없다면 소인의 삶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건강하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대인은 소인에 기생하지만 소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 바로 여기에 소인이 결코 작지 않고 오히려 크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윤편 이야기포정 이야기에서 장자가 바퀴를 만드는 장인이나 소를 잡는 푸주한을 거의 성인(聖人)처럼 묘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가 강조하는 개념이 바로 신()이었습니다. 분명 신은 마음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그러나 신은 일방적으로 몸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몸과 함께 가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쉽습니다. 육체적 이성(bodily reason)이라고 신을 규정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거꾸로 이성적 육체(reasonly body)라는 표현도 가능할 겁니다.

 

스피노자처럼 장자에게 있어 몸과 마음은 두 가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삶이 가진 두 가지 표현일 뿐입니다. 바로 이것이 스피노자의 표현주의(expressionism)입니다. 몸이 가면 마음도 가고 마음이 가면 몸도 가는 건강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도 그 사람에게 가지만 동시에 몸도 그 사람에게 가려고 할 겁니다. 마음도 그 사람이 그립고, 몸도 그 사람이 그리운 상태입니다. 마음은 그 사람에게 가지만 몸은 가고 싶지 않은 불행한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떨어져서는 보고 싶지만 막상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심지어 상대방이 키스라도 하려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기까지 합니다. 극단적인 관념적 사랑, 플라토닉 사랑이죠.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평상시 마음은 그다지 상대방에게 가지는 않지만, 그 사람과 함께하면 격렬한 스킨십을 시도하며 상대방의 몸을 탐닉하는 겁니다. 어떤 여자도 좋고 어떤 남자도 좋다는 식의 유물론적 사랑,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건강한 사랑은 에로스적이면서 동시에 플라톤적입니다. 상대방의 몸을 쓰다듬을 때 그의 마음도 보듬고, 그의 마음을 보듬으며 포옹을 합니다. 이성적 육체나 육체적 이성은 바로 여기서 의미를 갖습니다. 몸적 마음이자 마음적 몸이지요. 바로 이것이 신입니다. 포정 이야기에서 포정의 마음이 그의 손, 그의 칼, 그리고 소의 곁에 있었다는 걸 기억하면 쉽습니다.

 

소를 잡을 때 포정의 마음과 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소에게 가 있었습니다. 마음만 가서는 혹은 손만 가서는 결코 소의 결에 그리 근사하게 칼날을 밀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마음만 가는 사랑도 그 사람에게 이를 수 없고, 몸만 가는 사랑도 그 사람에게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소마다 결이 다르듯 사람마다 그 결이 다르니까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신의 경험이 많을수록 우리는 익숙한 타자에서부터 생면부지의 낯선 타자까지 소통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장자가 소인을 높이 평가한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노동을 제대로 하려면, 마음과 몸이 동등하게 그리고 교차하면서 작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정신노동 종사자들은 본질적으로 건강하지 않습니다. 소인의 노동을 착취하는 것도 문제지만, 몸의 역량을 위축시키니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도 힘들죠. 어쩌면 이것은 몸을 가급적 움직이지 않으려는 삶, 즉 지배계급으로서의 삶을 추구한 업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포정이라는 삶의 달인이 표현하고 느끼는 신, 타자와의 황홀경을 맛보기는커녕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달생편의 취객 이야기가 취객을 비유로 끌어들여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마음의 과도한 작용이 느슨해진 취객은 놀랍게도 억압된 몸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회복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술에 취한 짧은 시간이나마 취객이 신을 경험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마음에만 매몰된 사람들에게 몸의 역량은 이미 심각하게 위축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취객의 신은 술에 취해 마음의 역량이 순간적으로 약화되어 이미 위축된 몸의 역량에 맞추어져 느껴지는 겁니다. 취객의 신이 윤편이나 포정이 느끼는 신과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달리는 수레에서 떨어졌어도 취객이 다치지 않은 까닭

 

취객 이야기는 취객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로 시작됩니다. “대개 술에 취한 사람이 수레에서 떨어질 때, 설령 부상을 입을지라도 죽는 경우는 없다. 뼈와 관절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만 해로운 일을 당한 결과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그의 신이 온전하기 때문이다.” 수레에 탄 사람이니 소인이 아니라 대인입니다. 전국시대 중기에 수레는 더 이상 전쟁에 직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의전용으로는 여전히 사용되었습니다. 수레를 모는 소인은 수레를 조심스럽게 몰았을 겁니다. 길이 어둡고 주인도 인사불성이었으니까요. 불행히도 주인은 수레에서 떨어집니다. 소인은 말고삐를 잡고 있느라 그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은 크게 다치지 않았습니다. 술이 그의 마음의 역량을 약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장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술이 그의 마음을 비워버린[]’ 것입니다. 화물을 가득 채운 배가 다른 배와 부딪혔을 때 받는 충격과 빈 배가 다른 배에 부딪혔을 때 받는 충격을 비교해볼 수도 있습니다. 하긴 지금도 우리는 갓난아이가 고층 건물에서 떨어졌을 때 기적적으로 무사한 경우를 목도하기도 합니다. 어른이 떨어지면 크게 다치거나 죽기 쉽습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크면 몸이 경직되어 지표면에 닿을 때 충격이 더 크기 때문일 겁니다. 수레에서 떨어진 술 취한 사람은 갓난아이와 같은 마음 상태, 아니 몸 상태와 비슷합니다. 몸이 지표면에 닿는 순간 그의 마음은 그의 몸에, 나아가 떨어지는 땅에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신, 육체적 이성이 작동한 겁니다. 고양이가 땅에 떨어질 때 자신의 몸을 부드럽게 만드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죠.

 

마음으로만 삶이 영위되면, 마음은 눈사람을 만들려고 눈덩이를 굴릴 때처럼 거대해지고 무거워져 삶을 짓누를 겁니다. 빈 배가 아니라 엄청난 짐을 실은 배가 됩니다. 취객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이렇게 거대해지고 무거워진 마음의 상태를 취객의 상태를 반례로 삼아 숙고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취객이 수레를 탈 때도 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수레에 서 떨어져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수레 아래와 수레 위라는 구별, 아니 정확히 말해 비교가 중요합니다. 수레 아래는 수레 위보다는 안전하고, 수레 위는 수레 아래보다 조심해야만 합니다. 취하지 않았을 때 대인은 분명 수레 위로 오르면서 불안할 겁니다. 여기에 더해, 수레가 움직이면 그는 더 긴장할 겁니다. 그의 마음은 걱정과 불안감에 싸이면서 자신의 몸에, 그리고 수레의 움직임에 몰입하지 못하게 됩니다. 수레가 지표면의 돌이나 턱에 부딪혀 털컥거리는 순간, 그 리듬을 타지 못한 그는 떨어지기 쉽습니다. 긴장으로 굳어진 그의 몸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긴장하지 않았을 때보다 당연히 심한 충격을 받을 겁니다. 반대로 취객은 수레의 위와 아래라는 구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수레 위라고 해서 혹은 수레가 달린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더 긴장하는 법도 없지요. 여기서 취객이 수레를 탔는지 안 탔는지 모를 정도로 실신한 상태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수레 아래가 수레 위보다 안전하다는 의식이나, 수레 위가 수레 아래보다 불안하다는 의식이 없을 뿐입니다. 취객은 수레 위와 비교하지 않은 채 수레 아래에 있고, 수레 아래와 비교하지 않은 채 수레 위에 있는 셈입니다. 당연히 그는 수레 아래가 안전하다거나 수레 위가 불안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30센티미터만 나아가면 추락하는 낭떠러지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평지에 선을 긋고 그 뒤로 30센티미터 물러나 서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30센티미터 바깥과 지금 서 있는 곳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낭떠러지를 겨우 30센티미터 앞두고 있으면 우리는 불안과 걱정이 커져만 갑니다. 우리 몸은 그만큼 작아지고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그 순간 몸은 굳어버리고, 심지어 30센티미터 앞 낭떠러지로 쏠리는 느낌마저 듭니다. 하지만 만약 두 곳을 비교하지 않는다면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은 평지에 서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겁니다.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우리 발에 나아가 낭떠러지를 30센티미터 앞둔 안전한 땅에 있게 됩니다. 어디에 있든 그곳을 다른 곳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암벽 바닥에서 암벽을 오랫동안 올려다보면 불안감에 몸이 굳어 암벽을 오르기 힘들 겁니다. 암벽 위에서도 아래를 오래 내려다보면 불안감이 몸을 감싸게 됩니다. 몸이 암벽 바닥에 있으면 마음도 거기에 있어야 하고, 몸이 암벽 중간이나 암벽 위에 있으면 마음도 중간이나 위에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마음이 몸이 밟고 있는 곳을 잠시 떠날 때도 있습니다. 비교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에 밟을 곳을 보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불안과 걱정은 우리를 감싸지 않습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가 발을 떼지 못하도록 몸이 굳어버리게 만들 테니까 요, 마음, , 마음, 몸으로 움직일 뿐입니다. 물론 몸이 굳지 않은 채 암벽을 올라도 떨어지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몸이 굳지 않았기에 장비를 이용하거나 혹은 바위 돌출부나 풀 등을 잡아 위기에서 벗어날 희망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클 겁니다. 그래서 장자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대개 술에 취한 사람 이 수레에서 떨어질 때, 설령 부상을 입을지라도 죽는 경우는 없다고 말입니다.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다

 

취객 이야기의 핵심은, 자신의 몸이 있는 곳을 다른 곳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마음은 몸이 있는 곳을 비교 불가능한 것으로 긍정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달리는 수레 위도, 낭떠러지를 30센티미터 앞둔 곳도, 암벽 중간 매달려 있는 돌출부도, 혹은 어떤 곳이라도 몸이 있다면 마음도 그곳을 편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몸과 교차하는 마음, 즉 신이 가능합니다. 취객 비유를 마치면서 장자는 말합니다. “죽음과 삶 그리고 놀라움과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기에, 외부 사물과 마주쳐도 위축되지 않는다.” 죽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나 살아야만 한다는 갈망이 마음에 가득 차면 우리 몸은 굳어버립니다. 당연히 자신이 직면하는 상황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습니다. 수레가 조금만 흔들려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발이 조금만 미끄러져도 우리는 수레에서, 낭떠러지에서 그리고 암벽에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수레 위를 수레 아래와, 낭떠러지를 평지와, 암벽을 땅바닥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수레에 탄 취객은 저절로 자기 몸과 수레의 운동에 마음을 모읍니다. 당연히 그는 수레의 운동, 나아가 지표면의 요철을 리드미컬하게 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레는 뒤집힐 만한 턱을 만나 휘청거릴 수도 있고, 취객이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몸이 공중에 던져질 때도 그는 두려움이 없고, 땅에 닿는 순간에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는 부드럽게 날아서 편안하게 땅에 닿을 겁니다. 술로 인해 그의 신이 온전하기 때문이죠.”

 

술은 분명 비교 의식을 없애주는 마술을 부립니다. 자신의 몸이나 몸이 있는 곳만을 긍정하도록 만드는 묘약인 셈입니다. 여기서 몸은 이미 평상시 비교 의식에 위축되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불안과 걱정을 덜어내 마음을 가볍게 해도, 그 마음이 만나는 몸은 이미 위축된 몸입니다. 그래서 술은 서글픈 데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취객 이야기에 명시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 사람, 수레를 몰던 소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레가 거친 노면을 요동치며 움직일 때 맨 정신의 대인은 불안감에 수레를 움켜잡을 겁니다. 반면 소인의 마음은 자신의 몸, 고삐, 수레 그리고 노면에 가 있을 겁니다. 소인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이미 수레를 탈 때도 탄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수레에서 떨어져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경지에 있죠. 수레가 넘어질 정도로 휘청거려 대인과 소인이 모두 땅바닥에 떨어졌다면, 경직되어 있던 대인이 크게 다쳐도 소인은 그보다 가벼운 부상만 입을 겁니다. 술에 취한 대인을 태우고 소인 이 수레를 모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인이나 소인이 수레에서 떨어져도 분명 소인의 부상이 경미할 테니까요. 수레 몰기의 장인인 소인은 술을 마실 필요가 없습니다. 수레를 몰 때 그의 마음은 이미 그의 몸, 타고 있는 수레 그리고 노면과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의 마음은 육체적 이성, 즉 신의 상태에 있었던 겁니다. 마치 수레바퀴를 깎을 때의 윤 편처럼, 마치 소를 잡을 때의 포정처럼 말입니다. 더군다나 수레를 몰 때 소인의 거동은 마음적 몸, 혹은 몸적 마음으로 신을 연속적으로 표현하고 느낀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두려움이 사라졌지만 몸의 흔들림에 마음을 맡기는 취객의 수동성과는 구별되는 상태입니다.

 

취객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장자는 말합니다. “술에서 온전함을 얻은 저 사람도 이와 같은데,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는 경우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술에서 온전함을 얻은 사람이 술에 취한 채 수레에서 떨어진 대인을 가리킨다면,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는 사람은 자기 주인과 함께 맨정신으로 떨어진 소인을 가리킵니다. 자연으로 번역한 천() 개념은 인위로 번역되는 인() 개념과는 대조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 자연이나 천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역량과 아울러 주어진 타자적 상황을 가리킵니다. 결국 자연에서 온전함을 얻었다는 말은 마음의 역량이 몸의 역량과 함께하고, 나아가 몸이 마주치는 타자들과 함께한다는 것, 간단히 말해 마음이 신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합니다. “성인(聖人)은 자연에 품어져 있기에, 그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노면의 요철을 따르는 수레, 수레를 끄는 말, 수레에 타고 있는 몸, 말의 고삐를 잡고 있는 손 등이 모두 푹신한 침구처럼 소인을 편하게 만드는 장면을 떠올려보세요. “자연에 품어져 있다는 장자의 말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여기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수레를 몬다는 의식은 없습니다. 자신이 수레를 모는 것만큼 노면도 말도 고삐도 수레를 몰고 있는 셈이니까요. 물론 그럼에도 소인은 드문 일이겠지만 수레에서 떨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이라면 죽었을 상황에서도 소인은 부상만 입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라면 부상을 입었을 상황에서도 소인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을 겁니다. 그러니 소인은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제 대인이 아닌 소인에게서 성인을 발견하려 는 장자의 속내가 보입니다. 소인은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앞으로 끈덕지게 나아가는 진정한 강자니까요.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19. 광막지야에서 장자가 본 것 / 21. 바로 여기다, 더 나아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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