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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28. 허영의 세계에서 기쁨의 공동체로(새끼 돼지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28. 허영의 세계에서 기쁨의 공동체로(새끼 돼지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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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허영의 세계에서 기쁨의 공동체로

새끼 돼지 이야기

 

 

우연히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 돼지들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잠시 후 새끼들은 놀라 눈망울을 굴리며 모두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 새끼들은 어미에게서 자신을 보지 못했을 뿐이고, 어미에게서 유()를 얻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새끼들이 자기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어미라는 형체가 아니라 그 형체를 움직이도록 한 것이다. ()

適見㹠子食於其死母者. 少焉眴若, 皆棄之而走. 不見己焉爾, 不得其類焉爾. 所愛其母者, 非愛其形也, 愛使其形者也. ()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은 위나라 영공에게 유세를 했다. 영공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다리가 너무 앙상해 보였다. 옹앙대영(甕盎大癭)은 제나라 환공에게 유세를 했다. 환공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너무 앙상해 보였다. 그러므로 그 매력이 월등하다면 그 형체는 잊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다. 이것이 바로 진짜 잊음이라고 말한다.

闉跂支離無脤說衛靈公, 靈公說之, 而視全人: 其脰肩肩. 甕盎大癭說齊桓公, 桓公說之, 而視全人: 其脰肩肩. 故德有所長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而忘其所不忘, 此謂誠忘. 덕충부5, 7

 

 

보는 자가 보이는 자를 지배한다

 

시선의 정치경제학은 억압사회에 길들여진 인간의 서글픈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평온한 굴종을 선택한 결과, 피지배자들은 지배자의 간택과 총애를 놓고 경쟁하게 됩니다. 지배자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으니까요. 피지배자들은 지배자가 가진 권력과 부의 기원을 쉽게 간과합니다. 피지배자들이 복종과 수탈을 감내하지 않았다면, 지배자도 있을 수 없고 당연히 권력과 부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권력과 부의 독점은 원초적 범죄입니다. 안타깝게도 권력과 부의 독점은 장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엄연한 현실입니다. 부당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피지배자들은 지배자의 시선을 붙잡아 그의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려고 경쟁하게 됩니다. 그래야 피지배자는 지배자가 독점한 권력과 부의 일부분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지배자의 눈밖에 났다가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절박감도 한몫 단단히 합니다.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소유되기를 욕망합니다. 출퇴근 노예로 비유할 수 있는 자발적 복종입니다. 그러니 피지배자는 지배자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매력을 갖추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눈으로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외모나 행동일 수도 있고, 아니면 숫자나 문자로 기록되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스펙일 수도 있습니다. 예쁘지 않더라도 예쁘게 보여야 하고 쓸모가 없어도 쓸모 있어 보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허영입니다. 억압사회가 외형에 몰두하는 허영의 사회이기도 한 이유입니다.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화장에 열심인 사람은 대부분 여자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펙을 화려하게 갖추려는 사람은 대개 노동자라는 것만 생각해보세요. 외모든 스펙이든 실제 이상으로 꾸며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안정, 생계 확보, 나아가 지배 계층으로의 신분상승도 꿈꿀 수 있으니까요. 설령 억압 사회일지라도 이미 정착생활에 길들여져 다른 삶을 꿈꿀 수 없게 되어 벌어진 애달픈 현상입니다.

 

여기서 묘한 아이러니가 벌어집니다. 지배자마저도 외형에 병적으로 몰두하게 되는 겁니다. 보는 자가 지배자라면 보이는 자는 피지배자임에도 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걸까요? 피지배자는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숙이기 위해 순간적으로나마 한 번은 반드시 지배자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심리적 요소도 개입합니다. 예복과 금관을 벗고 벌거숭이가 되는 순간, 지배자는 자신이 피지배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걸 직감하고 있는 겁니다. 간혹 지배자가 피지배자와 목욕을 함께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군주가 신하에게 목욕을 함께 하자고 권한다면, 군주는 그 신하를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 하는 겁니다. 화려한 곤룡포를 벗음으로써 군주가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으니 신하로서는 감격할 일입니다. 이제 예쁘지 않거나 쓸모가 없다면 군주에게 내쳐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사라질 테니까요. 하긴 형이 동생을 귀양 보내거나 정리해고하는 일은 드물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배자는 본능적으로, 심지어 병적으로 화려한 외양에 집착합니다. 피지배자의 눈에 지배자로 식별되기 위해 지배자는 빛나는 금관과 화려한 의복을 과시합니다. 국가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억압사회의 유물들, 특히 피라미드나 거대 분묘 안의 풍경을 들여다보세요. 죽어서라도 화려한 금관과 의복을 가지고 있으려는 지배자들의 욕망, 외양에 대한 그들의 병적인 집착을 우리는 쉽게 확인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자신의 외양을 영원히 보존하려 하죠. 어쩌면 바로 이것이 억압사회 도처에 허영이 독버섯처럼 번식하는 이유일 겁니다. 지배계급의 구별짓기 욕망은 피지배계급 내부에도 퍼지니까요. 더 예쁘고 더 쓸모 있다는 과시는 지배자들의 소유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경쟁자들의 경쟁 욕구도 무력화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 경쟁자를 좌절시키는 화려한 옷, 세련된 집, 귀족적 소비 패턴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될 겁니다.

 

겉치레와 허영에 젖은 억압사회는 시각이라는 감각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농경이든 유목이든 아니면 산업이든, 어떤 경제체제로 돌아가든 상관없습니다. 지배와 복종 관계, 즉 국가주의가 작동하는 한 겉치레와 허영은 전체 사회를 휘감아 버리니까요. 억압사회를 벗어나는 작은 실마리가 허영의 논리를 극복하는 데 있다면, 우리는 시각의 독점적 지위를 해체해야만 합니다. 보는 자가 보이는 자를 지배한다는 사실, 그리고 보이는 것만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군주가 보이지 않으니 무릎 꿇을 일도 없고, 광대한 토지가 보이지 않으니 그걸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신상품도 보이지 않고 명품도 보이지 않으니 허영을 발휘할 일도 없을 겁니다. 금관도, 궁전도, 외모도, 스펙도 식별할 수 없다면, 극단적으로 말해 인간 이 모두 일순간 눈이 멀게 된다면, 국가주의나 자본주의 체제도 모두 모래성처럼 무너질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맹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죠.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지거나 힘들어질 테니 말입니다. 시각으로부터 독점적 지위를 박탈해 다른 감각과 대등하도록 만들면 됩니다. 시각이 권좌를 차지하는 감각의 제국을 붕괴시키고,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른 감각들도 시각만큼 발언권을 갖게 하는 겁니다. 감각들의 민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시각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리고 의심되면, 강고해 보이기만 하던 억압사회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덕충부에 등장하는 새끼 돼지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바로 이 작업을 하려 했습니다. 억압사회가 시각 지배적인 사회라는 걸 간파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허영과 겉치레의 억압사회에 균열이 생길 때, 그 갈라진 틈으로 어떤 삶의 전망이 보일까요? 감각들이 민주화될 때, 우리 삶은 어떻게 변할까요? 새끼 돼지들의 비극적인 상황에서 장자는 우리의 이런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새끼 돼지들은 왜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을까

 

새끼돼지 이야기는 제목처럼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새끼 돼지들일화로 시작됩니다. 새끼 돼지들은 어미의 젖으로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미의 품을 파고듭니다. 어제도 품을 내주었던 어미였으니까요. 그런데 젖을 빨던 새끼들은 시각적으로는 어제와 같은 어미지만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낍니다. “잠시 후 새끼들은 놀라 눈망울을 굴리며 모두 어미를 버리고 달아나고맙니다. 눈으로는 분명 자기 어미로 보였기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나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여기서 새끼들이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이는 새끼 돼지들이 시각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인간과는 매우 다르죠. 간혹 죽은 애인이나 아이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시신과 상당한 시간 함께하는 엽기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하죠. 그만큼 우리는 시각에 압도적인 지배를 받는 동물입니다. 고인의 시각적 형체를 유지하기 위해 시신을 방부 처리하거나 근사한 영정을 만들어 장례를 지내는 것만 봐도 시각 중심적인 면모가 인간의 특징인 것은 분명합니다.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해 고인의 시각적 형체가 변해야, 인간은 고인을 떠나거나 떠나보낼 수 있습니다. 새끼 돼지가 몇 분도 걸리지 않고 시각의 지배를 벗어난 것과는 정말 대조적입니다. 장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끼 돼지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난 이유를 분석합니다. “그 새끼들은 어미에게서 자신을 보지 못했을 뿐이고, 어미에게서 유()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不見己焉爾, 不得類焉爾]”라고 장자는 논평합니다.

 

장자의 언급에서 어미에게서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원문에 ()’이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고전 한문에서 이 한자는 어차(於此)’를 줄인 문법적 기능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이것에서이것으로부터라고 풀이됩니다. ‘이것은 당연히 어미 돼지를 가리킵니다. 어미에게서 자기를 보고 어미에게서 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반대 경우를 생각해보죠. 어미돼지가 살아 있을 때 새끼는 어미에게서 자신을 보았고[見己]” “유를 얻었을[得類]” 겁니다. 새끼가 어미에게서 자신을 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자신이 어미가 사랑하는 대상임을 아는 겁니다. 새끼는 어미의 젖을 빨 때 기쁨을 느끼고 어미도 자신의 젖을 내줄 때 기쁨을 느낀 겁니다. 어떤 타자와 만나 삶의 자유(conatus)’가 증진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스피노자의 통찰입니다. 이제 새끼가 어미에게서 를 얻는다는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새끼와 어미는 기쁨의 공동체로 묶인 겁니다. ‘는 특정 무리나 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어미와 새끼는 혈연으로 묶였으니 당연히 하나의 유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미의 기쁨과 새끼의 기쁨이 공명하기에 어미와 새끼가 하나의 유로 묶인다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혈연의 형이상학 혹은 혈연의 종교는 우리 인간에게만 적용됩니다. 집안 사정으로 해외로 입양 간 아이가 있다고 해보죠. 수십 년이 지나 어른으로 성장한 그 아이는 부모를 찾으려 합니다. 그들은 우여곡절 끝에 만나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 껴안을 겁니다. 부모로서 아이를 돌봐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회한이고, 아이로서 부모의 사랑을 받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회한입니다. 극적인 만남 이후 부모와 자식은 서로 연락을 주고 받을 겁니다. 그러나 부모와 아이가 기쁨의 공동체로 묶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기쁨의 공동체가 아니더라도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 그것이 혈연이라는 관념의 힘입니다.

 

인간의 경우 어미와 새끼가 하나의 가족을 구성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기쁨의 공동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가진 힘으로, 혹은 사회적 통념이나 시선을 의식해서 어미와 새끼가 한집에 살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서 기쁨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도 부모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아동학대나 가정폭력이 자행되는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는 새끼 돼지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입장입니다. 어미에게 사랑받는 자신을 확인할 수 없고 기쁨의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새끼 돼지는 어미를 버리고 달아날 겁니다. 새끼를 학대하는 어미 돼지, 새끼를 학대하는 어미 늑대, 새끼를 학대하는 어미 말을 볼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새끼 돼지나 새끼 늑대 그리고 새끼 말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날 테니까요. 그래서 새끼 돼지들의 비극적 사건에 대한 장자의 최종 진단, “새끼들이 자기 어미를 사랑하는 것은 어미라는 형체가 아니라 그 형체를 움직이도록 한 것이라는 말은 이런 문맥에서 독해되어야 합니다. “그 형체를 움직이도록 한 것[愛使其形者也]”은 단순히 어미의 생명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새끼에게 품을 내주고 젖을 허락한 어미의 행동은 새끼에 대한 희생에서 어미가 기쁨을 느꼈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한마디로 새끼에 대한 사랑입니다. 물론 어미돼지가 죽으면 어미의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미돼지가 살아 있어도 새끼에게 젖을 내주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경우 새끼 돼지에게 어미 돼지는 죽은 것과 진배없습니다. 이미 기쁨의 공동체는 깨져버렸으니까요.

 

 

 

그 형체를 잊게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타자에게서 우리는 자신을 보고” “유를 얻을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견고한 지배와 복종 관계로 이루어진, 겉치레와 허영이 팽배한 억압사회에서 찾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척, 존경하는 척, 아껴주는 척, 인정하는 척, 예쁜 척, 쓸모 있는 척, 똑똑한 척하는 것이 허영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지배를 사랑이라고, 복종을 존경이라고 정신승리하는 것이 허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끼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젖을 내주는 어미 돼지가 있다면, 어미의 젖이 싫으면서도 외형적으로는 젖을 물고 있는 새끼 돼지가 있다면, 이 기이한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가 바로 우리 인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돼지를 포함한 다른 동물들에게서 이런 서글픈 장면은 찾을 수 없습니다. 외형만 취하는 허영, 진심 없는 겉치레는 오직 만물의 허접인 인간만이 감당하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타자에게서 자신을 보고 유를 얻는경험이 인간에게 기적처럼 발생하는 경우, 즉 잠시나마 허영과 겉치레의 짙은 먹구름이 걷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도 사랑의 관계나 기쁨의 공동체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징표일 겁니다. 새끼 돼지 이야기 후반부에서 장자가 두 가지 극적인 일화를 소개한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일화들을 통해 우리는 허접한 인간도 새끼 돼지의 수준에 오를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돼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는 절름발이에 꼽추였으며 입술마저 없어서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脤)이라고 불리던 사람의 이야기고, 두 번째 일화는 목에 항아리 모양의 혹이 나서옹앙대영(甕盎大癭)이라 불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쁨과 쓸모가 지배하는 억압사회, 시각 지배적인 허영의 사회에서 이 두 사람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너무도 추한 외모이기에 누구도 그들과 가까이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신체적으로 불구이니 국가도 그들을 군대나 노역에 징집할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추한 불구자 두 사람이 군주로부터 절세 미녀나 고사양 스펙의 보유자도 누리지 못한 총애를 받게 됩니다. 먼저 인기지리무신의 경우를 보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위나라 군주 영공(靈公)에게 유세를 하게 됩니다. 그 뒤 영공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다리가 너무 앙상해 보였을정도였습니다. 절름발이이자 꼽추였던 인기지리무신의 다리는 지나치게 긁었는데, 위나라 군주는 그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의 굵은 다리가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옹앙대영의 경우도 똑같은 패턴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옹앙대영도 제나라 군주 환공(桓公)에게 유세를 합니다. 유세가 끝난 뒤 환공은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람을 보면 오히려 그들의 목이 너무 앙상해 보였을정도였습니다. 옹앙대영은 거대한 혹이 나서 목이 지나치게 굵었지만, 환공이 그를 너무나 좋아하게 된 나머지 그의 굵은 목이 기준이 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로 번역한 열지(說之)”라는 표현입니다. 영공은 인기지리무신을 좋아했고, 환공은 옹앙대영을 좋아합니다. 결국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이 각각 어미였다면, 영공과 환공은 두 마리의 새끼 돼지였던 셈입니다. 두 군주는 각각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에게서 자신을 보았고 유를 얻은것입니다. 영공이나 환공은 사실 비범한 군주였습니다. 억압의 피라미드 그 최고 정점에 있었고 최상의 허영을 과시하던 두 사람은 억압체제와 허영의 논리에 깊은 환멸을 느꼈습니다. 궁궐의 모든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척할 뿐 그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모든 관료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척할 뿐 그 누구도 자신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두 군주는 자신도 여자를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사랑하는 척하고, 신하를 그 쓸모 있음 때문에 아끼는 척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권력과 부가 사라지면 이 모든 것들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릴 겁니다. 영공과 환공은 이런 비범한 자각이 있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구나 가까이하기를 꺼리던 두 불구자를 만났던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배와 복종과는 무관한 사랑의 관계, 허영에서 벗어난 기쁨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자신이 금관과 곤룡포를 빼앗겨도, 심지어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에서 팔이나 다리가 잘려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는 사랑의 짝을 찾은 겁니다. 그 짝과 함께할 때 영공이나 환공은 더 이상 군주일 수도 없습니다. 권력과 부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으로만 교환되는 관계에 돌입했으니까요. 새끼 돼 지가 어미 품에서 젖을 빨다가 편히 잠들고, 어미가 그런 새끼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새끼 돼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장자는 그 매력이 월등하다면 그 형체는 잊게 되는 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말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 형체를 잊게 되었을 때 우리는 타자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억압사회가 각인시킨 시각 지배적인 사유, 억압사회를 유지하는 시각 지배적인 삶을 극복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장자가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다. 이것이 바로 진짜 잊음이라고 말한다고 탄식했던 이유입니다. 인간이 돼지의 품격을 회복한다는 것! 생각보다 멀고 험한 길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27. 장주가 장자로 다시 태어난 날 / 29.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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