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는 다르다”
내게 날아오는 공이 슬로모션처럼 느려 보인다는 것은 나의 몸이 빠르다고 느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게 날아오는 공이 수박처럼 커 보이려면 나의 몸이 작아진 것처럼 느껴야 할 겁니다. 포정도 유사한 경지에 이른 것이죠.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소의 결, 근육과 뼈, 근육과 인대 사이의 너무나 미세한 결이 그야말로 고속도로처럼 넓게 보였으니까요. 이는 포정의 마음이 칼날의 그 날카로운 끝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곳처럼,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당연히 뼈나 인대 등과 부딪힐 일이 없죠. 마치 16차선 도로를 천천히 걸어가는 것 같으니, 도로 외벽에 부딪힐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포정은 19년 동안 칼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 것입니다. 하긴 텅 빈 공간을 가르는 칼이 무슨 저항을 받았다고 무뎌질까요. 바로 여기가 소 잡는 기술이 이를 수 있는 정점입니다. 마침내 포정은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갈 수 있는” 기술을 얻은 겁니다. 이제 포정에게는 못 잡을 소가 없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소 내부의 결들이 16차선 도로를 넘어 허공처럼 휑하게 느껴지니, 두께가 없는 칼을 휘두르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일 겁니다. 바로 이 기술의 정점에서 표정은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산 정상에 올라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자신의 도는 기술을 넘어선다고 자신했을 때 그가 기술 끝에서 발견했던 것은 네 글자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응축됩니다. 매지어족(每至於族)! ‘매번’을 뜻하는 부사 ‘매(每)’, ‘이르다’를 뜻하는 동사 ‘지(至)’, ‘~에’를 뜻하는 일종의 어조사 ‘어(於)’, 그리고 ‘무리’나 ‘묶음’을 뜻하는 명사 ‘족(族)’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매지어족’은 ‘매번 근육과 뼈가 모여 있는 곳에 이른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16차선 고속도로에서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는데 그 한가운데서 차를 전복시킬 장애물을 만난 셈이고, 허공에 칼을 휘두르는데 그 허공에서 예상치 못한 무언가와 조우한 셈이죠.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갈 수 있는” 기술이 무력해지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어제 잡은 소와 달리 지금 잡는 소에게만 있는 장애물입니다. 바로 여기서 포정은 모든 소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소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지어족’이라는 문장에서 ‘매(每)’라는 글자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각각의 소는 다른 소와는 다른, 자기만의 단독성(singularity)을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타자의 완전한 타자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 단독성과 소통하지 못하면 지금 칼을 댄 소는 제대로 해체될 수 없습니다. 틈이 있는 뼈마디가 갑자기 틈이 없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이 하늘 위에서 올라갈 수 없지만 올라가야 하는 어떤 곳을 발견한 형국입니다. 누구도 가본 적이 없기에 길도 없습니다. 올라가면 길이 만들어질 테지만, 그 길은 푸른 하늘에 잠시 만들어졌다 사라지고 말 겁니다. 하지만 허공 속에서 만난 그 무언가, 소의 단독성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날개 없이 나는, 목숨을 건 비약일 겁니다. 그만큼 조심스럽고, 그만큼 과감해야만 감당할 수 있는 일이죠.
탱고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부분, 진정 위험한 대목이 시작된 겁니다. 이 부분을 통과하지 못하면 앞의 전체 춤사위는 무의미해지고 맙니다. 성공하면 근사한 희열이 찾아올 테지만, 실패하면 19년의 기술마저 무용지물이 되고 칼날도 이가 빠질 겁니다. 도가 없는 곳에 도를 만드는 일이기에 포정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다행히도 포정의 칼은 최종 장애물을 무사히 통과합니다. 포정은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는 곳을 통과한 것이고, 날개 없이 날아 창공 위 더 높은 곳에 이른 겁니다. 포정에게는 묵직한 행복감이 찾아듭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 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하지만 포정은 압니다. 행복은 잠시뿐이라는 것을요. 내일 또 다른 소를 만나면 포정의 칼날은 여전히 망가질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포정만의 상황은 아닙니다. 연애의 고수도 새로 만난 연인과의 연애를 두려워합니다. 지금의 연인은 과거의 연인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요. 연애는 하면 할수록 힘들고, 산은 타면 탈수록 힘들고, 악기는 연주하면 할수록 힘들고, 탱고는 추면 출수록 힘든 법입니다. 문혜군은 포정의 이야기를 다 듣고서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삶의 기름’이 무엇인지 터득했노라[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 삶의 기름은 한자 ‘양생(養生)’을 풀이한 말입니다. 문혜군이라는 군주는 정말로 포정의 도를 이해했을까요? 이해했다면 포갑, 포을, 포병 그리고 포정이라는 네 명의 푸주한을 그들의 단독성으로 만나게 될 겁니다. 여기서 푸주한이라는 신분이나 지위는 힘을 잃게 됩니다. 이렇게 신분과 지위의 힘이 무력해지는 순간, 군주로서 그의 지위도 덧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과연 문혜군은 네 명의 푸주한, 나아가 피지배자들과 동등한 삶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까요? 타자와 ‘같이하면서 관계를 맺는’ 춤은 이렇게 치명적인 데가 있는 것입니다.
인용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 10. 텅 빈 하늘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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