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을 매개로 타자와 하나가 되는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은 ‘포정이 소를 바르다’라는 뜻입니다. 자전거를 잘 타게 된 사람이나 근사하게 사랑하게 된 사람처럼 포정은 소를 잘 잡게 된 푸주한입니다. 네 번째[丁] 푸주한[庖]이라는 그의 이름과는 달리 그는 최상의 푸주한, 랭킹 1위의 푸주한이 된 겁니다. 포정 이야기는 그의 주인 문혜군이 포정이 소잡는 모습을 관찰한 데서 시작됩니다. 핵심은 “칼 쓰는 동작이 리듬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奏刀騞然, 莫不中音]”는 표현에 있습니다. 리듬이 관건이었던 겁니다. 바이올린 소나타를 생각해보세요. 근사한 연주가 펼쳐지려면, 바이올린의 리듬과 피아노의 리듬이 서로 존중하고, 상대방이 소리를 내지 않은 그 여백에 잘 들어가야 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이올린이나 피아노가 동시에 음을 내는 부분일 겁니다. 잘못하면 두 리듬 중 하나가 상쇄되어 파괴될 수도 있으니까요. 피아노 리듬이 바이올린의 리듬으로 들리고, 반대로 바이올린 리듬이 피아노의 리듬인 듯 들려야 할 겁니다. 그 순간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은 상태가 달성됩니다. 공연장 관객들의 귀에는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다 바로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일순간 그 소리는 다시 바이올린 소리로 들리게 될 겁니다. 아니면 두 남녀의 근사한 탱고를 떠올려도 좋을 듯합니다. 남녀 사이에 호흡의 리듬, 심장 박동의 리듬, 팔의 리듬 그리고 다리의 리듬이 서로 존중하고 서로 스며들어야 합니다. 혹은 남자의 마음이 모두 여자의 몸에 가 있고 여자의 마음도 남자의 몸에 가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고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순간에만 멋진 탱고가 플로어에 가득 찰 수 있을 겁니다.
포정이 소를 가르는 기술이 문혜군에게는 한마디로 멋진 춤처럼 보였습니다. 포정과 소 사이에 벌어진 공연이 얼마나 근사했던지 문혜군은 그 공연에 개입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동적인 공연이어서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니, 어떻게 그가 공연에 개입해 포정의 퍼포먼스를 방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쉽게도 퍼포먼스가 끝나자, 문혜군은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맙니다. “기술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물론 포정도 소를 자를 때 문혜군을 의식할 틈이 없었죠. 모든 마음이 자신의 칼과 소의 살결에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퍼포먼스를 마친 순간 포정의 마음은 평상시로 돌아오죠. 바로 그때 그는 주군 문혜군과 그의 탄성을 의식하게 됩니다. 플로어에서 춤을 마친 뒤에야 관객을 의식하는 댄서처럼 말입니다. 마침내 표정은 자신의 퍼포먼스가 매력적인 춤으로 보인 이유를 문혜군에게 알려줍니다. 포정의 말은 문혜군 뿐만 아니라 2,500여 년이 지나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제가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道)이고, 이는 기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드디어 그 유명한 ‘도’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다음 소 잡는 방법에 대해 길게 이어지는 포정의 생생한 묘사는 왜 포정의 댄스와 같은 퍼포먼스가 단순한 기술을 넘어 도라고 불릴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포정 이야기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포정의 도는 어디에 있으며,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것을 자신의 이야기에서 찾으라고 포정은 유혹합니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최고의 푸주한이 될 수 있었는지를 밝히는 포정의 설명을 따라가보도록 하죠.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보이는 것마다 소로 보였다고 합니다. 당구를 꽤 쳐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당구에 확 빠져드는 시기에는 사람들의 머리마저도 다 당구공으로 보이죠. 포정도 모든 사물이 소로 보일 정도로 소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자 이제 소를 보면 온전한 소로 보이지 않고 살, 근육, 뼈 등으로 분해된 것처럼 보이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죠.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스미스 요원을 볼 때 그를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의 흐름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마침내 포정이 자신의 현재 경지를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조우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기관은 쉬고, 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소의 고유한 결을 ‘따르기[因]’에 아직 인대나 건을 베어본 일이 없습니다[臣以神遇而不以目視, 官知之而神欲行. 依乎天理, 批大卻, 導大窾因其固然. 技經肯綮之未嘗微礙].” 신이란 무엇일까요? 나는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나 감각 자료를 처리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내 손과 하나가 되어 있는 마음, 소의 내부 결을 느끼는 마음, 한마디로 자신의 몸의 리듬과 소의 몸의 리듬과 하나가 되는 마음입니다. 개념화해본다면 육체적 이성(bodily reason) 정도가 될 것 같네요. 몸과 하나가 되고 그 뿐만 아니라 내 몸을 매개로 타자와 하나가 되는, 그 어떤 마음을 신(神)이라 부릅니다. 족구나 야구 등 구기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겁니다. 공에 집중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어느 순간 공이 슬로모션처럼 굉장히 느리게 다가옵니다. 그뿐 아니라 공을 패스하는 사람들의 동작도 느려 보이고, 공기조차 느려지는 것 같고 주변 소음마저 느릿느릿해져 다 식별되는 느낌! 당연히 공을 발로 차거나 배트로 치는 것이 너무 쉬울 겁니다. 나의 그러한 동작을 본 사람은 탄성을 지르겠지요. 어떻게 저렇게 빠른 공을 정확히 맞힐 수 있을까!
인용
8.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네 / 10. 텅 빈 하늘의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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